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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리투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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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은 시초부터 왕의 권리가 제한되고 귀족 중심의 정치를 하는 귀족 공화정이었으며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등의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국가였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이 성립되자 폴란드는 루소 차르국과의 전쟁을 치르게되고 불리했던 전세가 단숨에 유리하게 바뀌면서 전쟁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이 대가로 리투아니아의 관할 구역은 축소되었고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초대 국왕이었던 지그문트 2세가 사망하자 의회는 프랑스인이었던 앙리를 폴란드 리투아니아의국왕으로 선출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샤를 9세가 죽자 앙리는 프랑스로 빤쓰런 한뒤에 앙리 3세가 된다. 앙리가 빤쓰런한 이유에 관한 추측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귀족 중심의 정치체제가 앙리에게 마음에 안들어서 빤쓰런 했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결국 지그문트 2세의 여동생과 그의 약혼자가 공동군주로 오르게 되며 왕권은 더더욱 악화되고 만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중부유럽의 강대국중 하나였으며 지그문트 3세때는 당시 쇠퇴하던 러시아를 신나게 털어먹으며 지그문트의 아들을 러시아의 차르 자리에 앉혀놓기도 하였다.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군주까지 겸하고 있었는데 스웨덴에서 칼 9세가 쿠테타를 일으켜 스웨덴 군주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게되자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의 두 국가의 군주가 되기 위해 스웨덴 제국과 몇차례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스웨덴 제국에게 크게 패하면서 연방의 쇠퇴기가 찾아온다. 1648년 카자크인들이 대홍수라고 불리게 될 반란을 일으켰을때 반란하나 제압못하고 대패하는 처참한 국력 수준을 보여주었고 어찌어찌 휴전하는가 싶더니 휴전 조약의 내용에 불만을 품은 카자크인들의 재봉기(1651년) 역시 반란을 제압못해 외부 세력에 의존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스웨덴의 학살이랑 약탈에 지친 카자크인들은 폴란드랑 손을 잡아 스웨덴을 몰아내고 러시아랑 프로이센과 협정을 맺는데 성공하지만 프로이센은 폴란드의 속국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스웨덴과 러시아에게 영토를 할양해주어야만 하였다. 이 사건으로 1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으면서 폴란드의 국력은 더더욱 쇠퇴하고 만다. 이렇게 처참해진 국력에도 불구하고 대홍수 반란 이후에 잘 싸운 전투가 있는데 바로 2차 빈 포위 전투이다. 물론 오스만 제국 vs 러시아,베네치아, 오스트리아,폴란드-리투아니아 였기에 오스만 제국에게 크게 불리하게 적용된 전투라고는 하나 대홍수 반란으로 국력이 엄청나게 쇠퇴하였는데도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만으로도 잘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후 폴란드는 주변 강대국(스웨덴,러시아,오스트리아,오스만,프로이센)들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경제적으로 주변국에게 종속되어 갔으며 결국 프로이센의 세력균헝 제한으로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은 [[폴란드 분할]]을 맞게 되어 멸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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