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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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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이 새낄 두고 선견지명을 가졌다고 입 터는 머갈통 빈 새끼가 있는데 그 새낀 이 새끼가 친일파였던거뿐만 아니라 골수 반미였다는건 모르는 좆병신이 분명하다. 심지어 이 새낀 전쟁 중에 일본이 미국에게 강냉이 탈탈 털리는 와중에도 귀축영미를 부르짖고 일본을 빨아댄 새끼다. 친일은 했을지언정 세계 주도권 자체는 미국이 쥘거라고 내다봤던 [[이완용]]보다도 보는 안목이 없다. 대체 이 새낄 왜 빠는거냐? ㄴ 동양 엘리트면서 서구 유학파인데, 그 당시 양놈들 인종차별 존나 쩔었고 인종차별 실제로 당하니 양놈들한테 이를 갈고 있었던거지. 백인 선민사상에 빠져 타인종 인간취급도 안하고 서구 제국주의에 침탈 당할바엔 같은 황인인 일본편 드는게 낫다는 판단임. 당시 환경 생각해보면 합리주의적인 판단이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 착취 당하는 꼴 보고 일본도 아시아 연맹체제 구축해서 서구 제국주의 침탈에 같이 막아야한다고 주장하던 파당들 있었는데, 중국 조선 왕조가 너무 노답이라 동등하게 안본거임. {{인용문|한국이 생존하기에 적합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 한국이 적자로서 살아남게 하는 것이다. 한국이 공정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할 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1892년 4월 7일 윤치호 일기에서.}} {{인용문|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1890년 5월 18일 윤치호 일기에서.}} {{인용문|인종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청나라|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 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 :이거 [[경술국치]] 이전 발언이니 역센징들은 괜한 일뽕빨지마라 ::윤치호는 미국 유학시절 실제로 지독한 인종차별에 시달렸고 일종의 트라우마가 남았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은 다 썩고 허물어져가는 누각 꼴이었고, 조선은 그보다 더욱 심했다. 지금이야 현대시각에서 보면 좆같은 소리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조선과 중국은 희망따윈 찾아볼 수 없는 썩은 쓰레기통 꼬라지임에도 그에 반면 일본은 똑같은 꼴에서 강대국으로 변했다는것에 일종의 경외감을 갖고 있었고 이건 당시 조선과 중국 지식인들에게 만연한 일본에 대한 열등감과 패배주의와 일맥상통한다. {{인용문|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 {{인용문|아직 [[한국]] 사람들은 민도가 낮아 대의 국민회의(代議 國民會議)나 하의원의 실시는 불가능하다}} {{인용문|[[한국인]]은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살아간다}} {{인용문|저열하고 무능한 조선의 민족성으로는 자치를 손에 쥐어준다고 해도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용문|수치스러운 한국 역사에 대하여 더 알면 알수록 현 정부 하에서는 개혁의 희망이 없음을 확신케 된다. 정부는 500여년 간 국가의 향상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간단히 말해 구한말의 썩어빠진 무능한 나라꼴에 절망과 혐오감을 가지고서 조선이란 나라에 희망을 거의 버린 인물. ㄴ아예 버린 사람은 [[박중양]]임. 얘도 아주 작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지기는 했었다. 그나마 민중들을 깨이게 만들어 민중을 토대로 나라 꼴을 바꿔보자는 희망을 가졌었으나 민중 계몽 운동이 그 민중들의 외면으로 처절한 실패로 끝나고 자신이 그토록 타파하고자 했던 [[유교 탈레반]] 정신이 굳건히 뿌리박혀있단걸 깨달은후 조선의 모든것에 환멸했다. 그런데 환멸하고난 뒤에 빨게된게 전쟁광에 무뇌아 투성이인 [[좆본]]이었다는게 함정이라면 함정이다. ㄴ전쟁광에 무뇌아 투성이가 됐단건 2차대전 무렵이고, 그 전만 해도 일본은 떠오르는 아시아의 선진국이자 강대국으로 크게 발전해가며 잘 나갔다. 그냥 2차대전, 그 전까지 하면 중일전쟁 전까진 강력한 열강 중 하나일 뿐이었지 처음부터 힘만 센 독보적인 병신이었던게 아니다. 애초에 당시의 조선은 전근대적인 사상과 전근대적인 법이 난무하던 시절이었고 그에 반면 일본은 철저히 근대화하여 조선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진 나라였다. 사상 면에서도, 국력 면에서도. 일단 선거제도도 애저녁부터 실시하고 있었고 나중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칭할 정도로 유해졌던 적도 있었고 하니깐. 