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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혹 == [[북한]]의 [[김일성]]에 대한 날조와 미화를 보건대 이성계 이놈도 사실 조선왕조의 날조와 미화로 점철된 경력으로 도배된 게 아닐지 생각된다. 왜냐면 이 인간 일화를 보면 과연 가능한 지 의문인 일화가 꽤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호족출신의 정치군인으로서 싸움 좆도 못하는데 [[최충헌]]처럼 시기 잘타서 권력잡아 그대로 쿠데타에 성공하고 지금의 북한처럼 철저한 세뇌와 통제를 통해 구라를 진실이라고 믿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성계의 공적이 주변국 사료를 통해 교차검증이 안되기 때문이다. 사실 잡은 놈들(그나마 유명한 나하추 새끼도 강남 전투에서 지고 고향에 돌아가 조용히 살겠다고 목숨 구걸하더니 살려 주니까 통수 친 다음에 막상 다시 제압하러 오니까 바로 항복하는 개찌질이다. 도대체 통수를 친 이유도 모르겠다.)이 일군이 아니고 좋게 봐야 이군 정도이기에 관심이 별로 없어 발생한 일이다. 하지만 이성계 능력이 좆도 없었다면 권력을 잡기는 커녕 쿠테타가 쏟아지는 신라 말기 꼴이 됐을 확률이 더 높다는 점에서 이 설은 신빙성이 없다. 아니, 당장 무신정권만 하더라도 최충헌이 정권을 잡기 전까지는 죽창이 난무했다는 걸 잊으면 안된다. 더구나 몽골계 군벌 나하추 격퇴한거랑 홍건적 이긴거는 중국측 기록에도 나온다. 근데 당시 홍무제도 고려군이 명 쳐들어올까봐 전전긍긍했다. ㄴ이건 당시 명나라가 세워진지 얼마 안된 상황에서 지네 정보부 정탐력이 개판이라서 생긴 헤프닝이다. 그리고 우리 조상님들이 지금처럼 광고에 재능이 있어서 실제로 약할 때도 다들 센 줄 알고 있었다. 비록 징집병이지만 오랑캐 짱깨 쪽바리랑 싸우면서 실전경혐 쌓은 전투의 프로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여진족이라는 추측도 있다. 물론 추측에 불과하고 고대라 확인할 방법이 거의 없지만 이성계 여진족 설에서 나오는 지적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의문점들이 매우 크다. 예를 들어서 태조실록에서는 이안사(李安社)가 본래 전주 출신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희한하게도 이성계 집안이 전주에 있었을 때의 기록이 거의 없다. 전주에서 이주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전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기록은 없는 편이다. 문헌에 따르면 이주할 당시 세력이 170여 가(家)에 달한다고 했으니, 이는 이성계 집안이 처음부터 상당한 세력기반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의 1가(家)는 오늘의 대가족보다도 훨씬 더 큰 개념이었다. 그것은 가족 외에, 경제활동에 동원되는 종복들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단순히 호적상의 개념에 그친 게 아니라 일종의 세력 개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170여 가가 이성계 집안을 따라 이주했다는 것은, 이성계 집안이 처음부터 상당한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애초에 머지않은 미래에 신출내기던 이성계에게 적지 않은 병력을 경험으로 삼으라고 주기까지 한다.~~ 솔직히 그런 세력이었다면 이성계 집안이 전주에서 무언가의 발자취가 있어야 정상인데 태조실록에는 이성계 집안이 전주에서 남긴 발자취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냥 전주에서 막강한 세력을 이끌고 옮겨갔다는 식의 기록만 있을 뿐이다. 이성계의 가계(家系)에 관한 태조실록의 기록이 이성계 집안이 정말로 전주 출신인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수십 혹은 수백 가구가 세력가를 따라 이동하는 것은 농경사회보다는 유목사회의 모습에 가깝고 농경 지역 출신인 인물이 여진족 거주지에 가서 금세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까놓고 이성계 집안이 농업이 아닌 유목민들에 가까운 집안 경영을 했다는 증거들은 사료에서 의외로 나오며 다른 농경 지역의 지도자들과 비교해도 매우 이질적인 면들이 많다. 태조실록의 '총서' 편에서는 "목조(이안사)가 석성을 쌓고 소와 말을 놓아 먹였다"고 했으며 '총서'의 또 다른 부분에서는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이춘이 지금의 함흥 근처인 함주로 진출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목축에 편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농경만 해야한다는 법은 없지만 농경 지역에서 유목민처럼 행동하며 세력을 얻은 것은 지리적인 면에서도 특이한 일이고 이성계 집안의 장수들은 주로 여진족 세력가들이었는데, 예로부터 특별한 이유로 엮인 것도 아님에도 농경 출신 지도자인 이성계 집안을 따랐다는 점은 역시 납득하기 힘든 점이다. 