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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삼국사기에 따르면 4세기는 백제 우세기(근초고왕) 5세기는 고구려 우세기(장수왕) 6세기는 신라 우세기(진흥왕) 이다. ===기원전~1세기=== 부여이탈 주민들이 고주몽을 중심으로 남하하여 기원전 37년 즈음에 세운나라.(삼국사기 기준이다. 으떤 학계에서는 성립은 기원전 75년즘에 됐다고 한다.) 졸본성에 도읍을 정하였기 때문에 부여의 일종으로 취급되어 졸본부여라고도 불렀다.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 에 따르면 위치선정을 개좇같이 해서 생산력이 그지라 그 대신으로 노략질을 좋아하고 호전적인 민족이었다고 한다. 이 고구려에서 다시 이탈하여 남하한 세력이 오늘날 서울인 한성과 충청도 일대에 나라를 세우니 그것이 백제이다. ===2세기~3세기=== 여튼 고조선 멸망이후 한나라는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해 통치하려고 했는데 고구려랑 백제애들이 극딜을 했다. 한국 역사상 기록으로 보자면 고국천왕이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복지를 실천했다고 한다. 고국천왕이 백성들이 봄에 먹을 것이 부족해서 어려워하는 것을 보고 국상(國相) 을파소의 건의에 따라 진대법(賑貸法)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 진대법은 말하자면 먹고 살기 어려웠던 고구려의 서민들에게 곡식을 저금리 대출해주는 제도라고 보면 된다. 물론 서민 백성들이 먹고 살기 어려워지면 백성들이 자꾸 귀족의 노예가 될테고 그러면 귀족의 권한이 세지고 왕권이 위협 받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그러한 제도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의도야 어떻게 되었든 그러한 제도 덕분에 고구려 서민들의 삶이 많이 나아졌을 것이다. 그래서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며 부여와 손을 잡지만 태조왕과 미천왕때 한사군은 축출되었다. 다 쫓아낸 이때가 기원후 3세기다. 동천왕은 위나라와 시비 붙었다가 [[관구검]]에게 털려 충신이 가미카제해서 겨우 목숨 보존한 안습한 사건도 있었다. 참고로 이때 연맹왕국 에서 더이상 성장이 지체된 옥저와 동예까지 합병한다. 그 전까지는 이 둘은 고구려에 조공바치던 셔틀이었음. ===4세기=== 하지만 최악의 위기가 닥쳐오는데 그거슨 모용선비의 전연이 침입해 고국원왕을 관광시키고 왕비는 납치당했고 수도를 털어 왕릉을 도굴하고 사람들을 잡아갔다. 사실상 나라가 망해도 이상할게 없는 상태였으나 소수림왕이 중집화 정책을 실시해 5세기 중흥의 발판을 닦는다. 광개토대왕을 18살에 즉위해 50도 되기전까지 왕을 하다 사망했는데 인생이 정복의 연속이었다. 신라를 셔틀로 삼았다. ㄴ그래도 좆라를 안 멸한대가로 신라는 1000년,고구려는 700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그 셔틀에 왜구가 쳐들어 와서 왜구를 때리다 보니 왜구가 셔틀의 옆에 있던 금관가야로 도망을 쳤고, 고구려군은 그대로 금관가야까지 쓸어버려서 가야의 판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만주를 쳐묵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만주는 꿀땅은 아니었고 그냥 간지템이었다. 캐안습 (그래도 만주의 양고기는 좋은 식량감이었다고 한다) 만주 자체는 상징성이 더 컸다. 당시 개꿀로 여겨지는 땅인 중원으로 바로 가는 길목이 요동ᆞ만주 지역이었으므로, 그 지역을 차지하면 보통 "내가 이 동네에서는 짱짱맨이다!!"라고 뻐길 수가 있었다. 중국이 존나게 만주를 뺏고 싶어했던 것도 중원 지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주변국가들이 설치지 못하게 누르려했던 게 이유였다. ㄴ 요동은 중국 입장에서 보면 바로 옆동네여서 위협적이고, 요동이 당시 교통의 요충지라서 무역이 발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음. ===5세기=== 5세기는 장수왕 한명밖에 없다고 보면 댐. 그래서 왕의 시호도 오래살아서 장수왕이다. 머왕의 아들 장수왕은 꿀땅인 한반도 남부 즉 한강유역에 집중한다. 극딜을 당한 백제와 신라가 손을 잡는데 이것이 1차 나제동맹이다. 하지만 장수왕은 개로왕 북위 국서사건을 구실로 침공,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전사시키며 신라를 매금(노비)으로 전락시킬 정도로 대꿀멍시킨다. 사실상 고구려 최대 전성기 이다. 이때 신라는 무지막지하게 영토가 찌그러진다. 