말로가 병신이라고 처음부터 병신은 아니다. ㄴ 유언이 "모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삼가라"였다. 좆본 지지한거에 나중에라도 후회한거다. '''윤치호'''는 [[친일파]]이자 계몽운동가이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며 초기 한국 YMCA수장이다. ㄴ반미일뽕이면 씨발새끼아니냐? 유학이후 귀국하여 독립협회 창설과 활동에 열의를 다해 행하며 민권, 평등, 민주주의를 외치며 대중들의 계몽에 힘썼다. 그러나 고종에게 독립협회의 [[민권]], [[평등]], [[민주주의]] 계몽은 황권강화에 해가 된다고 판단되어 강제로 해체당하고 당시의 일부 지식인들을 제외한 일반 민중들은 윤치호의 민권, 평등, 민주주의 계몽은 외면받으면 다행이고, 불충한 놈, 서양 오랑캐와 내통하는 놈, 우리의 전통을 폄하하는 놈 등등등으로 불리며 실패했다. 이 일 이후로 윤치호는 조선 조정은 물론, 민중(민족)들한테까지도 깊은 혐오감과 좌절감을 가지게 된다. 고종이야 어쨌건 민중들이 그의 말을 이해못한건 어찌보면 당연한게 당시 민중들의 절대다수는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일만한 지식이 없었단 거였다. 간단히 말해 현대의 초중고 교육받은 놈들도 민주주의나 평등 등을 잘못 이해하는 놈들 많은판에 하물며 당시 공자맹자 [[유교]]사상이 뿌리박혀있고 그게 일상이며 평생 받은 교육이었단 사람들 앞에서 평등과, 민주주의, 민권, 참정권 등을 말해본대봐야 이해 자체를 하지도 못하고 거부감만 사기 십상이었던 것. 낙후된 조선인민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을 꽤 기울였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의 이니셔티브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행했다. 그래도 진지하게 노력을 기울였기에 해방 후에도 좆본과 좆선 사이의 양다리 컨셉종자라 욕 먹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마치 독립이전 영국 치하의 아메리카 식민주 대표처럼 행동했다는 것이다. 총독부의 역대 총독들과도 친해서 그의 일기를 보면 수시로 총독부에 초빙되어 자문을 하기도 하고, 어폐류 선물셋트도 자주 받아먹었다. 조선 민족주의자들과도 친했다. 친한걸 넘어서 개헬본좆국한테 코우동먹일려다가 이양반이 신원보증해줘서 살린 독립운동가들이 아주 많다. 특히 [[수양동우회]]쪽과 [[흥업구락부]]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얘가 신원보증해준덕에 석방됬을정도. 즉 식민본국과 식민지민들 사이의 중재자였다. 좋게 말하면 냉철한 식민지 민족지도자이나, 나쁘게 말하면 오체불만족 무사안일주의자이다. 일기 전반이 자학과 현실혐오로 도배되있는거 보면 염세주의적 면모도 강해보인다. '''조선인은 태생이 글러먹은 민족이라 보고 조선의 미래를 대단히 비관적으로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말이 대부분 맞았다는거.''' 헬잘알 지못미. 조선인을 비판하면서도 학교 설립 부지를 기부하거나, 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하거나 독립운동단체를 후원하거나 비밀을 지키는 등 나름 애정을 보인 인물...이 아니라 개인적인 자비에 가까웠다. 이 인간의 생애가 워낙 뒤틀려있기도 하지만... 물론 윤치호 집안의 막대한 재산은 그의 할아버지 윤취동이 마련한 것이다. [[이완용]]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윤치호의 증조부 윤득실은 통덕랑이라는 말단 벼슬을 지냈지만 술을 좋아하다가 38살에 요절했다. [https://ko.wikiquote.org/wiki/%EC%9C%A4%EC%B9%98%ED%98%B8 윤치호 어록] 여담으로 이완용은 앞으로 미국의 시대가 될것이니 자식들에게 영어를 익혀두라고 유언했다지만 ㄴ 영어를 익혀두라고 한게 아니라 미국 편에 서라고 유언했다. 윤치호는 일본이 이길줄 알았다가 광복을 맞고 말년에 [[데꿀멍]]을 하게되었다. 웃기게도 이 인간은 19세기 말에 미국 유학을 다녀왔던 사람이다. 당시라면 미국이 세계 최강은 아니어도 손가락 안에 꼽을만한 열강이었는데도 그 발전상을 나이 들어서 다 까드셨는지 아니면 일뽕을 치사량만큼 쳐드셨는지 전쟁이 시작된 이후 친일활동이 급증한다. ㄴ 윤치호는 미국 유학갔을때 당한 인종차별으로 일뽕에 심취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참정권을 주겠다고 하고 1940년부터 계속 일본정부에 참정권을 달라고 하니까 거기에 마음이 약해졌는지 모른다. [[백낙준]], 소설가 [[김동성]] 등은 윤치호가 명의를 도용당한 것이라고 했다. 김을한이 쓴 윤치호 평전에는 윤치호가 한번은 징병 독려 연설에서 내가 와서 뭔 말이라도 하려고 온 줄 알지만 나는 할말은 없다. 다만 총독부가 올라와서 연설하라 해서 올라왔을 뿐이다. 라고 짧게 말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하와이를 기습한 것을 보면서 일본이 망할 지도 모른다며 몸을 조심하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ㄴ[[김을한]], [[백낙준]] 등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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