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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족=== 사실 고대 국가에 섣불리 종족을 따지는 것은 애매한 일이다. 일단은 굳이 따지자면 주로 예맥이라고 보고 있다. 이 예맥은 한반도 남부의 한(韓)과 함께 한민족을 형성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소수의 [[말갈]]인들도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ㄴ 고구려 내의 말갈은 소수였고, 그 말갈마저도 요즘은 예맥계 말갈이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음. 한족 새끼들도 있었다. 평양에서 발견된 서기 45년의 낙랑군 호구조사를 보면 인구의 14%인 4만 명 정도가 한족으로 나온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런 인구 이동이 생각보다 자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한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투항해 오는 자가 심히 많았다, 한나라의 평주 사람 하요가 백성 1천여 가를 데리고 투항해 오자 왕은 그들을 받아들이고 책성에 안치하였다. 같은 기록도 있으며 반대로 잠지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 가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신대왕이 죽고 그의 둘째 아들 이이모가 왕위에 올자 맏아들 발기는 소노가와 함께 각각 하호 3만 여명을 거느리고 곤송강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같은 기록도 있다. ===인구=== 모든 고대 국가들이 그렇듯, 정확히 인구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멸망 당시 고구려에는 가구 수가 69만호 정도였다고 하며, [[백제]]는 멸망 당시 가구 수가 76만호 정도였다고 적혀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역시 고구려는 대부분의 땅이 척박해서 인구가 땅에 비해 적다고 말하는데, 고구려가 그동안 중원의 통일 제국들과 오랫동안 싸웠던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인구가 줄어들면 줄어들지 늘어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오히려 그 전에는 고구려의 인구가 더 많았는데 잦은 전쟁으로 인해서 고구려의 인구가 처참한 수준으로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대략 한 가구당 적어도 5명으로 잡으면 고구려의 멸망 당시 인구는 345만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예측된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되면 오히려 후대의 [[고려]]나 [[조선]]에 비해 인구 수가 과장된 면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것을 떠나서 고구려 땅이 다 쓸모 없는 땅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평안도와 황해도와 함흥평야 지역과 [[요동]]은 농사 짓기 괜찮은 땅이었다. 그리고 농사(특히 벼 농사)를 짓기 어려운 다른 땅에서는 [[콩]]이나 조나 [[밀]]같은 작물들을 재배했을 것이다.<ref>실제로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 유적을 발굴해보니까 좁쌀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군인들에게 조팝을 먹였던 것으로 보인다.</ref> ===언어=== 한국사의 고대 국가들이 다 그렇듯 언어 자료가 굉장히 부족하다. 그나마 [[신라]]는 향가라도 몇개 남아있지만, 고구려나 [[백제]]는 그저 안습. 대략 고구려 시기에 제작된 비석들이나 유물에 적은 글로 추정하는 정도다. 대부분이 그냥 뇌피셜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김유신열전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지배계층이 언어가 통했고 고구려와 신라의 지배계층과 평민 간에도 통역 없이 언어가 통한 것처럼 묘사되는 기록들이 있다. 다만 이는 주로 삼국시대 후반에 집중되는 기록들이라 삼국시대 초반부터 언어가 통했는지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일단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의 유민인 진한 6촌 세력이 진언(진한의 언어)을 사용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이 진언이 어느 계통에 속하는 언어인지 확실히 밝히기 이전에는 확언할 수가 없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 중후반부터는 서로 언어가 통한 건 맞는 거 같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평민들끼리도 언어가 통한 것으로 묘사되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아 백제의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언어가 다르다는 주장도 문제가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실제 피지배계층이 왕을 부를 때 사용한다는 건길지는 일본 천황가나 백제 왕족, 귀족들도 잘만 사용한다. 