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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계속 씨부린다== 특이점은 조선의 왕중 유일하게 고려 과거시험에 합격한 인물이라는 점. 태종 다음 4대 왕인 세종대왕님이 조선이 건국한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태종 이후로는 고려 과거시험에 아무리 존나 똑똑해도 붙을 수가 없었다. 마누라인 원경왕후 민씨도 범상치 않은 인물. 2차 왕자의 난때 망설이던 이방원에게 거의 떠밀다시피 갑옷을 입혀 일을 치르게 하고 이방원의 처남들을 전부 불러다 모아놓고서는 이방원이 다치면 너희들 목을 다 칠거다 라며 경고하는 등 측면에서 이방원이 왕이 될 수 있도록 기여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 때 형제간에도 권력을 놓고 벌어진 피의 전쟁에서 외척일가가 자기처럼 보통 지독한 내기가 아니라는 점을 느낀 칼방원은 이후 [[통수|외척의 대두를 우려하여 낌새가 보이는 놈들은 죄다 끔살한다.]] 이거 완전 [[스탈린]]식 숙청의 원조임ㅋ 피도 눈물도 없고 전쟁영웅 같은 공신 목날린것도 비슷하기도 하다. 역시 피는 못속인다고 아들, 손자가 먼치킨인데는 다 이유가 있는거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인 의문도 해결할 겸 역대 왕들 묘를 파서 유골 유전자검사를 통해 역사적인 논란인 누가 적통이고 누가 마눌년이 바람펴서 낳은 놈인지를 가려봐야된다. 특히 인조계열 막장 4부자랑 영조는 의심이 되는 부분이고. 유럽 영프독 등 서구권에선 이미 역사적 사료 확보를 위해 왕실 묘지 다 뜯어서 실시한 유전자검사라 선례도 충분하고 남아돌게 있다. 아버지 세력이나 정도전 혹은 다른 왕자세력등과 전쟁을 벌이며 싸웠지만 이방원이 집권한 이후에도 이성계의 [[왕씨 대학살]] 정책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다 1413 년에 태종 이방원에 의해 중단되었다. 왕씨 후손을 죽이라는 대신들한테 한 말이 시대를 앞서간 명언이다. "혁명(革命)한 뒤에도 오히려 전대의 후예(後裔)가 살아 있을까봐 두려워하여 모조리 죽여서 유종(遺種)을 없애는 것은, 용렬한 군주(君主)가 하는 짓이다.<br>내가 어찌 차마 하겠는가?<br>경 등은 나의 아름다운 뜻을 따르려 하지 않고 어찌 이처럼 번거롭게 구는가?<br>왕씨(王氏)의 유종(遺種)은 죄가 없는데 죽이는 것은 내 마음으로는 불가하다고 생각한다.<br>이제 이미 결정되었으니 다시 진언(進言)하지 말라" 거기다 왕씨 몰살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 식으로 의견 충돌을 무마했는데 사실상 지 아빠 보고 학살자 개새끼라고 할수는 없으니 돌려 깐거다. ㄴ여기서 이새끼의 대가리가 얼마나 잘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 이놈도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왕조에서 관직 생활한 [[신진사대부]]의 일원. 그 중 급진파 중 한명으로서 이성계로의 왕조교체와 [[왕씨 대학살]]의 한복판에 있던 인물이다. 끌려다닌 입장이 아니라 자기도 왕 되고싶어서 주도한 입장이라는 것. 그런데 자기가 왕 되고 다 잡아죽이고 어느정도 상황 정리 되니깐 슬그머니 발 빼면서 딴 사람들한테 뒤집어 씌우는 크라스 그리고 이 시기 쯤 되면 우리가 알고있듯(왕과 가까운 왕족도 아니고 특정 성씨를 가진 사람을 전국에서 다 잡아죽여서 멸종시키겠다는 이성계 이방원 부자의 발상이 [[히틀러]]의 [[유태인]] 말살정책이 생각날 정도로 막장스럽기는 한데)이미 왕씨를 싸그리 잡아죽여서 더 잡아죽일 뭐도 사실 별로 없었다. 실리적으로 보면 사람 죽일만큼 넘쳐흐르게 다 죽였고, 인종청소작업 끝낸 다음 적절한 시기에 적절히 폼내면서 입한번 털고 관둔 것. 왕자의난이나 아버지랑 왕좌를 두고 싸우고 나서 자기가 생각해도 쪽팔렸는지 실록에 적당히 돌려서 쓰고 최대한 숨길만큼 숨겼던 부분과 비슷하게 생각하시라. 철혈군주로서의 냉정한 모습과는 달리 정작 자기 아들들에겐 한없이 무른 모습을 보여줬다. 진성 또라이였던 양녕대군의 망나니짓을 수없이 눈감아주었고 양녕을 폐세자한후에는 목이 매일 정도로 서럽게 울었다는 모양. 그 이후에도 양녕이 숙청당할까봐 걱정하며 양녕을 보호하려 애썻다. 늦은 나이에 낳은 막둥이인 성녕대군이 결혼한 이후에도 계속 곁에 두려고했고 성녕대군이 병으로 죽었을 때엔 매우 슬퍼하며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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