세종 19년 8월 7일자(1437년 9월 6일) 세종실록 등을 보면 여진족 이지란은 최소 500호 이상의 여진족 가구를 거느린 세력가이며 주매·금고시첩목아·허난두·최야오내 등을 비롯한 많은 여진족 세력가들이 이성계 집안을 따르고 있었는데 이성계 집안을 유목민들과 관련이 없는 농경민 세력가로 가정하면 정말 괴이하고 뜬금없게도 상당한 여진족 세력을 얻은 것이다. ㄴ지금이야 거의 전국토가 개간되어서 농사 하면 그냥 원래 있는 논밭에 씨 뿌리고 일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지만 과거의 농사는 근세까지도 나대지나 삼림, 늪지에 대한 대대적인 개척과 개간작업이 요구되었다. 전주 인근 호남평야의 개척이 산기슭에서 평원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 고려시대의 일이며, 특히 호남평야는 면적에 비해 하천의 유량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저수지 축조 등의 토목관개사업이 수반되어야 했다. (괜히 강가나 산지가 먼저 개간되는 게 아니다. 산 근처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농사지을 수 있지만, 평지는 그런거 없다.)그렇기 때문에 이런 대대적인 개척사업을 진두지휘할 지방 유력호족의 지위가 이후 시기에 비해 훨씬 강력했던 것이며, 다량의 노동력과 그 노동력을 통솔하는 유력자가 없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개개인의 황무지 개간이라는 매우 고된 작업을 의미했다. 교과서에서 왜 선사시대 쌀농사 연대를 중요하게 다루는가? 바로 초기 쌀농사가 대량의 노동력을 요구하며 이런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체제, 정치체제의 등장 시기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지의 개간률과 이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이 높아지면서 향리의 권력이 축소된 조선시대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이 호족들은 사병을 통해 치안까지 제공했고, 지도자가 도망친 상황에서 이안사와 싸우던 안렴사나 별장이 남은 이들에게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 지역민들도 그와 함께 이동할 동인은 충분했다. 이에 반해 유목민은 끊임없이 물과 풀을 찾아서 돌아다녀야 하니 오히려 흩어지는 경향을 보이며 여기에서 바로 장자들을 빨리 독립시켜 내보내고자 말자상속이라는 특유의 상속시스템이 나온 것이다. 이들은 거주를 집단으로 할 지언정 생업 목적의 이동을 대집단으로 하지는 않는다(물과 풀이 빨리 고갈되니까). 지도자를 따라 집단으로 이주하는 것이 모두 유목민이라면, 후한 말에 유비를 따라 피난간 형주인 10만은 사실 남중국에 살던 흉노족들이었단 말인가? 게다가 동만주의 여진족들은 반농반목민들이지 유목민이 아니다. 총서 원 내용도 斡東東南三十餘里, 有海島曰者考羅, 北連於陸。 穆祖築石城, 以放牛馬。 알동의 동남쪽 30여리에 자고라라는 해도(섬)가 있는데 북쪽으로 육지에 닿았다. 목조가 석성을 쌓아 우마를 놓아 먹였다. 으로 즉 알동 본토에서 목축을 한 것도 아니고 따로 떨어진 섬을 목장으로 삼은 것이며, 이것은 고려시대부터 유구한 전통이었다. 만약 이안사가 정말 반농반목의 여진족이라면 바닷가 섬에 뚝 떨어진 목장을 만들 게 아니라 자신들의 생활터전 가까이에서 말을 기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않겠는가? 동아시아 농업의 알파요 오메가인 소야 말 할 것도 없고, 말은 농경민족에게도 이동수단 혹은 군사자원으로서 매우 중요했다. 전술했듯이 13세기의 유력자들은 사병을 보유하여 집단의 안전을 도모했는데 전근대에 말은 군사력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가축이었다. 도조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천호직이라는 게 중앙집권국가의 지방관처럼 안정된 영역을 가진 지위가 아니라 다른 천호 및 부족들과의 치열한 투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꽤 고달픈 신세라 충분한 기병이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당시 함흥 이북의 동북면은 미개척된 산림지대로 맹수가 우글거리는데다가 기후 문제로 토지의 생산성이 낮아 농업과 수렵을 병행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고, 같은 환경에 속한 여진족들과 생활양식이 겹치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또한 이후 도조가 알동에서 쫓겨나 재기할 때는 등주(안변) 호장 최기열에게 장가를 들어 영업전을 경작하면서 알동에서 남하하여 합류한 주민들을 모아 함주로 북상한 것인데 이것만 봐도 농업보다 목축이 위주였다는 주장은 별 근거가 없다. 지역 호족 쯤 되는 사람이 (고려인 입장에서는)농사도 지을 줄 모르는 여진족놈에게 딸을 후처로 주어 경작을 맡긴다니, 집안 말아먹을 일 있는가? 마지막으로 여진족 세력에 관해서는 여진족 데리고 다닌다고 다 여진족이라는 논리대로면 고려시대의 유금필도 여진족들에게 대추장으로 추대되었고 이징옥은 여진족과 함께 난을 일으키려 시도했으니 여진족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야인들은 통일된 정치체제를 이룩한 역사와 경험이 일천한 탓에 일신의 무력에 경도되어 굴복하는 경향이 컸을 뿐이며, 이성계 개인의 무력은 충분히 여진 부족장들을 압도할 수준이었다. 