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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원나라]]의 장군이었다. 고려시대 전주에 살던 이성계의 조상이 관청의 관노를 사랑해서 수령한테 죽을 위기에 처했었는데,그때 이성계의 조상이 그를 따르는 농민들을 데리고 동쪽 끝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조상이 데리고 온 가구수가 1000호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이를 불안하게 여긴 몽골이 항복을 요구하자 걍 항복해서 만주 몽골왕의 가신집안이 되었다. 얘네 가문은대대로 천호장이란 고위직을 세습하는 몽골 명문 귀족집안이 된다. ㄴ 심양왕이 아니라 만주를 지배하던 옷치킨 家를 말하는거임 만주지역은 고구려 멸망 이후와 청나라 대두 이전까지 여러 민족의 나라가 몇세기 단위로 교체되던 혼돈의 카오스였기에, 어지간한 군사적 역량으론 지배할 수 없는 곳이었다. 칭기즈칸 시대 이래로 늘 몽골의 정예군이 주둔하였기에, 군사기술력이 제국 내에서 가장 선진화되어 있는 지역이었으며 그런 이곳에서 단련된 이성계의 능력치는 본 서버 오픈도 전에 만랩 상태가 되었다. 천호장인 할아버지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 빠엔 티무르: 이춘), 아버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 우르스 불카: 이자춘)의 아들이다. --만주인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건 없고, 국적은 몽골인으로 후에 귀화하며 이씨족보를 구매한 것으로 보인다.<ref>(전근대 시대에 성씨는 그 가문의 봉토를 의미하는, 귀족의 증거인지라, 성씨를 가진 고려인이 몽골에 귀화하면 반드시 자신의 성씨는 남겨놓는다. <ex 이첩목아, 박불화, 김첩목아 등> 때문에 그의 조상은 100% 한반도인은 아니었다.)</ref> 근데 하필 사 놓은 족보가 무신정권 때 난리치던 [[이의방]] 꺼... 족보 브로커한테 존나 통수맞은 듯.-- ㄴ이분들은 역사를 정사가 아니라 자기 머리속에서 만들어서 쓰시네 정사대로 하자면 조선왕조실록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태조 1권 총서 1번째 기사에서는 계보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일단 실존이 확인되는 인물은 고려 중기 무렵에 나타난 무신정권의 집권자 중 한명인, 이의방의 동생 이린(李璘)이다. 반역자로 규정된 이의방과 혈연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별로 내키지 않았는지, 과거 전주 이씨의 족보에는 이린의 한자가 다르게 되어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애매하게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태조 총서의 기록에서도 李璘이 아니라, 李隣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전주 이씨의 문중에서도 확실히 인정하고 있다. 하여간에 이린은 이의방이 끔살당할때 죽지 않고 몸을 피한 듯하다. 이때 이린은 시중(侍中)이었던 문극겸(文克謙)의 사위였는데, 장인 어른이 조금 도와주었을 수도 있다. 문극겸은 이의방이 죽은 후에도 비교적 꾸준하게 활약하였다. 이린이 문극겸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이양무(李陽茂)다. 이양무의 아들이 이안사(李安社)이고, 나중에 추존되어 목조(穆祖)가 된 사람으로, 다시 이때부터 비교적 자세한 내용들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조선 왕조가 전주 이씨인만큼, 당연히 본래 이 가문도 전라도 전주(全州)에 있었다. 그런데 이곳과는 전혀 다른 동북면 쪽이 이성계의 근거지가 된 것은 조금 곡절이 있었던 까닭이다.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기록으로 보면 이안사는 그 지역의 관리와 관청에 딸린 기생의 문제로 트러블이 생겼다고 한다. 여자 문제 가지고 트러블이 생겼는지 재산 관련 문제인지는 여하간에 알 수 없으나, 하여간에 사이가 더럽게 된 모양으로 문제가 생긴 관리는 윗선에 연락하고 심지어 군사까지 동원해서 이안사를 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안사는 그 말을 듣고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이주했다. 이때, 이안사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170여 가(家)나 된다고 하는데, 이를 볼때 과장을 고려하더라도 전주에서 꽤 끗발이 날리던 가문으로 보인다. 