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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 === 어린 시절 === 본래는 기사 계급인 옥타비우스 가문 출신으로 태어나면서 받은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이다.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오래전에 로마로 와서 집정관을 여럿 배출했던 분가 가문 사람들과 달리 본인 대에 와서야 원로원 의원 자격을 얻은 '신참자'였다. 어머니는 [[폼페이우스]]의 사촌 동생인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와 율리아([[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나)사이에서 태어난 아티아였기 때문에 카이사르에게는 외종손, 폼페이우스에겐 외외종손이 된다. (촌수로 따지면 카이사르 쪽이 더 가까웠다) 아버지는 법무관을 지낸 후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실적을 여럿 남겼으나([[키케로]]가 자기 동생을 까면서 제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가 동맹을 대하는 방법 좀 배우라고 할 정도엿다) 한창 나이인 40살도 되기 전에 집정관도 못 해보고 로마로 귀환하다 요절해버렸다. 사실상 평민 가문 출신이었기에 옥타비아누스의 어린 시절은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으나, 4살 때 친아버지가 객사하고 어머니가 재혼하자 의붓아버지의 지원을 받으며 자랐고 카이사르의 내전 때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을 제압하는 스페인 전투에 참전했다. 이 때 옥타비아누스는 중병을 앓고 있다 겨우 회복된 상태였지만 소수의 호위병만 거느리고 즉시 전선에 합류해 카이사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으니 이 즈음에 카이사르가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카이사르는 아직 한창 나이였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에게 모자란 군재를 채워줄 평민 출신의 [[아그리파]]를 붙여주고 그리스로 보냈다. === 권력 쟁취 과정 ===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옥타비아누스가 그 후계자이자 양자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조직된 군대를 이끌고 아그리파와 함께 로마로 귀환한다. 이후 정계에 입문하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후계자이자 양자로서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집행하고, 그의 이름으로 로마 시민들에게 돈을 나누어 줌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한다.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안토니우스를 몰아내기 위해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를 지원했고 옥타비아누스도 자신의 입지를 다질 필요가 있었으므로 서로 간에 아귀가 맞아 옥타비아누스는 총지휘권을 가지고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를 패퇴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로원파는 옥타비아누스의 지휘권을 거두어들이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지휘권을 넘기려고 했다. 즉, 옥타비아누스를 안토니우스 견제의 수단으로 이용한 뒤 팽하려는 속셈이었던 것.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타고난 정치적인 능력으로 키케로와 원로원파의 속셈을 훤히 다 꿰뚫어보고 있었다. 일단 옥타비아누스 자신이 군대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선 안심할 수 있지만 만약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가 해산당하기라도 한다면 정말 위험해진다. 눈엣가시 같은 자신을 원로원파가 내버려두고 있는 이유가 지휘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그 지휘권이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은 뻔했다. 양아버지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도 똑같은 군대 해산 논란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를 '애송이' 취급하며 옥타비아누스를 밀어줘서 안토니우스를 박살낸 후에 옥타비아누스도 팽한다는 계획을 동네방네 퍼뜨리고 다니는 입방정을 너무 떨어서 새로운 '카이사르'인 옥타비아누스의 귀에도 다 흘러들어갔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파 간의 내부 다툼은 일단 접어두고 공공의 적인 키케로를 위시한 원로원파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안토니우스와 화해하고 동맹을 맺어 뒤통수를 거하게 갈긴다.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긴 했지만 카이사르 사후에 한동안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었으므로 여전히 힘과 지위는 남아있었고, 여기에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하고 있던 레피두스가 합류하면서 제2차 삼두정이 성립된다. 