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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력== ===군사력=== {{진실}} [[파일:기병고구려.jpg]] 고구려 군사력은 고려시대 [[윤관]] 때 싸우던 완안부와 가장 비슷하다. 실제로 기병이 주류이고 약탈에 능하다는 점에서 백제, 신라와 다르고 완안부와 비슷하다. 특히 기병 중에서도 [[개마무사]]라고 카타프락토이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의 (중)기병은 오늘날의 전차 탱크이다. 그래서 백제, 신라가 고구려한테 침략받을 때 느꼈던 심리는 조선이 후금한테 침략받을 때 심리와 비슷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반쯤 멸망당하고 영원한 내시가 되겠다고 빌빌기었고 [[인조]]는 알다시피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3번 찍었다. [[살수대첩]]에서 수나라와 싸울 때도 강력한 기마부대가 있었기 때문에 30만을 수장시킬 수 있었다. 고구려 밑에서 딱갈하던 유목민족들 보면 답 나온다. 말갈, 거란, 실위(몽골) 등 유목 어벤저스 수준이다. 다만 유목 기병과는 달리 중기병과 경기병이 적절한 비중으로 있었으며 유효한 수준의 보병 부대(사실 한반도쪽은 산악지형이라 당연하지만)를 함께 보유하였다. ===수도=== {{진실}} {{수도}} [[파일:평양평야.jpg]] 오늘날 평양평야 수도는 초기엔 졸본이었는데 주몽이 건국 핵심세력인 졸본의 덕망을 얻기위한 임시수도였으며 이후 국내성으로 욺겼으나 기후가 척박하고 농사짓기에 알맞지않아 오늘날의 한반도의 평안도 지역 [[평양]]으로 수도를 욺겼다. 사실 평양 천도를 주도한 사람이 장수왕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장수왕은 평양 천도를 마무리를 한 것이고 평양 천도를 계획하고 시작한 사람은 광개토태왕이었다. 광개토태왕은 일찍이 평양 지역의 잠재력을 눈여겨보고 평양을 크게 중시하였다. 393년에는 9개 절을 평양에 창건하고 399년에는 왕이 직접 평양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409년에는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으며 다시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또한 역대 왕릉의 정비에 힘써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할 것을 장수왕에게 유언하였다. 고구려가 유목과 농경을 겸한 것도 바로 평양 천도 이후일 것으로 추측된다. 평양 주변의 평양평야는 약 1,000km2 한반도 네번째 규모로 대동강이 사이에 흘러 농사짓기에도 알맞은 곳이었다. [[파일:26219 22512 2411.jpg]] 장수왕 시기 지어진 [[안학궁]]은 성벽 둘레가 2,488m에 면적이 380,000m2에 이르러 그 규모가 매우 크고 웅장하다. 마치 당나라 수도 장안의 대명궁같다. [[파일:1541173408422.jpg]] [[조선]] 왕조등이 중국왕조에 대한 모화사상과 눈치사대주의로 왕궁의 크기가 겸소해진 것과 달리 고구려의 정전인 안학궁 중궁은 조공국을 거느린 강국 답게 그 크기가 매우 웅장하다. 경복궁 근정전과 안학궁 중궁을 비교해봐도 중궁이 근정전보다 더 넓고 웅장하다. 근대 이전의 왕국들의 왕궁은 왕이 거처하는 곳으로서 규모에 따라서 그 나라의 국력이나 자주성이 가장 잘 드러난다. 보통 자주성이 강하거나 국력이 강할수록 왕궁의 처마길이가 길고 규모가 크며 반대로 자주성이 약한 국가들의 왕궁은 처마가 좁고 규모가 작다 안학궁은 현재 북한 수도 평양에 고대로 터가 남아있다. 위치는 대한민국 기준으로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학사리이며 [[김정일]] 위원장 집권시절에 [[장성택]]을 시켜서 고구려 건축에 대한 연구도 다 안된 상태에서 테마공원으로 예토전생을 시켰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후에 철거했다. 그래서 원래 터만 남아있던거에 옆에 또다른 황량한 터만 남아서 더 황량해졌다. 평양성의 성문이었던 보통문 칠성문 대동문등은 북한의 국보로서 원본이 보존되어 있다. ===속국=== {{진실}} {{강대국}} {{제국}} {{제국주의}} {{나치}} [[파일:고구려 지도.jpg]] 고구려의 속국은 대부분 광개토태왕~장수왕 시기를 거쳐서 생겼다. 한반도 역사에서 유일하게 다른나라에게 책봉을 행하고 조공을 받던 지역 종주국이었다. 