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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전 - 근정전 == [[파일:1024px-Gyeongbokgung-GeunJeongJeon.jpg|600픽셀|오른쪽|섬네일|근정전(勤政殿)<ref>BBlmtduddl at the English language Wikipedia [GFDL (http://www.gnu.org/copyleft/fdl.html) 또는 CC-BY-SA-3.0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ref> ]] 삼문삼조라는 법칙이 있다. 궁궐을 지을 때 정전까지 들어가려면 세 개의 대문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도 이것을 지키긴 하였으나 완벽하게 이것을 지키진 않았다. 경복궁은 삼문삼조를 지킨 사례에 든다. 경복궁의 삼문은 각각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이다. 이중 근정전의 바로 앞엔 근정문이 있다. 본디 근정문은 상시 열려있지 않고, 특별할 때 임금이 가마를 타고 들어간다. 감히 문무신들은 근정문으로 다니지 못하였으며, 그 옆에 일화문과 월화문으로 들어섰다. 문신은 일화문, 무신은 월화문이다. 근정전으로 들어서면, 앞에 삼도와 그 옆 품계석들이 도열해 있고, 답도를 통해 올라서면 2층 월대와 근정전이 보일 것이다. 허나 다른 세세한 것도 파고들면 재밌다. 근정전의 바닥엔 박석이 깔려있다. 박석은 화강암을 깎은 것으로, 울퉁불퉁하다. 왜 못생긴 박석을 이 아름다운 궁전에 지었냐 하면, 박석은 많은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박석은 햇빛을 직격으로 반사하지 않아 왕과 신하들의 눈을 눈부시게 하지 않는다. 감히 용안에 빛을 직격으로 반사하면 그것은 크나큰 문제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 박석은 신하들이 미끄러질 염려가 없게 한다. 왕이야 가마를 타니 별 상관이 없으나, 신하들은 그 당시 돼지가죽신을 신어서 바닥에서 미끄러질 염려가 있었다. 허나 울퉁불퉁한 박석은 그것을 방지해 준다. 세 번째로, 박석은 비가 올 때 쉽게 고이지 않는다. 또한 박석이 엇나게 박혀있어서 비를 잘 흘려준다. 또한, 근정전의 바닥은 기울어져있어서 비가 잘 하수된다. 네 번째로, 박석이 박혀 있는 바닥에선 뛸 수가 없다. 박석이 워낙 울퉁불퉁해서 뛰면 넘어지기 십상이다. 이를 통해 무례를 예의로 바꾸어준다. 이렇 듯 박석은 매우 유용한 자재라 할 수 있다. 품계석은 말 그대로 벼슬을 품계에 따라 돌로 나눈 것인데, 정 1품부터 정 9품까지 있다. 정 9품의 품계석 뒤에서, 정 1품의 품계석 뒤까지 출세하고 싶다면 30년은 걸린다. 그 정도로 조정은 힘들었다. 사실 조정에 들어서는 것 하나만으로도 엄청나게 힘든 것이었는데, 과거시험을 대과까지 합격하는 것이 수능보다 쉽다는 것은 매우 엄청난 낭설이다. 수능은 대학 정원이 비교적 많고 1년에 한 번이라도 하지, 과거시험은 전국에서 대과 33명이었고 3년에 한 번 보는 시험이었다. 가끔씩 특별시를 치루긴 하지만, 그건 특별할 때만이다. 대과의 1등은 장원, 2등은 방안, 3등은 탐화이다. 차일고리도 설명하고 싶은데 이건 실물이 있을 때 설명하기 편하므로 건너뛴다. 근정전의 주위에는 회랑이 둘러싸여 있는데, 사실은 여러 공공 기관이 있었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파괴됐을 뿐. 근정전의 월대로 올라서면 본격적인 근정전이 보이는데, 근정전은 2층 건물로 보이지만 실상은 통층 구조이다. 통층 구조 위의 천장엔 황룡 두 마리가 있다. 본디 제후국, 즉 우리 조선 같은 '왕'국은 황룡이 아니라 봉황을 쓰게 되어 있다. 허나 흥선대원군 때 경복궁을 복구하면서, 조선은 청나라에 지지 않는 국가다, 라는 의미를 함포한 채 황룡이 조각됐다. 실제로 황룡 보면 존나 멋있다. 옥좌 뒤엔 일월오봉병이 있다. 또한 월대 난간 위엔 십이지지에서 두 동물을 뺀 열 마리의 동물이 있고, 또한 사방신이 있다. 