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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임진년에 왜가 일으킨 난. 이 전쟁의 승리는 분명히 조선과 명이 맞다. 전쟁의 결과 유무는 누가 더 이득봤느냐가 아닌, 침략한 쪽의 목표가 성공했냐 실패했느냐에 따라 갈리는 게 맞고 일본은 실패했으니 당연히 그걸 막아낸 조선(+명나라)가 맞다. 미국을 막아낸 베트남이 승전국이듯이. 다만 실질적인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면 사실상 일본의 승리라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인 아닌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전술적 측면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에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고 명군 또한 보급 문제 등으로 일본군과의 답보 상태가 지속되었고 일본군의 철수도 패퇴가 아닌 일본 내의 정치 지형 변화로 인한 전력 온존을 위함이었기에 전술적으로 따지면 일본군이 패배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리고 초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함은 둘째치더라도 일본은 여력을 가지고 물러나 손해를 최소화한 측면이 분명 존재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후 정권을 그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겨주면서 저승에서 피눈물을 흘렸겠지만 이는 일본의 내부적 사정에 가깝고 오히려 일본은 전란이 끝난 지 단 2년 만에 역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을 벌이거나 임진왜란의 주축을 맡았던 사쓰마 번이 단독으로 류큐 왕국을 털어 복속시키는 등 전쟁 피해는커녕 엄청난 국력 팽창을 과시하고 대외적으로 일본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특히 더 중요한 물질적 이득 도 있는데 조선에서 엄청난 수의 포로가 끌려 가 포르투갈의 노예 상인들에게 팔리거나 일본에 정착하기도 했고 그리고 이들 포로 중에는 이삼평과 심수관으로 대표되는 도자기 장인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의 도자기 공업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들 도자기 장인들은 임진왜란 직후 명-청 교체기가 도래하고 중국의 대외 무역이 일시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된 시기적 배경과 함께 일본이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중국을 밀어내고 1위를 석권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일본의 도자기는 대체제를 찾던 유럽 및 아라비아 상인들을 만족시켰다. 또한 일본은 은 생산량 폭증 및 제련 기술의 향상으로 넘쳐나는 은을 소비할 무역 창구 확보를 절실히 노렸는데, 이후 청과의 직접 무역은 어려웠으나 조선을 통한 중계 무역을 통해 일정부분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렇듯 외부에 존재감을 과시하고 무역을 통해 실리까지 확보하는 동시에 전성기를 열어 차후 메이지 유신 및 개화까지의 발판을 마련했으니 이 전쟁을 계기로 일본이 얻은 이득은 어마무시하다. 또한 조선인 김여철이 [[우키타 히데이에]]에 의해 납치되어 와키타 나오카타(脇田直賢)라는 이름을 얻고 이후 마에다 가문의 가장 든든한 가신이 되었다. 한마디로 승리는 조선이 한 게 팩트지만 이득은 일본이 훨씬 크게 본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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