그래서 고구려의 국왕은 광개토태왕때부터 태왕(太王)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광개토태왕릉비,중원고구려비) [[세종]]의 경우는 일개 평범한 왕(王)이었지만 한글 창제등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세들이 대왕이라고 부르는 경우라 고구려와 큰 차이점이 있다. :ㄴ 세종은 조선시대 당대부터 세종대왕이라 불렀는데? 조선왕조실록부터 뒤져보고 와라. 또한 독자연호인 영락(永樂)을 사용하였다. 광개토태왕 임기 1년은 영락 1년이다. 좆본의 헤이세이 1년 명나라 만력 1년 같은거다. 조선은 참고로 명나라 연호썼다. 유목민족들은 대부분 고구려인 휘하에 전쟁에 동원되었고 일부 중,소형국가(북연,신라)등은 속국으로서 왕위를 계승할때도 고구려 의견을 물어야하는등 상당한 내정간섭을 받았다. 학계에서 인정받은 관점에서의 고구려의 조공국 혹은 속국들. 1.[[북연]](北燕, 407년 ~ 436년) [[https://ko.wikipedia.org/wiki/%EB%B6%81%EC%97%B0]] 선비족이 세운 중국 왕조 [[전연]]의 후신이던 [[후연]]의 마지막 황제 모용희가 폭군으로서 민심을 잃자 한족인 풍발이 당시 후연에 귀화했던 고구려인 출신 모용운(고운)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이름만 바꾼 중국 왕조이다. 모용운은 제1대 혜의황제에 오른후 고구려의 광개토태왕과 친화정책을 하면서 점차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다. 모용운의 측근인 이반,도인이 권력에 눈이멀어 모용운을 암살하자 한족인 풍발은 이를 진압하고 본인 스스로 문성황제자리에 올랐다. 풍발의 즉위후 고구려의 상당한 내정간섭이 있었으며 조공은 물론 황제가 바뀌면 제일 먼저 고구려에 보고해야만 했다. 풍발이 죽자 풍홍은 소성황제로 3대 황제가 되었는데 당시 북위가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연은 고구려가 북위를 압박하는 전략적 속국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고구려의 내정간섭은 더 심해저서 풍홍은 435년에 사실상 '''종주국'''(宗主國)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북연이 망하면 고구려로 망명하겠다고 하였으며 실제로 망명하였다. 2.[[말갈]] 연해주와 북만주 유역에 살다가 고구려가 세워지고 고구려 밑으로 편입되었다. 고구려가 전쟁을 일으킬 때 이이제이로 쓰던 졸병들이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백신말갈의 부족장 걸사비우와 속말말갈의 부족장 대중상([[걸걸중상]])과 [[대조영]]등이 고구려를 계승하여 [[발해]]를 건국하였다. 발해는 일본으로 조공보낼 때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으로 사신을 보냈다. 이들 중 흑수말갈은 발해 멸망후 팽창하여 여진족으로 [[금나라]]를 세우고 나중에는 급기야 [[청나라]]를 세우며 중국을 정복한다. 3.[[몽골|실위]] 한국사와의 연관성으로는 고구려 북쪽에 접경하여 철을 고구려에 의지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황두실위의 경우에는 고구려가 도독을 두어 통제하였다.즉 고구려에게 경제적,정치적으로 복속된 속국이었다. (李玟洙, 「高句麗 遺民 李他仁의 族源과 柵城 褥薩 授與 배경에 대한 고찰」『大丘史學』,2017) 후에 실위의 일파인 몽올실위가 카마그 몽골로 이어지고 [[사기캐|징키스칸]]이 태어나 [[몽골제국|전 세계를 정복한다.]] 4.[[거란]] 고구려의 제2중심지였던 요동지역에 살던 부족들로 이들의 부속 부족인 비려족은 [[광개토대왕|킹갓제네럴광개토태왕]]에 의해 정복당하고 조공이나 바치는 속국이 되었다. 말갈족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대외전쟁에 자주 동원되었다. 후에 거란은 [[야율아보기]]를 중심으로 [[발해]]를 멸망시키고 [[요나라]]를 건국하며 중원 패권국이 된다. 5.[[신라]] 신라왕이 백제와 가야+왜의 연합공격을 받자 [[광개토대왕|킹갓제네럴광개토태왕]]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구원을 요청하였다. [[광개토대왕|킹갓제네럴광개토태왕]]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제,가야,왜를 격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하며 고구려는 향후 20년간 신라를 내정간섭하는 속국으로 만들어버린다. 심지어 신라의 제18대 실성 마립간은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있었으며 고구려의 상당한 입김이 들어가 즉위한 왕이다. 신라는 이 시기 왕이 직접 고구려에 와서 조공을 바치는 등 굴욕적인 외교를 보였다. 6.