삼척으로 옮겨간 이안사 집단은 오랜 기간 그곳에서 살면서, 자연스레 농사도 지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그들이 배 15척을 만들어 왜구를 방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안사 집단은 이때도 왜구에 대비하여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경제적 기반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이성계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연구』 ─ 이현우) 그래서 의주도병마사로 임명되었지만 이후 정세변화속에 원나라에 귀부한다. 하여간에 그렇게 기반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었는데, 또 문제가 생겼다. 원나라의 야고(也古)라는 인물이 쳐들어올때는 몸을 피해서 문제가 없었지만, 대략 그 무렵에 새로운 지방관이 이 지역으로 오게 되었는데, 하필 전날에 문제가 생겼던 그 관리였다 얼른 자리 털고 뜨는게 나을 것으로 보였던 이안사는 동북면의 의주(宜州)로 이동했다. 이때도 170여 가가 따라 나섰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과장을 고려한다고 쳐도, 이안사가 상당한 수의 유이민 집단을 통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해볼 수 있다. 고려 조정에서는 그렇게 이주한 이안사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해서, 그렇게 된 바에야 원나라 군사를 막으라고 시켰지만, 산길대왕(散吉大王)이라는 원나라 장수가 두차례 항복을 권유하자, 싸워봐야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 편이 떡고물이 많을것이라고 여겼는지 원나라에 항복하였다. 항복한 후 이안사는 같은 집안 사람을 산길에게 혼인시켜 서로 연줄을 만들어 놓고, 자의인지 타의인지 더 북쪽으로 가서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東)에 정착하였다. 알동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두만강 하류지역으로 보인다. 이안사는 산길의 주선으로 인해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가 이안사를 위해 세워지고 이안사 본인은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되었다. 이때 이안사의 집은 알동에 있었지만 거처가 일정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이안사가 자신의 집단 유지를 위해 여러곳을 왕래하면서 노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이안사의 집단이 여진 거주지역에 살면서 순수 농민적 성격에서 여진족과 같은 생활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안사가 사망한 뒤, 아들 이행리(李行里)가 그 기반을 이어 받았다. 이행리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도 참여하여, 충렬왕을 뵙고 자기가 몽고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충렬왕은 "그대 행동을 보니 마음을 알겠다"라면서 이해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이행리의 세력이 확대되고 위상도 제법 커지자, 근처에 있던 여진 천호(千戶)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익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 강성(强盛)하니, 여러 천호(千戶)의 수하(手下)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여러 천호들이 꺼려서 모해(謀害)하기를, “이행리(李行里)는 본디 우리의 동류(同類)가 아니며, 지금 그 형세를 보건대 마침내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니, 어찌 깊은 곳의 사람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를 제거하고, 또 그 재산을 분배하지 않겠는가?” ─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 9번째기사 이행리는 우연히 그 과정을 알게 되고 가족들을 이끌고 달아났는데, 뒤를 보니 적이 무려 3백여명이나 되어 추격전을 벌이다가, 갑자기 건너는 곳의 강이 물이 열려 자신들은 돌파하고, 다시 강이 물이 막혀 적이 추격해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은 과장이 있겠지만, 여하간에 다시 기반을 날리고 도망친 이행리는 여러 섬에서 조금 지내다가, 의주로 와서 그곳에서 다시 세력을 키웠다. 