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홍우태
편집하기 (부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한화 이글스]] 시절 == [[파일:홍우태-한화.jpg|350픽셀]] 한화에 온 홍우태는 그 해 9월, 애리조나 교육리그에 참가한다. 그 효과가 있었는지 98년 한화의 구대성 밖에 없는 계투진에 140대 후반을 던지는 김해님, 이상열과 함께 등판하여 허리를 나름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99년 아시아 최다 홈런이였던 왕정치의 기록 타이를 노리던 이승엽의 마지막 타석 때 등판했는데 허용투수의 칭호를 받을 뻔 했으나 다행히 2루수 플라이로 잡아낸다. 이 때 연속해서 볼만 3개를 던지다 4구 째 공을 이승엽이 볼넷이 나올까봐 어쩔 수 없이 쳤기에 정면승부 안한다고 극성 삼팬에게 욕을 좀 먹었다.<ref>8회에 몸에 맞는 공도 나왔고 해서 한화도 전의 LG처럼 졸렬하다며 욕을 많이 먹었다.</ref> 홍우태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당시 한화의 계명철 투수코치는 정면승부하라고 주문했으며 8월 25일 기록으로 對 이승엽과의 기록이 2타수 2안타<ref>하나는 7월 21일에 친 시즌 38호 홈런...</ref>였기에 심적 부담이 많아 볼질을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4구는 100km 대 초 슬로우 직구로 이승엽이 마음 졸이며 성급하게 치지 않았으면 '그 이승엽'이 넘기지 못했을리가 없다. 이 후 6점대 방어율을 기록하지만 1999년 한국시리즈 투수 엔트리에 들어가 우승을 경험한다. 이 때 한화 김승연 회장이 모든 선수에게 한화 그룹의 주식을 나누어 주었다고한다. <s>한 편으로는 고참선수들만 줬다고도 한다.</s> 99년에도 6점대 방어율이였고 00년에도 비슷했으며 01년엔 7점대 방어율을 찍고 은퇴한다.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