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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뽕? == 이들은 정치 실세가 아니라 군대도 없고 사실상 돈 좀 있는 부잣집 아들들이라서 여기저기 힘을 끌어 모으는 와중에 일본군까지 끌어들인다. ㄴ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고종이나 민비가 다른 건 이해한다 해도 [[임오군란|가장 욕 먹어야 할 점]]과 일치하는 탓이다. 이 새끼들은 현대 기준으로도 내란죄다. 외환죄도 추가된다. 외환죄는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정권 탈취를 계획했을 때 성립할 수 있는 죄다. 그리고 대통령도 외환죄와 내란죄를 저지르면 불소추특권 씹어먹고 바로 구속해서 처벌할 수 있으며 사형이 확정이다. 김옥균 일당은 내란죄와 외환죄를 둘 다 저질렀다. 그러니까 사형당할 놈들이라는 거다. ㄴ 일본 안 끌어들이면 군신관계 있는 청이 가만 안 냅둘 텐데 사실상 별다른 수 없지 않았나? '엥? 미친 매국노들 아니냐' 할 수도 있는데 1884년은 아직 일본이 제국주의적 시각으로 주변국에 들이대는 모습이 부각되지 않을 때였다. ㄴ 수천 년 간 외세 침략에 왜구에 임진왜란까지 겪은 놈들이 '근대화한 쪽바리는 착하겠지?' 라는 사고방식을 하는 게 빡대가리인 거다. ㄴ 사실 일본이 야망이 없었기보단 아직 청나라보다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크지 않아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는 게 정확하다. ㄴ 일본도 서구 제국주의를 경계해서 동아시아가 연합해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는 사상도 있었고, 청과 조선 관계가 병자호란 이후에 군신관계로 굳어져서 마음대로 정권전복을 한다면 청의 개입 명분이 확고해짐. 웬만하면 자주적으로 해결 보는 게 좋은데, 일본 안 끌어들이면 답이 없는 상황. 오히려 당시 20~30대 젊은 정치인들은 일본을 개혁의 성공 모델로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 평가가 훗날 [[한일합방|경술국치]]까지 남아서, 지식인들이 결국 친일파로 흑화하게 된다. 당시 조선에는 청나라가 전통적인 사대 관계를 식민지 관계로 슬쩍 바꾸기 위한 물밑 작업을 위해 [[위안스카이]]를 파견했고 이를 통해 조선에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 정변이 성공하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입김이 더 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일본이 보기에도 김옥균 패거리들은 영 믿음직스럽지 않았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별로 도와줄 생각이 없었는지 얘네들이 급진개화파에 지원해준 건 거의 없었다. 돈도 안 빌려줬고 군대도 겨우 150명 보내준 게 전부였다. 상황이 이랬는데도 '우리가 개혁을 위해 거사를 일으키면 일본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지?'라고 생각한 김옥균 패거리는 머릿속에 뇌 대신 꽃밭을 키우고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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