그리고 1300년, 쌍성 근처의 고려인들을 관리하는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이행리가 죽고 아들인 이춘(李椿)이 이를 이어받았다. 이춘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함주(咸州)로 옮겼는데, 목축하는데 편리해서 그랬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이씨 집안의 세력권 아래, 유목 성향을 가지고 있는 무리들이 이미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춘은 쌍성 총관(雙城摠管)의 딸과 결혼했는데, 이로 볼때 해당지역에서 어느정도 인정을 받은 세력으로 보인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알동에서 이씨 집안을 따라 이곳까지 이주한 사람들을 본래 자리로 되돌리려고 했지만, 이춘은 직접 원 조정에 글까지 올려 사정을 설명하고 이를 막아내었다. 이런 면으로 볼때, 이춘에게 있어서 그 주민들은 경제적 기반을 위해 꼭 필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춘이 사망하고 난 뒤에는 후계자를 놓고 내흥이 벌어졌는데, 처음에는 이춘의 큰아들인 탑사불화(塔思不花)(몽골식 이름. 고려식으론 이자흥(李子興))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곧 죽고 말았다. 탑사불화의 아들이었던 교주(咬住)는 나이가 어렸는데, 이춘의 부인 중 박씨의 아들이었던 탑사불화, 이자춘의 세력에 대해, 조씨의 아들이었던 완자불화(完者不花), 나해(那海)와 누가 해먹을 것인가를 두고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이자춘은 직접 개원로(開元路)로 나가 사정을 설명했고, 원나라 쪽에서 박씨 쪽에 손을 들어줌에 따라 이자춘이 어린 이교주 대신에 임시로 이씨 집안의 대빵이 되었다. 그 후 이자춘은 나해를 때려잡았다. 일단 기록으로는 이교주가 나이가 차자, 이자춘은 자리를 다시 넘겨주려고 했다는데, 교주가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떨지…… 그리고 이 이자춘의 아들이 이성계이다 다만 전주 이씨 유전자 검사 밝혀진 이성계 모달 O3a2c1b-CTS2272는 중국에선 발견이 안되고 일본에서 조금 나오며 한국에는 김씨, 박씨, 방씨 등에서 광범위하게 나온다. 원조 조선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 ㄴ? 조선 왕조 후손 검사 해봤냐? 우리나라 성씨 족보 개족보라 왕조 후손이 아니면 신뢰성이 별로 없는데 http://blog.koreadaily.com/view/myhome.html?fod_style=B&med_usrid=Dosa&cid=883381&fod_no=1 ㄴㄴ에휴 그럼 어디 굴러다니는 이씨 했겠냐 최소 종친회 인물이겠지 따까리로는 퉁두란이란 여진족 추장이 있는데, 건주여진족 수장의 측근가신이자 친척으로 누루하치의 조상이다. 건주여진족의 수장 오도리 퉁밍거 티무르(동맹가 첩목아: 童猛哥帖木兒: 퉁밍거 티무르: 몽케 티무르: 猛哥帖木兒)는 이성계 사후 전 에는 한양까지 기어와서 이성계의 아랫도리 앞 뒤를 핥고 빨았으나, 이성계 사 후 바로 이탈하여 세력 불리기 시작 훗날 그의 손자의 손자인 누루하치의 아들에 의해 이때 개같이 굴려졌던 조상님의 굴욕을 이자까지 쳐 붙여서 청산해준다. ㄴ 그러고보니 조선 중기때 여진족들이 세력을 불리고 만주,조선, 그리고 심지어 몽골까지 먹었던 짓거리를 한게 꼭! 고려 말,조선 초기때 이성계가 살아 생전때 하던 짓거리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던데 그만큼 이성계의 영향력은 이 새끼들한텐 피할수 없었을지도 만주의 대부분의 여진족을 손에 쥔 권력자였지만, 그가 조선에 귀화하면서 통제하의 힘좀쓰는 여진족들이 이탈한다. 결국 [[위화도 회군]]으로 [[중세 고려|고려]]를 멸망시키고 [[근세 조선]]을 만든 장본인이다. 자신의 군주였던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과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신돈]]의 핏줄로 몰아 붙여 죽였고, 이어서 자기가 옹립한 공양왕도 얼마 뒤에 폐위 시킨 다음 그 나라를 그대로 차지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인지 굉장히 미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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