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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정과 결말 == 이들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당시 흙수저들도 수백 명 끌어들였고 일단 거사가 끝난 후에는 왕명을 통해 관군 2천 명을 통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ㄴ 이게 뭔 망상인지는 모르겠는데 흙수저 수백 명은 개뿔, 정작 흙수저들은 자기들이 그렇게도 원하는 토지 제도의 개혁이 급진파의 개혁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급진개혁파에 대한 지지가 낮았고 당연히 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다. 흙수저가 아니라 개성 유수였던 박영효가 자기 사병 50명 이끌고 온 게 전부다. 당시 청나라는 3천 명의 군사가 [[조선]]에 주둔해 있었는데 때마침 프랑스가 베트남을 두고 청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라서 청나라는 급히 조선에 있던 3천 군사 중에서 절반 정도를 떼어 베트남으로 보낸다. 이걸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급진개화파는 우정총사 개업식 날 쳐들어간다. 원래는 폭탄을 미리 세팅하고 터트리려고 했는데 폭탄이 불발나면서 그냥 쳐들어간다. 그리고 궁궐에 침입하여 [[고종]]과 [[민비]]에게 "아따 지금 반란군의 사주를 받은 청군이 쳐들어오고 있으니까 빨리 공사관에 있는 일본군을 부르쇼잉!"라고 빼애애액거리는데 고종이 "뭔 개소리야?"라고 거절하자 자기([[김옥균]])가 옥새도 안 찍힌 종이에 '일사래위'(일본군 빨리 오랑께!)를 쓰고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으따 이건 주상의 명이니 빨리 오쇼잉~"라고 해서 일본군의 궁궐 진입을 허용한다. 이완용 싸다구 후려칠 친일 행각이다. kia~ 이후 방어가 용이한 작은 궁궐로 이동시킨 뒤 당시 군사 지휘관급 인물들을 죽여버린다. 이때 고종이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하지 말라고 안 하게? 고종 보는 앞에서 죽여버렸지 뭐 ㅋ 이때 고종 [[병신]]은 그걸 보고 '어 시발 이건 좀 아닌데?' 라고 생각했는지 이후 철저하게 이들의 뒤통수를 친다. 아무튼 그렇게 궁궐을 장악했는데 민비년이 빼애액거리면서 자기들을 다시 창덕궁으로 옮겨 달라고 징징거린다. 결국 고종과 민비년을 창덕궁으로 옮겼는데 문제는 이 궁이 너무 커서 방어하기에 영 좋지 않았다. 하지만 방어고 자시고 훨씬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아직 청나라 군대 3000명이 온전히 조선 땅에 멀쩡히 있었던 것이다.''' ㄴ 청나라 자동개입이니까 그거 견제는 솔직히 왜군말고 답없음. 정확히 말하면 청프전쟁 때문에 빼려고 했던 건 맞는데, 얘네들이 나가려고 항구에 집결해 있는 동안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병신 빡대가리 새끼들... 어떻게 쿠데타 모의를 하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청나라 군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지도 않은 거지? 당연히 정변 소식을 들은 청나라 군대는 곧장 유턴해서 한성으로 진격한다. 이때 급진개화파들은 정작 작전대로 군사들을 통제하지도 못했고, 도와주러 왔다는 일본군 150명은 싸우지도 않고 그냥 도망간다. 그야 당연히 도망가지. 상식적으로 150명이 3000명을 어떻게 이기냐? 결국 이들은 청나라 군대 앞에 철저하게 무너졌고 이들의 쿠데타는 46시간 만에 막을 내린다. 이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하지만 고종의 암살 명령으로 동행하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가 김옥균을 쏴 죽이고 시체를 조선으로 가져온 뒤 능지처참하고 목을 잘라서 길거리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이 갑신정변에 참가한 이들의 유가족들은 전부 자살한다. 그리고 강화도 조약을 맺고 8년이 지나서 이제 막 개화 좀 시작해보려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ref>[[후쿠자와 유키치]]는 아무 상관없는 가족들까지 죽인 것에 대한 충격 + 급진개화파를 통한 친일정권 옹립 실패에 대한 분노 때문에 조선을 '요마악귀의 지옥국(地獄國)'으로 평하게 되었다. </ref> 이것이 이 새끼들이 까여야 하는 핵심적인 이유다. 이 새끼들이 이딴 어설픈 짓거리를 저지르는 바람에 한동안 반도에서 개혁의 '개'자도 꺼내지 못 하는 시류가 만들어졌다. 특히 메이지 유신을 본받자는 소리는 이 사태 전까지만 해도 종종 나오던 의견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로 역적 모의와 동급의 소리가 되어서 아무도 메이지 유신의 'ㅁ' 자도 꺼내지 못 하게 된다. 사실상 개혁을 막아버린 놈들인 것이다. 이때 이 새끼들이 이렇게 섣부른 짓거리만 안 했어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내정 간섭으로 갑오개혁을 좌지우지하는 꼴을 보기 전에 제대로 된 개혁 하나는 해낼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갑신정변의 결과로 청나라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톈진조약이 체결된다. 10년 뒤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된 그 조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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