사정전으로 가는 곳에 현무가 있다. === 근정전과 사정전에 청기와를 얹어야 할 이유 === 대충 상상이미지[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29049&s_no=29049&page=1] 경복궁을 고종 시기에 맞춰서 복원한다는 문화재청의 취지는 응당 이해할 만하다. 결국 가장 최근의 모습이기도 하고. 다만 애초에 일백퍼센트 완벽하게 고증을 맞춰서 문화재를 복원하고 있는가를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문제점이 튀어나온다. 애초에 현실적인 문제에 가로막히면 한 발 물러서는게 반복되는 이중성의 원칙인지라. 국력이 받쳐주던 조선 초기에도 청기와는 부담이 컸는데, 하물며 후기에는 더욱 그랬다. 청기와 사랑으로 유명한 그 광해군조차 인경궁 창건공사를 크게 벌였을 때 정전인 홍정전, 편전인 광정전(지금의 창덕궁 선정전), 침전인 청와전에만 덮을 수 있을 정도였고, 기술도 끊기고 무리해서 중건하였던 고종 시대 경복궁에 청기와는 꿈도 못 꿨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조선 전기 때까지만 해도 역대 군왕들이 청기와에 신경쓰는 에피소드들이 실록에서 꽤 여러번 언급될 정도로 그 위상은 남다른 것이었다. 경복궁 출토 청황와들을 보면 조선이 마냥 검소한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기와들을 토대로 애써 복원할 노력도 해보지 않는다는 것은 찬란한 예술을 묻어버리는 것과 같은 애석한 일이다. 이제는 청기와를 올리는 것이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 시대이다. 경회루처럼 전기와 후기의 형태의 차이가 극심하여 문제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새로운 기와를 얹는 것 뿐이다. 다른 복원 사업을 제쳐놓고 우선적으로 해볼 만도 하다. 한 번만 해놓으면 뒷걱정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계속 청기와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지나치기 쉽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다거나 어색하다고 우려할 수도 있겠지만, 동궐도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원래 청기와 건물은 주변 건물보다 더 튀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완벽하게 고종 때의 그대로를 박제해 놓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때로는 조선 전기 때의 스타일링을 좇아 멋을 부려도 괜찮다는 이야기다. 단순 복원품이 아니라, 역사를 살아오는 건축물 그 자체로서 말이다. 롯데월드타워가 현대적인 마천루로서 대한민국과 서울을 대표하는 이미지라면, 역사와 전통을 대표하는 상징물은 다름아닌 근정전, 광화문, 숭례문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제가 조선의 상징으로 여긴 궁전도 다름 아닌 경복궁이었기에 그만큼 철저하게 파괴했던 것이다. 청기와를 올림으로써 근정전과 사정전은 조선 전기의 절정에 달한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고, 경복궁의 위엄과 품격을 가한층 드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잖아도 조선 시대의 인식이 박한 요즘, 융성했던 조선 전기의 향수를 느껴볼 수도 있을 것이다. === 바닥 포장하기 === 언제까지 구시대적인 흙바닥 진창을 전통이라는 미명으로 놔둬야 할지 모르겠다. 박석같은 돌판으로 싹 포장만 해도 문제될 것이 없고, 만약 유연하고 개방적인 시각으로 서구식 잔디포장까지 도입하게 된다면 전통과 역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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