때문에 호칭만 가지고 다른 언어를 썼다고 속단하기 어렵다. ===경제=== 고구려도 엄연히 농본국가였다. 누가 고구려는 약탈 경제의 유목 국가였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고국천왕 시대의 진대법(賑貸法)은 무엇인가? 그러나 초기에는 고구려 땅이 워낙 척박해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영토를 넓히면서 농사 짓기 좋은 땅들이 많아지면서 인구가 많이 늘어났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대략 [[요동]], [[평안도]], [[황해도]], 함흥원산평야 지역이 고구려의 곡창지대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외의 벼 농사가 불리한 지역에서는 [[콩]]<ref>많은 한국인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콩의 원산지는 한국(정확히 말하자면 북한)이라고 볼 수 있다. 학계에서 콩의 원산지를 대략 한반도 북부와 만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중국 역사 기록에 콩이 고려대두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ref>, 조, [[밀]], 수수, 기장, [[보리]] 같은 작물들을 재배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또 만주 땅에서는 목축을 많이 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자원으로는 철이 꽤 유명했다고 한다. [[요동]]에 대규모의 철 광산이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요동]]에서는 석유도 난다. 고구려 땅이 지금까지 내려왔으면 한국도 산유국이었을텐데... 안습 ㅠㅠ 그리고 소금도 꽤 많이 생산했다고 한다. [[북한]] [[평안도]] 온천군에서 대규모의 고구려 시기 소금 생산지 유적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아마 근처 바다에서 소금을 채취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발굴된 유적을 보면 고구려의 소금 생산 기술이 꽤 뛰어났다고 한다. 왜(일본)에게 토산물로 낙타를 보냈다고 한 기록을 보면 만주평야에서 쌍봉낙타를 많이 키웠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정치=== 부여의 5가처럼 5부가 있었다. 그때문에 3세기 태조왕 즉위 이전까지 고씨가 아니라 여러 왕족들이 신라마냥 왕관을 돌려먹은거 같다고도 한다. 나중에 중집화 과정에서 부족자치제의 성격이 강한 5부는 행정구역의 5부로 개편되었다. 고구려의 왕 이외에 알려진 사람중 하나인 관나부인은 이 5부중 관나부 소속이다. 다른 삼국 여러나라들 처럼 신분제 사회로서 왕족과 귀족, 지방토착 지배계급(촌주), 평민과 노비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좌식자는 상호라고 불렀고 평민들은 하호라고 불렀다. 상호는 전시에 국방을 책임지며 하호는 생산과 전시에 보급만을 담당했다. 일단 전쟁이 터지면 지방관들과 촌주가 병력을 이끌고 자비로 무장해 출진하면 중앙에서 군관을 보내 지휘하였다. ===군사=== 평소에는 밥만 먹다가 일이 생기면 나가 싸운다는 전문 무사 집단인 좌식자가 있었다. 국뽕들의 동아시아 최강국이니 로마와 비교니 이런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고구려의 군사 수준은 삼국 중에서 군사력이 가장 강했거나, 중국 왕조들과 단독으로 1:1 맞다이 깔 수 있는 정도이다.(이긴다는 소리 아님) 그리고 좆구려 군대가 국뽕들 말처럼 존나 강했으면 그 시절에 무조건 영토 확장해서 중국 대륙 정복하고 이웃 민족들에게 각종 재화와 음식, 미녀 등을 내놓으라며 설치고 다녔겠지. 까놓고 이웃의 진귀한 재화와 음식, 미녀들을 따먹으려는 개인적 야심을 가진 제왕들이 판을 치던 시대 아니냐? ㄴ영토를 확장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영토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보다 크다면 영토를 굳이 확장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장수왕때 요서 점령하고도 사람들하고 물자만 빼앗은채 철군함 ㄴ 요서는 당시에 습지, 황무지여서 가지고 있으면 관리하기 힘들었음. ㄴ근데 과거에는 그런 개념 자체를 사람들이 거의 다 선호하지 않거나 믿지 않았음.(양적 이론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질적 분석처럼 질을 강조하는 풍조도 의외로 생긴지 얼마 안 됨. 근본의 탄생은 의외로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까놓고 과거 강대국들이 스노볼 못 굴리고 죄다 망하는 게 현대 이론으로 보면 당연함.) 제국주의 시대 유럽도 현대 기준으로 보면 어이없는 짓거리하고 있는데 고구려 사람들도 그런 개념들을 알고 있거나 확신하고 있었던 사람들 거의 없었을 걸. 고구려도 사실 위나라 관구검에게 두들겨 맞거나 말갈족까지 동원하고 일개 영주총관 위충 따위에게 막히기도 하는 등 능력이 후달린 면도 분명 있었다. ㄴ 당시 위나라는 화북 지역을 다스리는 나라였고 고구려는 아직 완전히 척박한 산골짜기 나라였는데 당연히 후달릴 만도;; ㄴ 고구려 국력이 크게 신장된 것은 요동 영유권을 확보한 광개토왕 이후이다. ㄴ 위충에게 간건 애초에 일개 말갈군 1만이지. 고구려 정예군이 간 것도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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