이건 원로원파 쪽에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고 카이사르의 암살자였던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자신이 지휘할 장병들에게 거부당하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브루투스를 향해 도망치다가 안토니우스의 사주를 받은 한 갈리아 족장에게 사로잡혀 처형된다. 새롭게 결성된 삼두는 반대파의 살생부를 작성하는데 이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이 컸고, 따라서 직접적인 카이사르 암살자가 아니라면 돈을 내고 사형은 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숙청의 결과 원로원 의원 130명과 기사계급 2천명이 추방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이와 별개로 삼두는 이 동맹이 소중하다는 증표로서 각자 희생제물을 내놓기로 했다. 안토니우스는 무티나 전투에서 털려서 궁지에 몰렸을 때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외삼촌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지명했고, 레피두스는 키케로 파였던 자신의 형 파울루스를 지명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한때 자신이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던 키케로를 지명했다. 이 중 키케로는 카이사르파의 전멸을 꾀했기에 카이사르 파의 입장에선 공공의 적이었고 특히 신랄한 인신공격에 시달렸던 안토니우스는 굉장히 분노한 상태였다. 이에 안토니우스가 키케로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을 냈고 레피두스는 거기에 동의, 옥타비아누스는 이틀간 안된다고 우기다가 3일째에 묵인하여 희생제물 중 유일하게 죽었다. 이후 삼두정은 동부에서 군대를 모집한 브루투스 일파와 한바탕 회전을 치르게 된다. 레피두스가 로마에 남아 수비를 하는 동안,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동방으로 건너가 브루투스 일파를 상대하기로 한 것. 이 필리피 전투의 1차전에서 옥타비아누스 군은 브루투스 군을 상대로 먼저 도발을 걸었는데, 도발에 넘어간 쪽이 먼저 공격하면 진다는 통념을 깨고 브루투스쪽이 승리해 옥타비아누스는 18,000명의 손실을 입고 군단기 3개를 뺏겼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고지대를 점거한 카시우스를 끌어내기 위해 계속 싸움을 걸었으나 응하지 않자 이판사판으로 자기 군대가 있는 늪지대와 카시우스 군대가 있는 고지대 사이의 요새화 지대로 병력을 투입시켜 승리를 거둔다. 카시우스는 9천명의 손실을 입어 1차전에선 공화정 군에 유리했지만 워낙 난전이 벌어졌고 흙먼지도 자욱한데다가 브루투스 군이 있어야 할 장소에 없자 패배했다고 판단한 카시우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 여파는 상당히 컸는데 삼두정군은 안토니우스가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군사적인 면에서 중심을 잡고 있었던 반면, 브루투스 쪽은 그 역할을 해줄 카시우스가 자살해버리면서 균형이 무너졌다. 브루투스는 군사적인 능력이 일천했고 휘하 병사들이나 동맹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했다. 병사들을 카리스마로 휘어잡은 상태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재물로 이들을 붙잡아두는 수완도 없었다. (삼두정 군이 군단에 2만 5천 데나리우스, 병사 개개인당 5천 데나리우스를 보너스로 약속하여 힘든 보급 상황에도 군대의 사기가 올라갔던 반면 브루투스는 겨우 1천 데나리우스를 약속했을 뿐이었다) 브루투스는 고지대를 점거하고 있다는 입지를 이용해 요새를 여러 개 건설하여 적을 말려죽인다는 지연작전을 계속 밀고 가려고 했지만 20일 넘게 지연작전을 벌여댄 끝에 휘하 병사들의 불만이 위험수준에 이르렀고 동방에서 고용한 용병들과 일부 병사들이 탈영을 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 여기에 더해 안토니우스 군이 1차전 이후 3주 동안 서서히 진군하면서 브루투스 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위치에 이르게 되자 브루투스는 유리한 고지를 점거하고 있음에도 먼저 싸움을 걸지 않으면 안 되었고, 2차전이 개시된다. 브루투스는 삼두정군을 거세게 밀어붙였으나 병력이 너무 분산된 탓에 삼두정군의 주공을 저지하지 못해 전부 돌파당했다. 2차전 결과 브루투스가 남은 군대를 집결시키자 3개 군단만이 남았고 패배를 깨달은 브루투스는 자살하여 전투가 끝났다. 이후 삼두는 영토를 배분한다. 안토니우스는 가장 부유했던 동방을 선택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선택했으며, 레피두스는 시칠리아와 아프리카를 고른다. 옥타비아누스가 서방을 고르긴 했지만 아직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와 샤르데냐 섬을 점거하고 로마의 곡물 공급을 끊어버릴 정도로 위협을 가하고 있었기에 이탈리아와 갈리아만이 세력권으로 남아있었다. 필리피 전투 직후에는 [[레피두스]]가 가장 세력이 강했지만 (자신의 임지인 히스파이나와 갈리아에 있던 현역병/퇴역병 군단이 7개나 되었기 때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야금야금 갉아먹었고 제대로 된 싸움하나 없이 세력이 줄어들고 만다.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의 해상봉쇄에 따른 로마의 식량난에 퇴역병들에게 지급할 토지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치를 썩혔고, 이탈리아 본토의 안토니우스 파인 풀비아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일으킨 페루시아 전쟁을 해결해야 했다.