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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로 몽고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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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 아프리카 전역 === 1942년 북아프리카는 롬멜이 휩쓸고 있었다. 이때 롬멜을 막고있던 영국군 중동지역 사령관은 오친렉이란 장군인데 이름 들어본 적 있는가? 없지? 그렇다. 잡장이라 롬멜에게 온 몸의 모든 구멍을 겁탈당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부하들까지 무능해서 휘하부대인 제8군은 사령관을 갈았는데 그 바꾼 사령관도 무능해서 오친렉 본인이 8군까지 지휘하고 있는 참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8월에 처칠이 중동사령부를 방문하는데 오친렉이 얼마나 불쌍해 보였는지 해롤드 알렉산더를 중동지역 사령관으로 윌리엄 고트를 제8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었다. 그런데 고트가 카이로로 돌아가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었다. 처칠은 후임으로 누구를 임명할까 하다가 몽고메리를 제8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었다. 몽고메리는 즉시 10군단을 재편하고 항상 30군단과 함께 싸우라고 명령했는데 10군단은 전부 기갑부대였고 30군단은 전부 보병부대였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편제였다. 독일군이나 어디 다른 군대나 보통 사단이나 군단정도 되면 자체적으로 포병부대, 기갑부대, 보병부대 등등등을 가지고 병력을 조합해서 싸우지 않는가? 그런데 영국군은 포병 따로 보병 따로 전차 따로 딱딱딱 맞춰서 부대를 짜뒀다. 그렇게 해서 보병이 포병이나 기갑에게 절대로 명령할 수 없는 체계를 만들어 뒀는데 예외가 하나 있었다. 몽고메리 본인은 모든 부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몽고메리만이 병력을 조합하고 싸우라고 시킬 수도 있었던 것. 여태껏 영국군은 육해공의 알력다툼이 너무 심했다. 그래서 안 그래도 없는 전투력을 더 깎아먹었는데 몽고메리는 육해공을 전부 자신의 통제 하에 둠으로써 전투력 상승을 노렸다. 그러면서도 자주 병사들을 만나 상담도 해 주고 담배도 나눠주고 하는 식으로 병사들의 마음을 얻는 데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영국군은 몽고메리가 부임한지 일주일만에 독일군에 비벼볼 수 있는 군대가 됐다. ==== 알람 할파 전투 ==== 1942년 8월 31일 롬멜은 알람 할파에 있는 제8군단의 측면을 공격했다. 영국군은 대격전끝에 독일군을 막는데 성공했고 독일군은 돌아갔다. 영국군 상층부에선 빨리 독일군을 추격하여 공격하라고 닦달했지만 몽고메리는 가지 않았다. 아직 영국군의 전투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 듯. 어쨌든 몽고메리는 롬멜과의 첫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 몽고메리는 모든 작전을 치밀하게 세웠다. 20만명 이상의 병력, 1,000대 이상의 전차, 빈틈없는 작전, 롬멜이 자리를 비운다는 완벽한 타이밍까지 모두 갖춰 공격을 개시했다. 1942년 10월 23일 영국군의 야포 사격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하지만 독일군 진지 앞에는 지뢰와 폭탄이 수십만발 박혀 있었고 이 지뢰밭을 포격으로 전부 제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게다가 지뢰밭 뒤엔 대포까지 준비한 독일군이어서 더 그랬다. 10월 25일까지 병사가 6,000명, 전차가 100대 이상 파괴됐다. 이미 주공을 갈아야 할 수준의 피해였지만 몽고메리는 공격을 강행했다. 11월 2일 영국군의 제9 기계화여단이 방어선을 뚫다가 부대가 전부 갈렸다. 몽고메리는 전차 100여대를 더 꼴아박았고 롬멜은 2개 기갑사단으로 반격했다. 롬멜은 반격을 서둘렀고 이는 전차 vs 대전차포여야 할 싸움이 전차 vs 전차로 바뀌어버리는 참사가 일어났다. 롬멜은 영국군의 전차를 전부 갈아마시고 방어선의 약점을 찾으려고 계속 들이박았다. 그러나 낄끼빠빠를 실현하지 못 한 댓가로 교전이 끝났을 때 독일군의 전차는 35대 뿐이었다. 몽고메리는 전투의 길이와 사상자가 13,000명이 넘을 것이라는 점까지 정확하게 예측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추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 덕분에 독일군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었고 추격할 타이밍을 놓친 영국군은 오히려 독일군에게 반격까지 허용했다. 이 추격 실패는 두고두고 회자되며 몽고메리의 흑역사 생성에 일조했다. ==== 메데닌 전투 ==== 몽고메리는 이 승리로 2등급 기사 훈장을 받고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3년 3월 초. 몽고메리는 메데닌에 주둔중이었다. 이 때 롬멜이 메데닌에 직접 공격을 가하려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몽고메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기지를 요새화하고 대전차포를 깔아 공격에 대비했다. 3월 6일 롬멜이 공격했고 영국군은 독일군 전차가 사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대기했다가 사격했다. 