[[백제]] [[광개토대왕|킹갓제네럴광개토태왕]]이 신라 구원을 명분으로 침공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이때 백제 아신왕에게서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병자호란]]이 데쟈뷰되는 항복을 받았다.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았다. 장수왕때도 또 다시 백제를 침략하여 개로왕을 죽이고 수도인 위례성을 함락시켰다. 한마디로 부자가 백제 왕을 하나씩 죽이고 백제의 중심지를 다 없애버렸다. 이때 백제 국민들이 고구려의 침략이 무서워 일본으로 많이 이민갔다. 이를 유즈키노키미(弓月君, ゆづきのきみ)라고 한다. 7.[[동부여]] [[광개토대왕|킹갓제네럴광개토태왕]]이 동부여를 완전 멸망시키기 전까지 고구려의 속국으로 잔존하였다. ===중국 왕조와 전쟁=== 한반도 역사상 중국 왕조와 일대일 맞짱이 가능했던 나라였다. 총 4번의 맞짱이 있었으며 4개 나라 모두 중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거나 강력한 나라로 분류된다. 1.'''[[신나라]]-고구려 전쟁''' 왕망이란 자가 나타나 한나라를 무너트리고 신나라라는 사이비국가를 세웠다. 이때 고구려는 아직 초기라 힘이 약하여 왕망이 오랑캐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보내라고하자 고분고분 군사를 보냈다 그러나 오히려 징발된 고구려군인들이 왕망의 통수를 쳐서 현도군을 습격해버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왕망은 이를 명분삼아 고구려를 쳤다. 결국 왕망은 고구려군에게 승리하여 승리에 심취한 나머지 고구려왕을 깎아 하구려후라고 비하하였다. 2차전쟁때는 태조 [[주몽]] 동명성왕의 개국공신 오이,마리가 2만의 군사로 신나라의 현도군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몰아내었다 [[파일:위나라-고구려.jpg]] 2.'''[[위나라]]-고구려 전쟁'''(曹魏与高句丽的战争) 고구려 동천왕때 일로 우리가 아는 [[조조]] 맹덕의 [[위나라]]와 요동반도를 놓고 전쟁을 붙었다. [[공손찬]]의 후손 공손연이 죽자 요동반도가 비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위나라]]는 [[사마의]]를 요동정벌의 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선비족을 동원하였다. {{인용문|十六年 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 16년(242) 왕께서 장수를 보내시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 16년(242)}} 강심장 고구려답게 먼저 선빵을 때려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이에 조조는 유주 자사였던 [[관구검]]을 고구려에 보냈다. {{인용문|正始中,儉以高句驪數侵叛,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從諸道討之. 정시 중 관구검이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지휘해 현도(玄菟)를 나가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정사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당시 고구려 왕 동천왕은 전쟁 초기 관구검에게 대승을 거두며 승리에 도취해 방심하다 전사자 1만 8천명을 내고 대패해버렸다. 관구검은 쭉쭉밀고 들어가 환도성까지 털어버리는 등 의기양양하였다. 246년에 고구려는 겨우 전열을 재정비하여 위나라 추격부대를 털어버리고 마침내 방어에 성공하였다. 이 전쟁이 일어난지 불과 3년후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위나라]]를 먹어버렸다. [[파일:살수대첩.jpg]] 3.'''[[고구려-수 전쟁|수나라-고구려 전쟁]]'''(隋与高句丽的战争) '''한국사 역사상 최대규모의 전쟁'''이면서 '''전근대 동아시아사 역사상 최대규모의 전쟁'''이다. 위의 신나라,위나라 전쟁은 고구려가 지고 이기고 엎치락 뒤치락이었으나 이 전쟁은 말그대로 고구려의 완벽한 승리였다. [[수문제]]는 분열되었던 중국을 수습하고 통일하여 역사상 유래가 없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문제 당시 수나라는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으며 백성들의 삶 만족도 또한 매우 높았다. 고구려의 평원왕은 [[선조|누]][[인조|구]]와 다르게 수나라가 건국되자마자 첩보할동을하여 동태를 살피고 예의주시하였다. 