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아내를 지원했다면 옥타비아누스는 끝장났겠지만 희한할 정도로 본토의 지지기반 유지에는 소극적이었고 결국 제압됐다. 한편 동부에 그대로 머무른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는지 판단력이 정상이라면 자기 세력의 지지기반을 깎아먹을 결과를 초래하기에 해서는 안 되는 삽질을 연거푸했다. 파르티아 원정을 갔다가 동맹인 아르메니아에서 지원군을 보낸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후퇴하자 아르메니아를 공격해 평정하게 되는데 이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로마의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의 자식들에게 분할해주겠다는 폭탄선언까지 해서 지지를 크게 잃게 된다. 그리고 서부의 교통정리가 끝난 옥타비아누스가 본격적으로 안토니우스를 제압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자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싸우자는 클레오파트라의 말만 듣고 그리스의 악티움에서 후퇴하는 최악의 삽질(악티움 전투)로 측근인 참모부터 일반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대규모로 모반을 일으켜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는 사태가 터져 세력을 거의 다 상실했고, 재기할 수 없다는 걸 깨닫자 자살한다. 이렇게 경쟁자들이 전부 퇴장하면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전체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 아우구스투스 === 이제 모든 방해자가 사라진 옥타비아누스는 철저하게 대국민 사기계획을 실시하게 된다. 우선 '공화정 복귀 선언'을 통해 모든 권력을 내려놓는다는 개구라를 친다. 내전이 끝났으니 이제 원로원의 권한을 원래의 수준으로 되돌리고 민회를 정상화 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원로원은 기립박수를 치며 그에게 [[최고존엄]] 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최고존엄]]이 라틴어로 바로 "아우구스투스(AVGVSTVS)" 다. 이 때 나이가 드디어 30살... 그렇게 분명 아우구스투스가 공식적으로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서 일개 원로원의원으로 됐는데도 그의 명예와 (개인소유인 이집트로부터 나오는 무한의)부와 인맥, 지지율 등에서 비롯된 권위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결국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거수기 집단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아우구스투스에게 합법적으로 군통수권(군대)과 호민관 특권(거부권)이 주어졌다. 그리고 이 2가지의 특권을 자신이 지명한 시민에게 양도할 권리까지 획득하게 된다. 원래부터 카이사르파였던 민회는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이며 아우구스투스의 법안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통과시켰다. 겉으로 보기엔 의회의 표결을 거치고 민회의 승인을 받는 공화정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론 아우구스투스만이 나랏일을 독점하는 [[최고존엄]]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역사학에서는 이를 원수정. 그리고 사실상 황제정으로 부르게 된다. 실제로 그는 50여년에 걸쳐 조금씩 눈치를 못 채게 이렇게 권한을 자신이 독점하도록 확대시켜 나갔다. 그러면서도 원로원 속주를 정해서 원로원 권한도 챙겨주기도 했는데 대게 원로원 속주는 로마식으로 완전히 포맷된 지역이었고 국경지역이나 유대속주 같은 신경써야 할 곳은 황제속주로 황제가 직접 총독을 임명하게 만들었다. 이런식으로 아무나 앉혀놔도 굴러가는 일은 원로원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중요한 건 다 자신이 정했다고 보면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권한이 필요한 이유도 천천히 만들고 의원들을 최대한 설득시켰다. 진짜 방해가 된다 싶은 의원들은 따로 정중하게 모신 뒤 [[푸틴]]이 [[방사능 홍차|값 비싼 홍차]]를 내오듯 정성스러운 대접을 하며 감화시키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했다. 사실 아우구스투스급 능력자가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원로원 의원들은 수십년간 그냥 놀고 먹던 시절이라고 보면 된다 (레알 팍스 로마나) 아우구스투스가 이런 식의 대국민사기를 친 이유는 그냥 발터에 맞기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 말년 === 본인은 일찍 죽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엄청나게 오래 살아서 최측근들이 다 먼저 죽어버렸다. 자기 핏줄들도 다 먼저 죽어버리는 바람에 NTR해서 데려온 아내인 리비아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았던 아주 튼튼한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삼았다. 죽을 때 내 연기가 발연기였냐 어땟냐하며 자신의 대국민사기극을 사실대로 털어놓고는 그래도 좋았잖아 하면서 자기합리화를 하다가 억하고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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