안 그래도 모자란 독일군 전차는 큰 타격을 입었고 야포 때문에 보병도 진격할 수가 없었다. 오후 5시 30분경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롬멜은 철수했다. ==== 마레트선 ==== 롬멜은 마레트선 뒤에 숨어서 방어에만 집중했다. 당연히 몽고메리는 마레트선을 뚫을 작전을 세웠고. 몽고메리는 3월 20일에 제10군단, 30군단을 정렬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연합군은 방어진지를 집중공격했지만 3월 22일까지도 방어선에 유효타를 가하진 못 했다. 뉴질랜드군단이 엘 함마 방면으로 우회하려 했으나 독일군 제21 기갑사단이 증원되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해안가 방어선에 타격을 입히지 못 한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몽고메리는 뉴질랜드군단이 진격하던 방향을 뚫는다는 작전을 입안했다. 3월 26일 제1 기갑사단이 엘 함마에 도착했고 추축군 부대는 와디 아카리트로 후퇴했다. 이후 공격을 위해 1주일간 휴식을 취한 영국군은 4월 5일 저녁에 독일군을 정면공격하여 승기를 잡았다. 제51 사단이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했는데 이때 제10군단 기갑전력이 지원됐다면 완승을 거둘 수 있었겠지만 이동속도가 너무 느려서 그러진 못 했다. 몽고메리는 최대한 빨리 전차를 이동시켜 독일군을 공격했으나 독일군은 이미 싹 빠져나간 뒤였다. 추축군이 와디 아카리트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모든 부대가 마지막 방어선이 있는 엔피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 튀니지 전역 ==== 연합군과 추축군의 전력 차이는 심각했다. 추축군은 사실상 연대, 여단급인 사단 13개와 전차 130대밖에 없었지만 연합군은 완편된 19개 사단과 전차 1.100대를 보유했다. 중동지역 사령관 알렉산더는 메제즈다 계곡을 돌파해 튀니지의 항구들을 점령한다는 작전을 수립했다. 튀니지의 항구를 점령하면 북아프리카에 있는 군대로 이탈리아를 침공할 수 있기 때문. 알렉산더는 4월 22일 패튼의 제1군에게 메제즈 엘 바브와 부 아라디 사이에 있는 추축군 병력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 사이 몽고메리의 제8군은 엔피다 주변에서 추축군을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몽고메리의 정신병이 도졌다. 몽고메리는 이 작전이 미군이 독일군 막타를 낼름 먹게 하는 작전이라고 생각해서 생 지랄을 피웠다. 몽고메리는 제8군 병력으로 적진을 30 km 돌파하는 작전을 세웠다. 알렉산더는 몽고메리의 작전을 써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서 몽고메리의 생각대로 하게 해 줬다. 몽고메리는 기세등등한 영국군의 전투력을 믿고 작전을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느리더라도 제대로 긴장하고 전투에 임하길 바랬다. 안 됐지만 휘하 부대들에게 이런 몽고메리의 바람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영국군의 선봉장 브라이언 호럭스 제10군단 군단장은 부하들에게 적은 고작 연대~여단급 병력이니까 선빵필승이라는 것을 톡톡히 일러뒀다. 하지만 실제 방어전력은 사단 2개 분량이었고 4월 19일 선빵을 갈겼지만 독일군 방어선은 스크래치도 안 났다. 19일 하루종일 공격한 결과 제50 사단이 엔피다를 점령했지만 다른 부대들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 했다. 호럭스는 눈 앞의 독일군과 아군 병력을 1:1로 교환하고 방어선을 부술 수야 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피해가 컸다. 결국 10군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딴딴한 독일군 방어선을 둘러싸고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패배로 몽고메리는 주공을 1군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1군은 4월 30일까지 독일군을 끝없이 밀어붙였다. 그런데 밀어붙이다보니 공세는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고 소규모 부대들의 싸움이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 됐다. 알렉산더는 공세가 중단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8군에서 정예부대를 차출해서 1군을 도우려고 했다. 몽고메리가 개꼰대긴 하지만 상병신은 아닌지라 순순히 사단3개와 여단 하나를 내 주었다. 5월 6일 제7기갑사단의 선봉대가 튀니스를 뚫었고 미군 제2 군단은 비제르테를 점령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추축군 병력들이 항복하기 시작했다. 아르님은 5월 12일 제4 인도사단에 항복했고 다음 날 이탈리아군 총사령관 메세 원수가 항복하면서 북아프리카 전역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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