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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 [[파일:인플레이션.jpg]] 그냥 인플레이션이 아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이다. 이른바 천문학적인 수치를 뛰어넘는다는 경제학적인 수치를 보여주었다. 시바 감자 한 포대가 얼마나? 돈을 수레로 끌고 가져와야 겨우 산다. 빵 하나가 몇억 마르크나 했다.벽지?ㅅㅂ 걍 대충 돈으로 때워. 돈이 다른것보다 더 잘탄다 독일경제 개판됐다.수장이란놈은 뭐하는거냐? ㄴ 인플레이션이 절정일때는 브뤼닝 슨상님이 경제 관리하셨는데 브뤼닝 슨상님은 (배상금탕감 목적으로) 인플레 어느정도 조장했다. 브뤼닝 센세 운지하고나서 나중에는 돈 안찍어봤는데 경기침체로 공화국 체제까지 운지 후 나치당 집권... ===배경=== 일단 가치있는 화폐란 같은 천원짜리라도 빵 한개를 살때보다 두개를 살수 있을때가 더 가치있다고들 한다. 위에 역사에 써있듯이, 독일은 전쟁으로 모든 경제력을 쥐어짜버렸다. 본디 화폐란 것은 그 자체로는 똥딱는 휴지 그 이상도 이하의 가치도 없다. 화폐가 화폐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기능하기 위해선 정부가 이 액면가치를 보증해 줄때여야 그 진가가 발휘되는 거시다.(여기까진 고딩 사회책만 펴봐도 나오는 이야기고) 저 당시는 각국은 독일을 비롯하여 금태환을 통해서 정부가 액명가치를 보증해주는 금본위제를 체택하고 있었다. (오늘날엔 아니다) 왜냐? 사실 지폐는 중세와 근세에 이미 발명된것이었으나 각국 정부가 미친듯이 찍어내다가 인플레이션을 쳐맞고(사실 저 당시엔 인플레가 뭔지도 몰랐다!) 신용을 잃어버려 아무도 안쓰게 되면서 시중에서 자취를 감춘것이다. 그 와중에 스페인이 남미 식민지에서 은을 대량으로 뽑아내서 전세계에 유통시키자 걍 은을 교환가치로 써먹기 시작해서 기축통화가 되버린게 결정타였다.(이시기 일본이 은을 돈으로 쓰던버릇이 고대로 은행의 어원이되었다) 그러자 은, 금이 모자란 각국정부가 짱구를 굴려서(그리고 금은 덩어리는 시중에서 보관과 운반도 힘들고) 다시 돌아온 지폐였으나 이미한번 시중에서 신용0라서 퇴출당한물건을 다시 써먹기 위해선 담보를 걸어야했는데 그게 짐 당장은 없지만 나중에 생길 그 나라의 금을 건것이 근대지폐의 시작이다.(근데 그렇게 나중에 생길 금 생각하고 찍어낸 지폐는 결국 불태워지고 망했다고 한다.) 즉 금본위제하에선 1원이란 나중에 금1원짜리와 1:1교환이 가능함을 전제로하고 각국 통화량은 각국이 보유한 금의 양과 1:1로 연동되도록 되어있었다. 그런데 독일은 1차대전 패배로 경제는 좇☆망 했고 제국 정부도 좇★망 했으며 곧 대혼란에 빠졌는데 이걸 수습해야될 바이마르 정부는 화폐 교환가치를 보장해줄 담보인 금마저 연합국이 다 배상금으로 뺐어가서 거덜났으며 태환이 정지되었다. 가뜩이나 구 제국정부는 전비가 부족해? 그럼 돈 찍어!를 시전했고 전시물자를 찍어내던 공장들도 전쟁 끝나자 더이상 물건 찍을 필요도 이유도 없어지자 망했다. 즉 화폐가치는 바꿔줄 금은 바닥을 치는반면 시중에 막 찍어낸 돈들이 풀려서 가뜩이나 낮아져 있었는데 거기에 물자 부족이 덮친거시었다. 즉 돈은 넘치게 들고 있는데도 물건을 사지못하는 기이한 상황 ===기록들=== *전후 3년간 물가가 1조배나 올랐다. *한 미망인이 전쟁기간 동안 예금 60만 마르크를 예치한 채로 스위스로 갔었는데 돌아와보니 은행에서 소액계좌는 더이상 맡아줄수 없다며 역시 소액권 부족으로 100만마르크 한장을 편지로 부쳐 주기로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리 찾아도 봉투속에 돈을 찾을수 없었다. 대신 거기에 우체국 소인이 찍힌 우표가 백만마르크였다.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열심이 일을해 저축했지만 동생은 술퍼마시는 백수였다. 근데 전후에 형이 번 돈은 휴지조각이 되었던 반면 동생이 술퍼마시고 차곡차곡 쌓아둔 술병을 팔아서 먹고 살았다고 한다. *하루 숙박에 40만 마르크, 저녁 한 끼에 180만 마르크, 우유 한 통에 25만 마르크. 이게 당시 독일에서 물가가 싼 축에 드는 동네였다고 한다. *물가가 가장 높았을 때는 레스토랑의 한끼 식사가 100~200억 마르크, 학교 구내식당에서도 저녁 한끼가 10억 마르크, 극장표가 3~4억 마르크였다. *돈을 수레로 실어다 놓을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어도 벽지한장조차 사지 못해 그냥 돈으로 도배를 했다. *방석을 살바에 그냥 돈을 깔고 앉는다. *돈이 다발로 있는데도 땔감도 못구해서 그냥 돈을 태워쓴다. *블록이 없어? 돈다발을 갖고 놀면 되지! *절정일때인 1923년 10월 한달동안 물가는 300배가 올랐다 *역시 같은해에 100조마르크화를 발행했다 *이는 전쟁전 화폐가치의 백조분의 1수준까지 떨어진거다. *농민들이 농산물의 판매대금으로 마르크화를 결제를 거부하자 식량부족사태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햇고 폭동까지 일어났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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