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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舊 부여현 지역 === ==== 부여읍 ==== '''扶餘邑''' 면적 58.86㎢ 본래 소부리(所夫里)라고 불리던 깡촌이었지만 538년 [[성왕]]에 의해 백제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백제가 멸망하고 671년부터 686년동안 소부리주가 세워지고 나서는 개좆망했다. [[부군면 통폐합]]시기 부여군 현내면, 대방면, 몽도면을 합하여 만들어졌고 지금의 이름은 1917년 10월 1일 현내면에서 부여면으로 개명되면서 만들어졌다. 지금도 부여군의 중심지로 읍내에서 1키로 정도 걸어가면 마치 문명에서 벗어난 듯 미개한 농촌의 공간이 펼쳐진다. 읍내는 해발고도 28m 이상으로 건물을 올리지 못하게끔 고도제한이 걸려있다. ㄴ요즘 애들은 읍내라고 한다며? 나 어릴때는 부여 아니면 시내라 그랬는데... 금강발 대규모 충적평야로 구성되있다. ==== 규암면 ==== '''窺岩面''' 면적 46.53㎢ 본래 금암리에 있는 여울의 이름을 따 천을면이라 했는데 1914년 천을면, 송당면, 도성면이 합해고 규암에서 이름을 따 규암면이 되었다. 금강천이 [[청양군]] 청남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금암리 오천산에서 수목리까지 100m내외의 구릉지대로 되어있으며 금강 대곡류와 금천의 합류지점은 구룡평야의 일부에 해당한다. 현지인들은 이상하리만큼 규암이라 하지 않고 '''기암'''이라 부른다. 중심지인 부여읍엔 규제와 유물 때문에 개발이 어려워서 사실상 규암을 신도시 취급한다. 신축 아파트는 거의 규암에 있고, 새로 짓는 시설도 규암 위주로 짓는다. 보령선 역을 규암면에 짓는 이유도 이거 때문이다. ==== 은산면 ==== '''恩山面''' 면적 69.45㎢ 1914년 부여군 가좌면, 공동면, 방생면을 합하고 은산봉의 이름을 따 은산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산지가 많고 하천유역에 평야가 깨작깨작 붙어있는 형태라 [[보리]]농사를 많이 짓는다는듯? [[밤나무]]도 많이 심었다. 각대리 숭각사지, 금공리 + 가곡리 + 신대리에 산재한 고인돌, 가중리 도천사지가 있다. 은산리 산자락에는 귀실복신이 백제부흥운동을 했다는 전승이 전해지는 당산성이 있으며 이 당산성일대에서 당군에게 갈려나간 백제부흥군을 기리는 은산별신제라는 전통의식이 존재한다. ==== 초촌면 ==== '''草村面''' 면적 27.95㎢ 1914년 [[논산]]에 합병되는 노성군의 소사면을 흡수하면서 면적이 커졌다. 망월산, 감투봉의 산지를 제외하면 모두 평야지대로 여름철 심심하면 홍수로 털렸지만 초평리 ~ 응평리, 소사리 ~ 진호리간의 제방공사덕분에 안정적인 곡창지대로 탈바꿈했다. 붉은간토기, 검은간토기, 납작한 밑, 긴 달걀형의 몸체, 목이 없이 아가리가 밖으로 약간 꺾인 모습으로 다른 헬반도지역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와는 완전히 딴판인 토기와 진주 대평리 유적이 남강댐건설로 수몰됨에 따라 한국최대규모의 청동기유적이 된 것으로 유명한 송국리 유적이 초촌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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