또한 간첩들을 보내서 수나라의 무기기술을 훔쳐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전쟁준비를 철저히 하던 평원왕은 죽고 영양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수문제는 영양왕이 줄곧 자신들에 대한 조공과 책봉을 거부하는 듯한 늬앙스를 보이자 수륙군 30만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정작 선빵을 때린 것은 역시나 고구려였다. 영양왕은 속국인 거란과 말갈의 군사들을 모아 수나라의 요서지역 조양을 공격하였다. 이에 화난 수문제가 마침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1차 고구려-수 전쟁이었다. 그러나 장마와 태풍등 요동 지역의 척박한 자연지리로 수나라의 군대는 전쟁을 하기도 전에 궤멸위기에 빠져 다행히 전면전 없이 전쟁은 종료되었다. 또한 영양왕은 30만대군이 직접 정벌을 오자 갑자기 쫄았는지 수양제에게 수나라의 요동지역 신하임을 인정한다며 수문제 똥꼬를 빨았다. 수문제는 이에 전쟁 의욕을 잃어버리고 군사를 물렀다. 수문제가 죽자 아들 [[수양제]]가 수나라의 황제로 즉위했다. 수양제는 만리장성을 영장하고 운하를 만들고 토욕혼,돌궐,베트남등 변방 국경지대의 세력을 정벌하고 속국으로 삼아 안정시켰다. 이렇게 수나라가 당대 초강대국으로서 위세를 떨치자 고구려 영양왕은 바짝 쫄았다고 한다. 수양제는 지속적으로 고구려에 탁군(요서)로 가겠다고 통첩을 날렸는데 이는 조만간 고구려를 조지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용문|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號二百萬,其餽運者倍之 (총 병력은) 113만 3800명이고, 200만이라 (과장해) 불렀으며, 식량 운반자는 그 배였다. -《수서》 권4, 제기, 제4, 양제하편}} 마침내 양제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초대군을 고구려 옆 요서 탁군에 총집합시켰다. 수 양제는 총 24군으로 나뉘어 진격하게 했으며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평양이었다. {{인용|좌 12군: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玄菟), 부여(扶餘),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 {{인용|우 12군: 점선(黏蟬)수군, 함자(含資)수군, 혼미(渾彌)수군, 임둔(臨屯)수군,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踏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이(東暆), 대방(蔕方), 양평(襄平)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 이렇게 많은 군사를 데리고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결국 고구려 어느 [[을지문덕|사기캐]]의 30만명을 즉석으로 강물에 수장시키는 [[살수대첩|대활약]]과 고구려의 막강한 공성 방어능력과 야전투력으로 수나라는 국가의 근본이 흔들릴만한 손실을 입고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후에 수나라는 얼마안가 고구려전쟁의 휴유증과 내분으로 멸망해버렸다. [[파일:고구려-당.png]] 4.'''[[당나라]]-고구려 전쟁'''(唐与高句丽的战争) 영양왕이 죽은 뒤 고구려는 찐따끼가 있는 영류왕이 들어섰다. 영류왕은 영양왕때까지 거의 하지않던 중국왕조에 대한 조공과 사대등을 다시 부활시켜 [[조선|어떤 나라]]마냥 전쟁을 피하고 비굴하게 평화를 가져오고자 하였다. 이에 이를 못마땅하던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평화파를 모두 적폐로 몰고 숙청시켜버렸다. 그 결과 연개소문은 수나라에 이어 들어선 당나라에 대한 조공 사대를 모두 철폐해버리고 조까를 시전한다. 당시 [[정관의 치]]라고 불릴정도로 수문제 이후 아시아 역사상 초강대국을 완성한 [[당태종]] 이세민은 이러한 연개소문의 도발에 빡처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였으나 개국공신이자 대승상인 [[장손무기]]가 만류하면서 한발 물러나게 되었다. 한편 연개소문은 여전히 조까라는 늬앙스로 백제와 손잡고 당나라에 조공 책봉하던 속국 신라를 연합공격한다. 이에 신라는 사대국인 당나라에 [[김춘추]]를 보내 당태종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고구려 정벌을 애원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에 앞서 [[위징]]은 고구려 기세가 만만치않고 깔볼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였다. 