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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의 역사 ==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우리 모두가 잘 알듯이 조선을 건국하였고, 그와 더불어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그 한양의 확대판이 지금의 서울인데, 이때 서울은 성곽으로 연결된 하나의 성이었기에 한성이라고도 불렸다. 한양에서 1395년, 경복궁이 건립되었다. 경복궁은 모든 궁궐 중에서도 법궁, 즉 제일 가는 궁이었고, 추후에 창덕궁 등의 이궁이 세워진다. 이때의 경복궁은 아직 완성판이 아니었다. 일례로, 지금은 모두가 당연하게 광화문을 광화문이라고 부르지만, 태조 당시에는 광화문이라는 이름 없이 그냥 사정문이라고 불렸다가, 후에 세종 때 이르러 집현전 학자들이 광화문이라고 붙였다. 광화문은 왕의 지혜가 밝아져 만백성과 국가를 옳게 이끌어간다는 의미이다. 경복궁의 북쪽에는 북악산이, 그리고 바로 옆에는 인왕산이 있으며, 앞에는 청계천이 흘러 이상적인 명당자리로 뽑힌다. 예로부터 뒤에 산, 앞에 강이 있으면 좋은 기를 산과 강이 막아주어 좋은 기가 만연하는 명당이라 하였다. 허나 경복궁은 법궁의 체면에 맞지 않는 여러 수난을 겪게 되었다. 먼저 명종 8년, 완공된 지 백몇 년이 넘어가는 경복궁에 화재가 났고, 다음 해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역시 [[임진왜란]], 즉 1592년에 일어난 일본의 침략이다. 이때 당시 일본군은 삼진으로 나뉘어 빠르게 한양까지 올라왔는데, 여기서 의뭉스러운 부분이 나타난다. 우리가 역사를 판단할 때 사용하는 '조선왕조실록' 선조 때에는, 대략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성하께서 궁궐을 나와 피란을 가셨다는 걸 알게 된 백성들은, 즉시 분노하여 궁궐에 침입하여 노예문서를 불태우고 궁궐 자체까지 불로 파괴해 버렸다." 허나 일본군 1진의 기록엔 무엇이 좀 이상히 기록되어 있다. "우리 일본군 1진은 가장 먼저 한양에 당도했고, 경복궁 안에 진입했건만 궁에는 그 누구 없다. 허나 그 경치와 아름다운 건축에 병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단 조선왕조실록을 제작하는 기준은 사관들의 기록물이다. 허나 당시 사관들은 왕을 따라다녀야 정상일 텐데, 왕이 피란가면서 동봉해야 할 사관들이 백성 봉기를 어떻게 알았는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정작 저 일본군이 경복궁에 감탄했다는 기록도 임진왜란당시 있지도 않았던 일본인이 쓴 소설이 출저이기때문에 의심스러운건 매한가지다 그리고 선조가 파천을 가던 날의 기사를 보면 이런 기록도 나온다. "새벽에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 이 기록에 따르면 파천을 가던 날엔 하루종일 비가 내렸단 얘기인데 이 기록이 맞다면 경복궁이 파천에 분노한 백성들이 일으킨 봉기 때문에 불 탔을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하지만 그당시 민본을 국시로 내서웠던 유교국가에서 백성들이 화가나 궁궐을 태우는 창피한일을 굳이 실록에 적어놓았다는것을 생각해 보면 사관들이 어느정도 신뢰할만한 출저에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긴하다. 또한, 일본군 제 1진이 저렇게 경복궁의 미에 감탄한 것으로 보아, 일본군 제 2진, 혹은 제 3진이 경복궁을 무참히 파괴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실로 일본군 제 2진의 장수는 성격이 포악하기 그지 없어 지나가는 곳을 쑥대로 만들어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니면 제4차 평양성 전투의 패배 후 일본군이 분풀이 차원에서 한양의 백성들을 학살하고 대규모 방화를 했을 때 불탔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왜적이 경성 백성을 대량 학살하였다. 행장(行長) 등이 평양의 패전을 분하게 여긴 데다가 우리 나라 사람이 밖에 있는 명나라 군사와 몰래 통하는가 의심하여 도성 안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다. 오직 여인들만이 죽음을 면하였으므로 남자들 중에는 혹 여자 옷으로 변장하고 죽음을 면한 자도 있었다. 공공기관의 건물이나 개인의 가옥도 거의 불태워버렸다." 