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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이전 == 할배 홍승목이 중추원 참의를 지내다 [[경술국치]]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주는 작위를 받고 애비는 금산군수로 있었을 정도로 잘나가는 집안 출신이었다. 첫부인 민씨는 그 유명한 [[여흥 민씨]]소생의 아가씨였다고 한다.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중경의숙에서 학문을 배웠다가 1906년 일본 다이세이중학에서 수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경술국치]]때 아빠가 자살한 소식을 듣고 쇼크를 먹고 1911년 일본 문예지 '문장세계'에 단편소설 '유서'를 올림으로써 문학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자살을 알리는 편지를 받은 화자가 이 같은 내용을 번복한 편지를 받고 장난으로 여겨 답장을 보낸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훗날 일본 근대문학에서 오지고 지리는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후 [[3.1 운동]]에 참여하고 [[상하이]]에 가서 랄부친구 [[이광수(문학인)|이광수]]와 [[조소앙]]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트리오가 궁핍한 생활을 한 탓에 에엑따 시발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항일운동을 하면서 [[동아일보]]편집국장, 오산학교 교장, [[신간회]]간부로 임했다. 아들 홍기문의 증언에 따르면 신간회가 창설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한다며 원서를 읽고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고한다. 1928년 11월 21일부터 그의 인생작인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으며 1930년대에는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을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에 발표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작 임꺽정은 작가 본인의 투옥, 개인사정때문에 연재가 4차례 중단되었다가 1940년 4번째 연재중단에 좆본의 고문을 받고 고향에서 조용히 백수로 지내다 잠깐 조선언론보국회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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