고구려는 다시 연개소문의 지휘로 당나라의 선빵을 처서 영주를 공격하는등 도발을 일삼았다. 당태종은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장손무기]]등 그야말로 중화 어벤저스를 구성하여 고구려 정벌에 친히 나서게 되었다. 알다시피 초반 당나라는 수나라가 뚫지못했던 요동의 핵심 요동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등등하였으나 또 다른 [[안시성주|사기캐]]가 안시성에 나타나 7인용 입구막기마냥 우주방어로 당태종의 군대를 막아냈다. 이후 당태종은 요동지역의 척박한 기후등으로 몸에 이상이 생겨 군대를 후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태종은 얼마못가 고구려와의 전쟁중 생긴 질병으로 죽게되는데 다시는 요하를 건너지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 당고조 이치는 아버지 인조 복수한다고 북벌하겠다는 효종마냥 고구려 정벌을 결심하게 되었다. 첫 전쟁과 달리 연개소문이 죽고 연개소문 자식들이 트롤짓을 하면서 당나라가 별 힘안쓰고 고구려를 결국 멸망시키게 되었다. === 세계인이 보는 고구려 === {{국뽕}} {{부심}} [[파일:이세민.jpg]] {{인용문|'''다시는 [[요동|요하]]를 넘지 말라''' - '''<자치통감>''' 당태종 [[당태종|이세민]]의 유언}} [[파일:쿠빌라이 칸.jpg]] {{인용문|"고려는 만리의 나라이다. 일찍이 [[이세민|당태종]]도 정복하지 못한 나라이다." - '''<고려사절요 원종순효대왕 편>''' [[쿠빌라이 칸]]}} [[파일:ee7c7b2f-84df-4509-ac89-6ce115e0a154.jpg]] {{인용문|(당태종이 고구려를 이기지 못한 것은) [[연개소문|개소문]]이 비상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 '''[[왕안석]]''' 송신종과의 대화중 }} [[파일:20180430123746 spcfhehh.jpg]] {{인용문|경극 '''살사문'''(殺四門) : 1970년대 [[중국]]에서 공연된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의 이름. 칼을 5자루 찬 [[연개소문]]이 [[당태종]] 이세민을 죽이려 쫒자 [[설인귀]]가 나와 [[당태종]] 이세민을 구하는 내용.}} [[파일:20180430123435 mqrqfsps.jpg]] {{인용|강소성 염성시 건호현 소재 몽롱탑(朦朧塔)은 16.7미터 높이에 8각형 누각형식으로 된 3층탑이다. 전설에 따르면 [[당태종|이세민]]이 군대를 거느리고 염성 일대에 병사를 주둔시켰다. 달빛이 몽롱한 어느 늦은 밤 [[당태종|이세민]]이 단기필마로 적진을 정탐하기 위해 다가갔다가 조심하지 않아 늪에 이르게 됐다. 마침 순찰 중이던 적군에게 발각돼 [[연개소문]]이 말을 달려 칼을 휘두르며 쫓아오니 [[당태종|이세민]]은 황급히 말을 재촉하여 달아나다가 말이 길을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그만 늪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말에서 뛰어 내린 [[당태종|이세민]]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치다가 문득 마른 우물을 발견하고는 재빠르게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추격하던 [[연개소문]]이 우물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은 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안에는 거미줄이 가지런하게 걸려있어 사람이 그 안에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버린 [[연개소문]]은 말을 돌려 자기 군영으로 돌아갔다. 훗날 [[당태종|이세민]]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거미줄의 은공을 잊지 못해 우물이 있는 자리에 탑을 세웠다. 어둡고 어려움(蒙)에 처했을 때 우물 속의 거미줄이 자신을 보호해줘 목숨을 건진데서 ‘몽롱(朦朧)’이라는 단어가 생겨났으며 이 탑을 ‘몽롱보탑(朦朧寶塔)’이라 불렀다. 아울러 ‘정혜사’라는 큰 절도 세웠다. 현재 탑의 동북방에 세니하(洗泥河)가 있는데 당 태종이 말과 함께 늪에 빠졌다가 위험에서 벗어난 후 말을 씻었던 곳이라고 한다.<ref>스카이데일리 성현식 -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73214] </ref><ref>사실 이건 전설일 뿐 실제로 이세민이 여기에 간 적도 없을뿐더러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추격전을 벌인적도 없다. 