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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길 수 있는 전투였는가 == 우선 당시 신립이 보유하던 군대는 아무리 최대치로 잡아도 8천 명이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론된다. 심지어 선조가 자기 호위병들까지 다 빼서 내어준 병력 숫자가 고작 이 지경이다. ㄴ 근데 선조가 빼준 병력은 갑사로 궁기병에 정예 병력이었다. 그리고 진주대첩이나 행주대첩은 일본군의 1/10으로 정예병은커녕 백성으로 막은 전투고 2차 진주대첩은 거진 10만 가까이 되는 병력을 끌고 왔어도 일본군의 피해 또한 만만찮았다. 그리고 1차대전 때까지 왜 참호전이 이어진 건지 아냐? 애초에 그런 싸움은 요새 끼고 싸우는 놈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괜히 공성전 하려면 적어도 3배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나온 게 아니다. 정상적으로라면 이 대여섯 배 정도가 소집되어야 하는데, 전부 문서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회사 사원들이었다. 그만큼 조선의 관리 체계가 완전히 망가져버린 상황이었다. ㄴ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군사는 아니였다. 조선군은 교대제라 평시에는 자기 순서가 아닌 군사들은 자기 집에 가서 생업에 종사하고 전시가 되면 한 번에 다 소집되는 구조였다. 문제는 일본군이 너무 빨리 북상하다보니 집에 돌아가있던 병사들이 소집되지 못했다는 점.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중앙군은 류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기정병 23700+보정병 16200+갑사 4640+정로위 2161+별시위 1119로 약 4만8천 정도였는데 기정병과 보정병은 8교대고 갑사, 정로위, 별시위는 4교대제라 실제 근무 중인 군사는 7천 수준이였다. 신립은 실제 근무 중이였던 군사를 다 끌고 간 셈이였다. 사실 이런 조선군의 구조와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신립은 쉴드 불가다. 신립의 임무는 그냥 조령을 방어하며 나머지 중앙군 4만여명과 지방군들이 소집될 시간을 버는 거였지 일본 선봉군이랑 결전을 벌이는게 아니였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선발대 5천 명에 후발 1만여 명에 합쳐서 신립군과 두 배 가량의 차이가 난다. 군사의 질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차이다. 신립이 문경새재에 도달하기 직전 고니시의 군사는 기민하게 움직여서 이미 새재와 유기적으로 붙어있는 주변 성채까지 점거하며 턱밑까지 도달한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농민 징집군과 다름없는 병력의 질로 신립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지경이다. 조령에서의 전투는 매복전의 양상으로 전개해야 하는데, 무전기도 야투경도 아무것도 없는 그 미개한 시대에서 야간 매복전이란 어지간히 전쟁터에서 굴러봐야 할 수 있는 고난도 전법이다. ㄴ 현재 지도를 봐도 새재 외에는 돌아갈 곳도 마땅치 않은 지형이다. 괜히 새도 못 넘는다는 의미로 조령이라는 말이 붙었던 게 아니다. 아마 추측건대 거의 할 수 있는 게 없는 신립은 반쯤 멘탈 붕괴해서 그냥 자기가 자신 있는 전술(기병개돌)에 모든 걸 걸고 자폭한 것이 아닐까 싶다. ㄴ 신립의 전적을 보면 사실상 지휘관이기보단 돌격 대장에 가깝다. 그저 할 줄 아는 게 돌격밖에 없는 장수의 한계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그리고 상황은 추풍령과 죽령에 배치된 조선군이 더 열악했는데 죽령을 지키던 방어사 유극량은 가토의 2군을 저지해 결국 가토가 죽령 통과를 포기하고 조령으로 향하게 만들었으며 추풍령을 지키던 방어사 조량은 조령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당수의 부대가 한양을 구원하기 위해 이동하는 바람에 구로다의 3군에게 결국 돌파당하긴 했지만 소수의 병력으로 시간을 버는데는 성공했다. 애초에 조령이 뚫리지 않았다면 추풍령 방어선도 뚫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냥 신립이 무능했던거다. 결정적으로, 이일 씹새끼를 살려둔 게 패배의 큰 축 중 하나다. 이일을 참수했더라면 장수고 나발이고 군무 이탈은 하면 안됨을 증명해서 군 기강이 바로 잡혔을 건데 신립은 이일과의 개인 친분 때문에 살려주는, 실수를 뛰어넘는 커다란 죄악을 저질렀고 그것 때문에 병사들 사이에서는 군기가 크게 빠져버렸다. 신립은 이일을 참수하지 않은 탓에 사기가 확 떨어진 부하들 때문에 탄금대까지 나가야만 했다. 신립도 조령에서 싸우는 게 더 편할 거라는 걸 몰랐던 게 아니다. 이럼에도 멍청함이 극에 달하는 병신 똘추 이일 새끼는 자기 때문에 탄금대로 내려가는 건 줄도 모르고 탄금대로 가지 말고 한강까지 물러서 싸우자는 개소리를 싼다. 이일 이 씨발새끼는 신립에게 "적은 신병이라서 무조건 강하니까 일단 튑시다."라는 개소리를 했고 안 그래도 정발, 윤흥신, 송상현에 이일까지 왜군에게 털린 소식을 접한 병력들이라서 절대로 못 이긴다는 그 소리에 심한 중압감과 공포를 느껴서 사기는 아주 푹 떨어졌다. 이순신이 "도망치면 살 거 같냐? 오히려 다 뒤진다!"라고 외치며 병력들의 사기를 계속 올리려고 노력한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발언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말해야 하는데 이일 이 새끼는 절대 못 이기니까 도망치자는 개소리를 한다. 이게 장수라는 작자의 주둥이에서 나올 소리인가? 이 새끼는 생각하면 할수록 한 대 패주고 싶다. [[녹둔도]] 시절 이순신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운 것부터 시작해서. 뭐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 당시 전황이 신립이나 조선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갔고, 그 상황에서 신립 장군의 선택 범위가 매우 협소하긴 했으나, 지방의 근왕군이 상경하기 전까지 버티지도 못하고 단기간에 대군을 완파 당했기 때문에 재평가는 앞으로도 힘들 듯하다. 다만 그 수만 명의 근왕군이 나중에 와키자카의 1500명에게 작살 난 걸 보면... 결정적으로 비가 와서 졌다. 신립은 기병이 주특기였고 그때도 기병을 이끌고 있었다. 문제는 비가 오면 땅이 질어져서 말 발굽이 흙두렁에 한 번이라도 빠지면 답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탄금대에서는 비가 왔다. 전투는 못해도 도망은 잘 쳤던 이일은 비가 오는 거 보고 신립의 기병대가 절대로 못 이긴다는 걸 간파하고 도망쳤다. 실제로도 기병은 치고 튀는 전술에 특화된 병과인데 그래서 졸라 빨리 이동해야 효과를 보는 병과인데도 땅이 질어서 신립의 기병대는 제대로 된 기동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ㄴ 애초에 논두렁에 기병으로 배수진을 치는 빡대가리 장수가 어디있냐 이일탓이라기보단 애초에 본인부터가 질 이유는 다가지고 있었다. 기병이 보병 같은 속도로 닥돌하니까 그게 강할 리가 있나. 신립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다. [[분류: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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