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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중국을 통일한 거대제국 수와 당나라에 맞서 싸워 이겼지만 사실상 청야전술로 전국토를 스스로 초토화 시켜서 이길수록 나라 살림또한 초토화된다. 거기다가 왕을 뒈짖시키고 독재자가 된 연개소문이 죽자 그 아들들이 분열되기까지 하면서 국가 막장태크를 탔고 나당연합군은 옆에서 툭 하고 건들이자 와장창 무너졌다. 668년 건국후 705년만이다. 수도인 평양 자체가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가까운데, 마침 남쪽의 신라에서 당나라 군사가 상륙할 땅까지 지원해주니 그대로 신라에 상륙해서 평양만 치면 되는 거였다. 이걸 생각 못하고 요하부터 쳐들어가서 번번이 틀어막힌 수문제ㆍ수양제와 당태종에게 묵념. 물론 수도만 치면 지방에 있던 장수들이 말을 안 듣기 때문에 고구려 부흥운동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부흥운동조차 왕족인 안승의 내전으로 인해 시망. 이후 협정에 따라 청천강을 경계로 하여 이북은 당나라가 먹고 이남은 신라가 먹었다. 사실 거의 당나라가 다 쳐묵한것이다. 신라는 고작 지금의 황해도 밖에 못 먹었다. 그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하지만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확실하게 먹어 버리자, 수도를 지키는 목적으로 만든 안동도호부가 국경에 너무 가까워져 요동으로 이전하였다. ㄴ신라는 먹어볼만큼 먹어보려고 당나라를 선공하고 북상을 시작했는데 황해도 석문에서 저지되어서 그 후 대동강이남으로 만족했다. 사실 당나라가 조약 먼저 깨고 백제,신라까지 도호부를 설치했는데 여기서 눈치깐 신라가 백제지역 주도권을 확보하고 이후 당나라를 경계해 안동,웅진도호부를 털고 당의 관원을 조지며 기습공격 한것이 나당전쟁의 시작이다. 왕과 유민들은 당나라 내륙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대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7세기 말 측천무후의 혹정으로 인한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발해]]를 건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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