어차피 사료상으로도 여진족들이 전주 이씨 일가를 동류로 여기지 않았고 심지어는 다구리까지 놓은데다가 그렇게 도망간 이춘을 알동 사람들이 따라 내려왔다는 대목으로 간단히 반박된다. 정작 그 여진족들 중에 이성계를 따라 개경 가서 정착한 것은 이지란 하나였다. 사실 5000호 천 회장(千戶長)과 다루가치의 지위를 원나라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았는데 농경민족이면 당시에 이런 고위직을 이민 왔다고 존나 뜬금없이 받은 거다. 농경민족 출신으로 받은 새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성계 집안은 군공 등이 없었다는 점에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ㄴ다스리는 영지와 영민이 많은 세력가이자 실력자라서 그 영민들을 관리하라고 천호장 지위를 받는건데 농경이고 유목이고가 무슨 상관인가? 게다가 이 역시 사료의 서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는데, 이안사는 삼척 시절부터 무리를 이끌고 왜구와 몽골의 침략을 막은 공적으로 고려 조정에서도 의주병마사 직함을 내릴 정도로 의주(원산)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해 원에게서 줄기찬 러브콜을 받아 귀부하여 천호장과 다루가치직을 받은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덜컥 항복하고 천호장이 된 것이 아니다. 한양 조씨 집안은 아예 귀부하고 쌍성총관 자리를 먹었는데, 이런 논리면 한양 조씨도 여진족 집안이란 말인가? 어차피 정복자인 몽골의 입장에서는 고려인이건 여진족이건 한인이건 색목인이건 간에 자기들보다 아래인 것은 매한가지이며 그저 각자의 능력과 세력이 더 중요한 고려요소였을 뿐이다. 반면 터줏대감인 여진족들은 이 굴러온 뜨내기에 대해 분명히 보복을 가해 내쫓기까지 했다. 대충 의혹들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기록에서 의혹이 심함.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은 「태조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의 성은 이씨이고 휘는 단이며, 자는 군평이고 옛 이름은 성계이며 호는 송헌이다. 전주의 대성이다(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姓李氏、諱旦、字君晋、古諱成桂、號松軒、全州大姓也)라고 되어 있어 본관이 전주 이씨인 것, 신라의 사공 이한을 시조로 하여 이하 21대를 거쳐 이성계에 이른다고 하나, 제16대까지는 거의 이름만이 알려져 있고, 제17대(이성계의 4대조)부터 전기가 있는데 왕실에서 전주 이씨 중 불분명한 인간들은 유독 희한하게도 선조로서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음.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권1, 9페이지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는데 (初三海陽(今吉州)達魯花赤金方卦、娶度祖女、生三善三介、於太祖、為外兄弟也。生長女真、膂力過人、善騎射、聚悪少、横行北邊、畏太祖、不敢肆) '처음에 삼해양(함경도의 길주) 다루가치 김방괘(여진족이라고 여겨진다)가 도조(몽골명 부얀테무르, 3페이지 하, 이자춘의 아버지)의 딸에게 장가들어 삼선삼개를 낳으니, 태조에게 외종형제(성이 다른 형제)가 되었다. 그는 여진 땅에서 나서 자랐는데(여진의 족장이 되었다) 팔의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불량한 젊은이를 모아서 북쪽 변방에 꺼리낌없이 돌아다녔으나, 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멋대로 하지 못하였다.'라는 내용으로 이에 의하면, 태조도 여진족일 가능성이 높음. 왜냐하면, 유목민과 수렵민은 족외혼제를 취해, 성이 다른 집단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이 관습임. 여진족의 족장인 삼선삼개가 태조 이성계의 외종형제라면, 태조 자신도 여진족일 가능성이 상당함. 2. 이씨 일족은 여진족 부하를 다수 두어 이씨 일쪽이 두각을 나타낸 데에서는 그들의 도움이 컸으며, 출신지인 함경도는 당시에도 여진족의 근거지 중 하나이거나 최소한 그들이 활동하던 영역임. 3. 다루가치 직은 고위직으로 몽골인들이 다수, 다른 민족들도 공을 세우면 임명되는 일이 있었지만 뜬금없이 등장해 별 관련도 없는 고려인이 임명되는 것은 심히 부자연스러움. 천호로서 여진족을 통치한 것도 수상함. 은근 당시 그 지역의 나름 유목민 유력자들 중에 이씨 일족의 친구들이나 부하들이 있었음. 반면에 고려인들은 음..? 고려에 살았을 때도 나름 유력 가문이라고는 하는데... 유독 고려인들은... 4. 선조가 원 왕조의 신하로 원의 개원로 출신인 것은 확인되고 몽골어로 쓰여진 가계도에서, 이씨 일족의 여진 이름은 완전히 기재되어 있으나 조선식 이름은 불완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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