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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세 == [[피이]]의 아들이었다. [[기원전 690년]] [[샤바카]]가 사망한 후 즉위했다. 이 사람의 재위 초창기는 25왕조의 최전성기이기도 했다. [[기원전 685년]] 쯤 나일강이 가장 높은 수위로 범람했다. 10.5m를 약간 넘는 수준이라 카더라. 게벨 바르칼에 아멘 신전을 건설하고, 카와, 타보, [[아스완]] 등에서 건축사업을 벌였다. 암튼 원래 같으면 최전성기를 구가해야 하는 게 맞는데, 문제는 당시 동쪽에서 세계 최강국인 [[신아시리아 제국]]이 미친듯이 떡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의 [[이사야]] 서에는 '티르하카'라고 나온다. 이집트는 [[유다 왕국]]을 방패막이로 하여 아시리아를 견제하고 있었다. [[센나케립]] 때부터 이집트는 아시리아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고, [[에사르하돈]] 때 본격적으로 이집트와 격돌했다. [[기원전 673년]] [[2월]] 아시리아의 에사르하돈은 유다 왕국의 [[므나쎄]]를 굴복시킨 상태로 이집트로 1차 원정을 떠났으나 패배했다. [[기원전 671년]] 2차 원정 때는 성공해서 [[7월 5일]] [[멤피스]]가 함락되었고, 타하르카는 테베로 빤쓰런을 쳤다. 왕족들, 신하들, 백성들이 모두 사로잡혀 [[니네베]] 시에 끌려가게 되었다. 에사르하돈이 집으로 돌아간 틈을 타 테베에서 세력을 규합한 뒤 하이집트 쪽을 다시 탈환했다. 에사르하돈은 3차 원정을 하려고 했으나 [[기원전 669년]] 사망했다. 이후 아시리아에서는 16살 짜리 천재 왕인 [[아슈르바니팔]]이 즉위했다. [[기원전 667년]] 다시금 이집트는 아슈르바니팔의 침략을 받았다. 이번에는 이집트가 완전히 박살나서 아시리아에 먹혔다. 그리고는 이집트를 대리 통치하도록 [[사이스]]의 권력자 [[네코 1세]]를 파라오로 앉힘으로서 [[이집트 제26왕조]]를 세웠다. [[기원전 665년]] 타하르카를 지지하는 세력이 아시리아를 조지기 위해 난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짰으나 뽀록이 나서 진압되는 사건이 있었다. 타하르카는 25왕조의 원래 발원지인 누비아로 빤쓰런 쳐서 파라오를 계속 자칭하다가 [[기원전 664년]] 사망했다. 전성기를 이끌던 군주에서 한순간에 망국의 군주가 되어버린 불쌍한 인물. 다만 [[쿠시 왕국]] 자체가 망한 건 아니었고, 아시리아도 쿠시까지 진격하는 데는 좆도 관심 없어서, 빤쓰런 뒤에도 타하르카는 계속 쿠시의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타하르카는 25왕조의 전대 파라오들이 묻혔던 엘 쿠루가 아닌 누리 산을 자신의 장지로 선택하고 그곳에 피라미드를 건축했다. 후대의 쿠시 군주들도 타하르카의 전례를 따라 누리 산에 자신의 무덤을 조성했으며 이 산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인 누리-1 피라미드가 타하르카의 것이 아닌가 학자들이 추정한다. 이후 [[샤바카]]의 아들로 태어났던 [[타누타멘]]이 쿠시 왕국의 왕으로 즉위해서 파라오를 자칭하고 25왕조의 이집트 회복을 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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