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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시작==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후 군을 나누어 북상한다. 선봉장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근데 둘은 원수지간이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의로 이걸 역이용해서 '''한양에 먼저 닿는 한놈에게만 상을 주겠다.'''라고 선언해서 두 장수는 경쟁적으로 치고 올라갔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너도 가라고 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까로 일축했다. 요놈새끼 술수는 뻔하다.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으로 힘 다 뺄때까지 기다렸다가 일본을 낼름 차지하려는 심보다. 부산진에서 [[멧돼지|유해조수]] [[사냥|구제작업]]을 벌이던 [[정발]]이 구제작업을 끝마치고 복귀하는데 바다에서 시커먼 것들이 몰려왔다. 그게 일본군이다. 정발은 방어전을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조총탄에 맞고 죽었다. 20000명 상대로 500명 가지고 5시간 버텼다. 부산진을 털어버린 왜군은 이번에는 동래로 쳐들어갔다. 여기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나무판에 명나라를 치러 가려 하니 길을 비켜달라는 글을 보여주었고(한자로는 정명가도(征明假道)) 이에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어주기는 어렵다는 답신을 보낸다. 바로 전투가 벌어져서 동래성은 함락되고 송상현은 전사한다. 동래부는 당시로 보아도 상당히 큰 고을이었고 제승방략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상당수의 조선군이 동원되어 동래성을 구원해야 했지만 제각기 놀며 늑장대응하다 동래성 구원에 실패했고 적은수의 병력이 지키는 조선식 대형성인 동래성은 백여년의 내전을 거치면서 수성에 특화된 일본식 성에서의 전투로 단련된 좆본군에겐 한끼 식사수준이었다. 동래까지 털렸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부랴부랴 [[이일]]에게 부관 80명을 줘서 상주에서 징발하라 하고 내려보냈으나 제승방략이라는 애미가 쳐 뒤진 병신제도로 인해 동래부터 한양까지 가는 길목이 죄다 허허벌판이라서 징발실패. 하지만 그 허허벌판에서조차도 병력을 모아 대구로 보냈지만 정작 대구에 모인 병력이 이미 다 도망친지라 800명으로 으쌰으쌰하다 떡되서 도망친다. 제승방략이라는 개좆병신 제도 탓에 [[조선]]의 [[사또]]들 중에서 병방('''兵'''房)을 휘하에 두고 있는 [[사또]]라고는 북방에서 근무하는 무과 급제자 출신 사또들과 저기 부산쪽에 내려가 있는 일부 사또들이 전부였다. 그나마 부산쪽 사또 중에서 조차 [[윤흥신]]에게는 병방도 없었다. '''병방이 있어야 징발을 할 거 아냐!''' 이에 선조는 [[신립]]에게 친위대까지 하사하고 지휘봉으로 쓰라고 상방검까지 내줘가며 신립을 문경으로 내려보냈다. 신립은 기병의 달인이라 선조가 준 친위대도 죄다 기병이었다. 근데 지형선택을 잘못해서 새재가 아닌 탄금대로 내려와서 기병으로 배수진을 쳤다. 하지만 일본군은 기병 잡아먹는 귀신이었고 게다가 날씨도 비가 왔다. 결국 탄금대에서 방어하던 조선군이 전멸한다. 신립도 전사했다.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다. 이때 [[광해군]]에게 세자로 책봉한 뒤 분조 만들어서 민심다독이라고했다. 덤으로 이 때 [[경복궁]] 불에 타서 한양핫 찍고 만다. 평양도 버리고 압록강 근처까지 도망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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