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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생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일찍이 증언하듯, 호전적인 문화를 가지고 이었다고 한다. 국뽕사관에선 상무적 기풍이라고 표현한다. 서옥제로 유명하다. 결혼을 하면 신랑이 장인집에 서옥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거기서 첫 아이가 태어날때까지 노동을 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력 부족을 벌충하려는 풍습이었다. 단 이게 귀찮다고 돈을 떼우는건 금지되었다. 지참금 제도는 딸을 팔아먹는 짓이라고 혐오했다고 하며, 결혼하면 그냥 술과 고기만 만들어 돌렸다.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행하면서 국동대혈에서 제사지내고 나서 놀고 먹었다. ===건축=== 잦은 전쟁과 만주와 북한의 안습한 기후 때문에 현세에서 복을 누리기 힘들었기 때문에, 무덤 치장에 유난히 신경썼다. 잦은 외침 때문에 요동의 험준한 산맥을 이용해 높은 성곽을 쌓았으나 정작 고수전쟁시에는 평지성인 요동성 말고는 야전으로 클리어했고, 고당전쟁시에는 요동 성들 다 털려나갔다. 무덤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중국식 벽돌무덤과 함께 벽화가 있다. 안학 3호분과 집안의 무덤들이 중국과 북한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전기 고구려 벽화들은 유주자사 진의 무덤처럼 일상생활의 풍경을 묘사했다면, 후기 고구려 무덤들의 벽화는 사신도 처럼 도교의 영향으로 추정되는 추상적이거나 신화의 세계를 그렸다. ===교육=== 고구려 전국의 각 동네마다 경당이라는 교육 기관을 설치해서 평민들에게 경전이나 기마나 궁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소수림왕]] 때 오늘날의 국립대학 같은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설립했다. 이렇게 교육 증진에 많은 노력을 해서인지, 당시 남녀노소나 귀천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심지어 개까지도 책을 가까이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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