짱깨들이 [[탈무드]] 일화를 연개소문이랑 적절히 쓰까묵은걸로 추정</ref>}} {{인용문|당 태종은 온 국력을 기울였는데 용맹한 장수와 병사들이 견고한 성을 넘지 못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연개소문이 영웅이었는데도 이미 망해버린 나라인양 간주함이 지나쳤던 것이다. 고종 때는 개소문이 죽었으니 이적 한 사람만으로도 취하기에 충분했다. 이적의 재주가 어찌 태종을 능가했겠는가? 상대방의 때가 달랐던 것이다 - [[소동파]]의 4학사 제자 장뢰}} {{인용문|전해지는 말에 대당에는 위징이 있고, 고려에는 개금(蓋金), 백제에는 선중(善仲), 신라에는 짐순(鴆淳)이 있다.-이들은 각자 일방을 맡아 이름을 만리에 떨쳤으니 이들은 모두 당세의 준걸로 지략이 사람들을 뛰어넘었다. - 등씨가전(藤氏家伝 )에서 덴지 덴노}} {{인용문|지난날 [[당태종|선제]]께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고구려에 빈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당나라 시어사 668년 2월> 가언충}} {{인용문|2월17일 정오에 왕씨 성과 송씨 성의 아찰어사 두 대인이 나를 예빈관에서 대접하고는 묻기를, "당신들 나라는 무슨 장기가 있어서 능히 [[수나라]],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데 방법이 있었으므로, 병졸 된 사람들은 모두 윗사람을 친애하고 장상을 위해 죽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고구려]]는 한 작은 나라로서도 오히려 천하의 백만 군사를 두 번이나 물리쳤습니다. 지금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쳐서 한 나라가 되었으니, 물산은 많고 땅은 크며, 재물은 넉넉하고 군사는 강성하며, 충성스럽고 지모 있는 선비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 로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 '''<표해록>''' [[명나라]] 최부}} {{인용문|"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어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천조는 귀국을 금구 무결(金甌無缺)한 국가로 삼으려고 하는데 귀국은 이를 알고 있습니까?" - '''선조실록 39권, 선조 26(1593)년''' [[명나라]] 사신 유원외}} {{인용문|귀국의 강한 군대는 본디부터 천하에 소문이 났는데, [[수나라|수]](隋)ㆍ[[당나라|당]](唐) 때는 어째서 그리 굉장했으며 [[풍신수길]](豐臣秀吉)의 난에는 어째서 그리 심히 겁을 내었습니까? - '''<금계일기> 5월 20일자 기록'''}} {{인용문|"중원(中原) 본토인(本土人) 여응주(呂應周)란 자가 글로 써서 보이기를 ‘가정(嘉靖) 연간에 왜적이 소주·항주를 함락했었으나 그뒤에 방비를 잘했기 때문에 지금은 걱 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의 소매를 잡고 ‘이런 넓은 소매로 전쟁터에서 싸울 수 있겠는가?’ 하고, 갓을 가리키면서 ‘이런 싸맨 머리로 전쟁터에서 싸울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시를 지어 보이기를, <시부는 [[진나라]]의 유풍이요, 병서에 대해 온 나라가 모른다. 높다란 관이 무인의 고깔이요, 넓은 소매 옷의 군복일세. 무딘 창은 섶나무와 같이 썩고, 성을 쌓은 높이는 어깨와 가지런하네. 왜구가 이르렀다는 소문을 듣자, 팔도가 조각 구름처럼 흩어졌네.> 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이 김명원(金命元)과 같이 앉아 있을 때 신들의 갓과 소매를 가리키고 웃으면서 ‘이렇게 하고서 왜적을 제압할 수 있겠는가?’고 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1593)년 2월 20일 乙巳 2번째기사'''}} {{인용문|[[수나라]]와 [[당나라]] 때에는 일찍이 강국으로 불렸는데 지금은 어찌 이토록 나약한가. 당신들은 마땅히 돌아가 당신 나라에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고 自强에 힘써 나라를 보존하도록 하라 -'''遼東巡撫 李化龍의 발언'''}}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urassicgump&logNo=220922524287&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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