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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무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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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 == 칸에이17년(1640년) 2월 겨울. 무사시는 히고의 호소카와 다다토시에게 초빙되어 객원 자격으로 구마모토로 향했다. 호소카와는 위에도 한 번 나왔다. 고지로와 무사시의 싸움을 주선해준 호소카와 다다오키. 그의 아들이 호소카와 다다토시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칸에이 9년 이 호소카와 다다토시를 고쿠라에서 히고로 발령했는데 여기엔 꽤 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원래 히고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영지였고 구마모토성은 기요마사가 7년동안이나 공들여 쌓은 성이었다. 기요마사가 죽은 후 막부는 갖은 트집을 잡아 땅을 몰수했고 위협적인 존재였던 다이묘(大名)중 우두머리였던 가토 집안을 박살낸 다음 꽤 믿을만한 다다토시를 여기로 보냈다. 그리고 무사시가 명군으로 이름 높던 다다토시 밑에 기꺼이 있었음은 그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인용문|1. 나는 여태껏 벼슬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나이도 많고 병도 있어서 유메노 키보노 젠젠이지만 출정하실 때 나도 같이 가면서 쓸 수 있는 갑옷과 타고 갈 말이라도 한 필 있을 신분이면 좋습니다. 제겐 처자도 없고 몸은 늙었으니 집이나 가재도구도 필요 없습니다. 2. 젊었을 때부터 전쟁에 여섯 번 참가했습니다. 그중 네 번은 나를 앞서 나가는 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 때문에 좋은 대우를 받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3. 무구 제조법에 관해선 여러 가지 싸움터에서 쓰일 것을 만드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4. 때에 따라 나라를 다스림과 같이 하셔도 옳은 줄로 압니다. 이상은 젊어서부터 마음에 두고 수련해온 터여서 물으신다면 답신할 수 있습니다. 칸에이 17년 2월 미아모토 무사시}} 이 편지에서 그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그 후 다다토시와 무사시는 아주 친하게 지냈다. 이듬해 2월 다다토시의 분부로 무사시는 병법 35개조를 써서 이를 바쳤다. 오륜서보다 먼저 니텐이치류를 요약한 것이다. 그런데 이걸 받고 한 달 정도 지났을까? 다다토시가 픽 죽어버리고 말았다. 주군의 뒤를 따라 19명이나 순사(殉死)하는 지금 기준으로는 아주 미친 사건도 터졌다. 하지만 무사시는 이때 죽진 않았다. 하지만 나이를 있는대로 먹고 얻은 친구를 잃은 무사시는 심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제자들에게 병법(말만 병법이지 사실상 개인수양이다)을 가르치는 것 외엔 세상을 등지고 그림, 조각, 다도등에 전념하며 인격 수양에 매진했다. 한 2년쯤 또 지났을까. 무사시의 병세가 악화되는 듯 했다. 그때부터 무사시는 구마모토 교외 서쪽 3리쯤에 있는 긴포 산(金峰山) 서쪽의 운간사(雲巖寺) 동굴에서 좌선수행을 시작했다. 칸에이 20년부턴 예불을 드리기 시작하면서 오륜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근데 상식적으로 한겨울에 동굴속에서 건강도 나쁜 노인이 혼자 살면 당연히 몸이 안좋아지지. 결국 쇼호 2년(1645년)봄에는 손발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1645년 5월 19일 마침내 무사시는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시체는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채로 장례를 치렀다. 무덤은 구마모토 구 시가지에서 동북쪽으로 6킬로미터쯤 오오쓰(大津)가도에 삼나무 노목에 둘러쌓여 울타리가 쳐져 있다. 일본여행 갈 거면 한 번쯤 둘러봐도 좋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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