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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인이 보는 고구려 === {{국뽕}} {{부심}} [[파일:이세민.jpg]] {{인용문|'''다시는 [[요동|요하]]를 넘지 말라''' - '''<자치통감>''' 당태종 [[당태종|이세민]]의 유언}} [[파일:쿠빌라이 칸.jpg]] {{인용문|"고려는 만리의 나라이다. 일찍이 [[이세민|당태종]]도 정복하지 못한 나라이다." - '''<고려사절요 원종순효대왕 편>''' [[쿠빌라이 칸]]}} [[파일:ee7c7b2f-84df-4509-ac89-6ce115e0a154.jpg]] {{인용문|(당태종이 고구려를 이기지 못한 것은) [[연개소문|개소문]]이 비상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 '''[[왕안석]]''' 송신종과의 대화중 }} [[파일:20180430123746 spcfhehh.jpg]] {{인용문|경극 '''살사문'''(殺四門) : 1970년대 [[중국]]에서 공연된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의 이름. 칼을 5자루 찬 [[연개소문]]이 [[당태종]] 이세민을 죽이려 쫒자 [[설인귀]]가 나와 [[당태종]] 이세민을 구하는 내용.}} [[파일:20180430123435 mqrqfsps.jpg]] {{인용|강소성 염성시 건호현 소재 몽롱탑(朦朧塔)은 16.7미터 높이에 8각형 누각형식으로 된 3층탑이다. 전설에 따르면 [[당태종|이세민]]이 군대를 거느리고 염성 일대에 병사를 주둔시켰다. 달빛이 몽롱한 어느 늦은 밤 [[당태종|이세민]]이 단기필마로 적진을 정탐하기 위해 다가갔다가 조심하지 않아 늪에 이르게 됐다. 마침 순찰 중이던 적군에게 발각돼 [[연개소문]]이 말을 달려 칼을 휘두르며 쫓아오니 [[당태종|이세민]]은 황급히 말을 재촉하여 달아나다가 말이 길을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그만 늪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말에서 뛰어 내린 [[당태종|이세민]]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치다가 문득 마른 우물을 발견하고는 재빠르게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추격하던 [[연개소문]]이 우물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은 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안에는 거미줄이 가지런하게 걸려있어 사람이 그 안에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버린 [[연개소문]]은 말을 돌려 자기 군영으로 돌아갔다. 훗날 [[당태종|이세민]]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거미줄의 은공을 잊지 못해 우물이 있는 자리에 탑을 세웠다. 어둡고 어려움(蒙)에 처했을 때 우물 속의 거미줄이 자신을 보호해줘 목숨을 건진데서 ‘몽롱(朦朧)’이라는 단어가 생겨났으며 이 탑을 ‘몽롱보탑(朦朧寶塔)’이라 불렀다. 아울러 ‘정혜사’라는 큰 절도 세웠다. 현재 탑의 동북방에 세니하(洗泥河)가 있는데 당 태종이 말과 함께 늪에 빠졌다가 위험에서 벗어난 후 말을 씻었던 곳이라고 한다.<ref>스카이데일리 성현식 -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73214] </ref><ref>사실 이건 전설일 뿐 실제로 이세민이 여기에 간 적도 없을뿐더러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추격전을 벌인적도 없다. 짱깨들이 [[탈무드]] 일화를 연개소문이랑 적절히 쓰까묵은걸로 추정</ref>}} {{인용문|당 태종은 온 국력을 기울였는데 용맹한 장수와 병사들이 견고한 성을 넘지 못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연개소문이 영웅이었는데도 이미 망해버린 나라인양 간주함이 지나쳤던 것이다. 고종 때는 개소문이 죽었으니 이적 한 사람만으로도 취하기에 충분했다. 이적의 재주가 어찌 태종을 능가했겠는가? 상대방의 때가 달랐던 것이다 - [[소동파]]의 4학사 제자 장뢰}} {{인용문|전해지는 말에 대당에는 위징이 있고, 고려에는 개금(蓋金), 백제에는 선중(善仲), 신라에는 짐순(鴆淳)이 있다.-이들은 각자 일방을 맡아 이름을 만리에 떨쳤으니 이들은 모두 당세의 준걸로 지략이 사람들을 뛰어넘었다. - 등씨가전(藤氏家伝 )에서 덴지 덴노}} {{인용문|지난날 [[당태종|선제]]께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고구려에 빈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당나라 시어사 668년 2월> 가언충}} {{인용문|2월17일 정오에 왕씨 성과 송씨 성의 아찰어사 두 대인이 나를 예빈관에서 대접하고는 묻기를, "당신들 나라는 무슨 장기가 있어서 능히 [[수나라]],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데 방법이 있었으므로, 병졸 된 사람들은 모두 윗사람을 친애하고 장상을 위해 죽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고구려]]는 한 작은 나라로서도 오히려 천하의 백만 군사를 두 번이나 물리쳤습니다. 지금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쳐서 한 나라가 되었으니, 물산은 많고 땅은 크며, 재물은 넉넉하고 군사는 강성하며, 충성스럽고 지모 있는 선비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 로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 '''<표해록>''' [[명나라]] 최부}} {{인용문|"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어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천조는 귀국을 금구 무결(金甌無缺)한 국가로 삼으려고 하는데 귀국은 이를 알고 있습니까?" - '''선조실록 39권, 선조 26(1593)년''' [[명나라]] 사신 유원외}} {{인용문|귀국의 강한 군대는 본디부터 천하에 소문이 났는데, [[수나라|수]](隋)ㆍ[[당나라|당]](唐) 때는 어째서 그리 굉장했으며 [[풍신수길]](豐臣秀吉)의 난에는 어째서 그리 심히 겁을 내었습니까? - '''<금계일기> 5월 20일자 기록'''}} {{인용문|"중원(中原) 본토인(本土人) 여응주(呂應周)란 자가 글로 써서 보이기를 ‘가정(嘉靖) 연간에 왜적이 소주·항주를 함락했었으나 그뒤에 방비를 잘했기 때문에 지금은 걱 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의 소매를 잡고 ‘이런 넓은 소매로 전쟁터에서 싸울 수 있겠는가?’ 하고, 갓을 가리키면서 ‘이런 싸맨 머리로 전쟁터에서 싸울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시를 지어 보이기를, <시부는 [[진나라]]의 유풍이요, 병서에 대해 온 나라가 모른다. 높다란 관이 무인의 고깔이요, 넓은 소매 옷의 군복일세. 무딘 창은 섶나무와 같이 썩고, 성을 쌓은 높이는 어깨와 가지런하네. 왜구가 이르렀다는 소문을 듣자, 팔도가 조각 구름처럼 흩어졌네.> 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이 김명원(金命元)과 같이 앉아 있을 때 신들의 갓과 소매를 가리키고 웃으면서 ‘이렇게 하고서 왜적을 제압할 수 있겠는가?’고 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1593)년 2월 20일 乙巳 2번째기사'''}} {{인용문|[[수나라]]와 [[당나라]] 때에는 일찍이 강국으로 불렸는데 지금은 어찌 이토록 나약한가. 당신들은 마땅히 돌아가 당신 나라에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고 自强에 힘써 나라를 보존하도록 하라 -'''遼東巡撫 李化龍의 발언'''}}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urassicgump&logNo=220922524287&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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