결국 두 가지 추측이 난다. 1. 실제로 조선의 백성들이 분기탱천하여 경복궁에 불을 놓았고 어떠한 연유로 사관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다. 2. 본디 일본군 아무개 진이 경복궁을 불살랐으나, 국가의 약한 점을 이유로 삼는 것을 원치 않아 백성들의 탓으로 돌렸다. 하여튼, 경복궁의 수난은 이걸로 끝나진 않는다. 경복궁은 불타고 난 뒤에 엄청난 세월을 복원되지 않은 채로 지내야 했다. 왕들은 경복궁의 복원에 힘쓰지 않았고 창덕궁을 법궁으로 삼았는데, 그 이유가 경복궁의 터가 좋지 아니하여 국난이 일어났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경복궁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폐가가 되어버렸고, 창덕궁이 조선 역사를 관망하게 된다. 추후, 신정왕후 조씨가 고종을 왕에 즉위하게 도와준 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힘쓰게 된다.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아무런 기반이 없는 채로 권좌에 앉은 것인데, 이를 위해 고종이 왕의 면목과 왕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각각 경복궁과 태원전을 지었다. 이때 경복궁을 중건할 때, 백성들의 노동력과 여러 자재들을 징발하고 착취하여 경제를 좋지 아니하게 했다고 비판을 받는 편이 있는가 하면, 경복궁을 중건하여 조선 왕실의 면목을 다시 살리고 지금 우리가 경복궁의 일부라도 보면서 복구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칭찬하는 편도 있다. 허나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다. 1895년 을미사변이 건천궁에서 일어난 후, 1896년, 고종은 아관파천을 하게 된다.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대사관으로 도피했는데, 그는 다시는 경복궁에 돌아오지 못한다. 그런 경복궁은 다시 시련을 맞게 되는데 예컨대 그들은 광화문을 건춘문, 즉 경복궁의 동문쪽으로 옮겼고, 삼문삼조의 가운데 문인 흥례문을 무참히 파괴했다. 유일하게 근정문은 멀쩡했는데 근정문은 일제가 저지르는 만행을 지켜봐야 했다. 일부는 해체시켜 팔기도 했으며 일부는 순서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동안 경복궁은 무려 85~90%가 파괴당한다 ㄷㄷ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정치인생을 걸고 복구했던 경복궁은 100년도 못가 처참하게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일제는 경복궁의 가장 상징적이고 정전인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를 세워 근정전을 가렸다. 이는 의미하는 바가 큰데 518년이나 이어져온 조선왕조의 멸망과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의 암울한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후에, 광복이 된 후 조선총독부는 부끄럽게도 중앙청, 그리고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됐다가 김영삼 대통령 때 국치라고 하여 파괴했다. 1990년부터 강녕전, 교태전, 광화문 등을 비롯한 많은 경복궁의 건물을 복원하고 있지만, 아직도 경복궁의 40% 뿐이 복구됐다고 한다. 경복궁은 모르고 보면 중국의 거대한 자금성과 일본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보고 조선의 것에 실망할 수 있다. 허나, 조선만이 가진 특색과 다른 점을 알고 본다면 경복궁은 매우 재미난 곳이 된다. 그에, 경복궁을 보게 될 때엔 시간에 맞춰서 해설을 듣기를 권장한다. 혹은, 음성안내기가 삼천 원에 대여가 되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건물 몇 개만을 소개할 것이다. 광화문부터 시작하여 수정전까지 다 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문서가 될 것이고, 솔직히 그것을 다 보려면 매우 지루할 것이다. 실물이 없기에. 정전, 침전, 경회루 정도면 될 것 같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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