사실상 이때가 신라를 없앨 마지막 기회였을 거다. 그러나 장수왕은 자비롭게도 한반도 중원에다가 고구려비를 세우며 빵셔틀 신라왕은 중원으로 나와서 인사나 나누자고 했으나 신라 왕은 나오지 않았다. (이때 없애지 못한 신라는 그 후로 [[지증왕|지증]]ㆍ[[법흥왕|법]][[진흥왕|진]]ㆍ[[선덕여왕|덕만]]ㆍ[[무열왕|춘추]]가 다스리며 무지막지한 국력 상승을 이루어내고 나중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사실상 이때부터 고구려의 국호가 고려로 바뀌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도 후대의 우리가 고구려라고 부르는 것은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 [[광개토대왕비]]는 아빠묘지에 세운 묘비이고 중원 고구려비는 백제정ㅋ복ㅋ 인증용으로 이 양반이 세운거다. 지두우(흥안령 일대, 몽골 땅이다)를 분할 점령하려다가 불발된걸로도 유명하다. ===6세기=== 초반에 문자왕이 선비족에게 개박살나서 빈사상태이던 부여를 합병한다. 고구려의 최대판도는 이 왕때 찍는다. 이때가 한민족 최대영토였다. KIA~주모옹! 안장왕 시기 전성기를 찍지만 암살당하고 안원왕 시기부터 서서히 몰락한다 ===7세기=== 중국을 통일한 거대제국 수와 당나라에 맞서 싸워 이겼지만 사실상 청야전술로 전국토를 스스로 초토화 시켜서 이길수록 나라 살림또한 초토화된다. 거기다가 왕을 뒈짖시키고 독재자가 된 연개소문이 죽자 그 아들들이 분열되기까지 하면서 국가 막장태크를 탔고 나당연합군은 옆에서 툭 하고 건들이자 와장창 무너졌다. 668년 건국후 705년만이다. 수도인 평양 자체가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가까운데, 마침 남쪽의 신라에서 당나라 군사가 상륙할 땅까지 지원해주니 그대로 신라에 상륙해서 평양만 치면 되는 거였다. 이걸 생각 못하고 요하부터 쳐들어가서 번번이 틀어막힌 수문제ㆍ수양제와 당태종에게 묵념. 물론 수도만 치면 지방에 있던 장수들이 말을 안 듣기 때문에 고구려 부흥운동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부흥운동조차 왕족인 안승의 내전으로 인해 시망. 이후 협정에 따라 청천강을 경계로 하여 이북은 당나라가 먹고 이남은 신라가 먹었다. 사실 거의 당나라가 다 쳐묵한것이다. 신라는 고작 지금의 황해도 밖에 못 먹었다. 그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하지만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확실하게 먹어 버리자, 수도를 지키는 목적으로 만든 안동도호부가 국경에 너무 가까워져 요동으로 이전하였다. ㄴ신라는 먹어볼만큼 먹어보려고 당나라를 선공하고 북상을 시작했는데 황해도 석문에서 저지되어서 그 후 대동강이남으로 만족했다. 사실 당나라가 조약 먼저 깨고 백제,신라까지 도호부를 설치했는데 여기서 눈치깐 신라가 백제지역 주도권을 확보하고 이후 당나라를 경계해 안동,웅진도호부를 털고 당의 관원을 조지며 기습공격 한것이 나당전쟁의 시작이다. 왕과 유민들은 당나라 내륙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대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7세기 말 측천무후의 혹정으로 인한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발해]]를 건국한다 ===멸망 후=== [[안승]], [[검모잠]], [[고연무]] 등이 폭동을 일으켰으나 백수산 전투 등에서 싹 다 진압당한다. 이후 안승과 검모잠이 신라의 도움을 받아 보덕국이란 허수아비 국가를 674년 하나 세우나 지들끼리 싸우다가 683년에 좆망한다. 보장왕 3남이 소고구려란 나라를 699년 세워 820년 [[발해]] 성왕에게 병합될 때까지 가기도 했다. 고구려 지배층은 당에 의해 중국 내륙 깊숙한 곳으로 강제 이주당했으며 남은 이들은 여진족, 신라인으로 흡수, 동화되어 사라졌다. 그럼에도 민중들이 자주 죽창을 들어서, 당나라에서 병약한 이들만 남기고 대부분 중국 서북부나 강남 지역으로 강제이주를 자주 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끌려간 고구려 금/은수저들과 말갈은 지역개발을 위해 강제노역을 했는데, 그 중 본토 가까이에 남아있다가 못해먹겠다고 폭동일으켜서 도망나온 [[대조영]]과 그의 무리들이 [[발해]]를 세운다. 또 한반도에 있는 고구려 유민들의 후손들은 궁예의 [[태봉|후고구려]]([[태봉]])에서 일하다가 [[궁예]]가 또라이 짓을 하자 반란을 일으키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해서 [[고려]]가 세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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