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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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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흥흥흐흥~ 흐응흥흥~흥선대원군~ 한반도 최고의 인간불도저 본명이 이하응이다. 하응 가버려엇- [[조선]] 26대 임금 [[고종]]의 아버지이다. 줄여서 그냥 대원군이라고도 부른다. 장담하는데 리얼 한국의 1세대 [[틀딱충]]이다. 물론 공이라고는 일절 존재하지 않는 다른 사간과는 달리 공도 있고 과도 있지만 문제는 '''그 과중 [[고종|하나]]가 조선을 파워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조선을 진짜배기 헬조선으로 만든 세도정치를 끊어버리고,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서원]]을 거의 다 뿌수고, 삼정의 폐단을 정리하면서 양반에게도 세금걷겠다고 포고해 당시 민중으로 부터 슈퍼스타가 됐다. 그리고 나서 어차피 뭘 해도 몰락 확정인 구왕조의 모든 부를 긁어모아 후손들을 위한 관광업 투자에 [[경복궁|몰빵하셨다.]] 게다가 이 부를 긁어모으겠다고 당백전을 찍어내 슈퍼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살만해질거 같던 백성들을 다시 배고프게 만들었다. 특히 경복궁 증건에 들어간 경제적 폐혜는 교과서에서 그냥 이런 헤프닝이 있었다 정도로 넘어가지만 당시 세도정치 막 끝나서 돈이 없던 시기에 저런 대규모 공사 벌려놔서 경제가 엄청나게 휘청거렸다. 게다가 난이 좀 일어난다 싶으면 조선 정계의 가장 큰 어른으로써 화합을 이끌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분열을 부추겨 권력을 잡으려 했고 그 덕분에 외국애들이 조선 내정에 간섭하는 데 아주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물론 조선이 무슨 발악질을 해도 영,프,미가 마음만 먹으면 한 주먹 감이었다.) 위에도 언급됐지만 어차피 망할 조선이었다. 거기서 부를 긁어모아서 만든 게 현재 한국의 관광자원이 되었다. 즉, 경제를 망가트린 조치인건 사실이지만 후손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좋은 선택이었다. 참고로 고종은 남긴 게 없다 ^오^ 그리고 당시 서양과 전쟁하고나서 본격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발전을 하고 있던 중국과 서양에 겁먹고 후장을 벌려 임신당하고 결국 서양의 빵셔틀이 된 일본을 보고 개방의 필요성을 느껴 프랑스 신자들과 접촉했는데, 이걸 유교탈레반들에게 꼬투리 잡혔다고 천주교도들을 탄압했다. 이 덕분에 외세가 본격적으로 조선을 먹이로 보기 시작했고 본인도 오페르트 같은 또라이가 지 애비 무덤 판건 보고 빡돌아서 서양 뻐큐머거로 완전이 뒤돌아서서 이 중요한 시기에 개화쪽에선 남겨둔게 없었다. 결국 이는 지 아들내미와 며느리가 알아서 외세에 똥꼬 벌리도록 하는 게 어느정도 공헌을 해버렸다. 만일 2~30년만 일찍 조선에 나타났다면 어떻게 됬을 지 모르겠지만 그가 실권을 잡았을 때는 조선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였다. 흥선대원군이 병인박해 시기에 죽인 천주교 신자가 8,000명 정도 된다. 공식적으로 집계 된 것만. 외정척사 삽질로 개화 늦춘 측면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냥 순수하게 사람을 이렇게나 많이 무자비하게 도륙했다는 점에서 이 새끼도 걍 쓰레기새끼다 ㅅㅂ 이것 때문에 천주교를 공통적으로 믿던 유럽 열강들이 "아싸! 저쪽 지역에서 우리 형제와 다름없는 천주교도들이 저하응 새끼님한테 고통받고 있다. 가서 우리 형제인 저쪽 천주교도들을 구출하러 가자!"라며 조선 침략에 대한 제대로 된 명분을 제공해버렸으니... 당시 민심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천주교 신도들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오른손에서 흑염룡이 날뛰는 15살짜리 중2병 꼬맹이가 스스로 관아에 찾아가서는 자기는 천주교 신자라고 주장하며 순교한 지 아빠 따라 죽겠다고 지랄한 일이 있었다. 어린애라고 봐주기도 그렇고 해서 목매달아 죽였는데 걔가 천주교 순교성인으로 등록됐단다. 심지어 청담동성당 주보 성인이 됐다(...) 사실 처음부터 [[쇄국]]하려는 생각을 가진 건 아니었다. [[1865년]]에 원산에서 러시아 함대가 개항을 요구한 일이 있었는데 그게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오히려 [[프랑스]]에게 손을 뻗쳐보려고 하고 선교사들도 여럿 만났다. 그런데 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조선에 도움을 좆도 주기 싫다는 의사만 보여서 개빡쳤고 애꿎은 신자들을 죽임으로써 본을 보이려고 했다. 일단 이건 개짓거리가 맞다. 그러자 병인양요가 터졌고 안 그래도 프랑스에 대해서 빡친 상황에 독일까지 [[오페르트 도굴 사건|오페르트 남연군 묘 도굴사건]]을 일으켜 결정타를 날리게 된다. 오페르트 씹새끼 때문에 우리나라는 한동안 나라의 문을 걸어잠구게 되고 [[1874년]] 흥선 머원군이 실각하고 [[민비]]씹년이 집권하자 쇄국이 조금씩 풀려나갔고(이때 민비년이 선을 넘어버려서 [[임오군란]]이 터지고 나라가 개판이 된다.) [[1880년대]]에는 여러 서양 열강들과 수교를 맺게 되었고 프랑스와는 [[1886년]]이 되어서야 수교를 맺게 된다. 사실 오페르트 도굴사건과 신미양요는 직접적 원인이고 당시 조선 내부의 정치 판도를 봤을 때 호포제나 서원 철폐 등 흥선대원군의 급진적 정책으로 꼴받은 선비들을 구슬리기 위해서 쇄국드립을 친 것도 있다. 하지만 당백전의 후유증으로 흥선대원군의 입지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최익현이 고종 니가 친정해라라는 뉘앙스의 상소를 올리자 1874년 초 흥선대원군은 물러났다. 이후 1882년 임오군란 때 복직했다가 청나라에 의해 납치당하고 3년간 중국에서 지내다가 1885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에도 계속 고종이 병신짓을 한다며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얼굴마담으로 잠시 집권했으며 제2차 갑오개혁과 동시에 군국기무처가 폐지되면서 다시 나가리되었다. 그 이후에는 민비 암살을 사주했다는 음모론이 있으며 그럭저럭 지내다가 1898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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