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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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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진실}} 이 문서의 적지 않은 부분을 211.208.16.71이란 놈이 편집했는데 위백 탄금대 전투 문서 보니까 개소리 지껄이면서 주작질을 시도하다가 참교육 당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B%A1%A0:%EC%B6%A9%EC%A3%BC_%ED%83%84%EA%B8%88%EB%8C%80_%EC%A0%84%ED%88%AC#%EB%AC%B4%EC%8A%A8_%EC%A1%B0%EC%84%A0%EA%B5%B0%EC%9D%B4_8%EB%A7%8C%EC%9D%B4%EB%9D%BC%EB%8A%94_%EA%B1%B4%EA%B0%80%EC%9A%94%3E? 위백에서 참교육 당한 현장]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1064710&page=1 역갤에서 주작과 선동] {{고인드립허용}} {{고인}} {{전알못}} {{똥별}} {{거품}} {{실망}} '''졸장(拙將)''' 적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주변에서 왜적에 대한 정보를 주어도 적을 과소평과하면서 얕보다가 제대로 얻어맞았다. 임진왜란이 장기화되고 전국적으로 피해가 커진 것에는 이 새끼의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신립이 충주로 데려간 군사들의 숫자=== 신립은 체찰사 유성룡에게 장교 80명을 받았다. 장교 한 명 당 군사를 100명씩 인솔한다. 당시 서울 한성부에는 잡색군(민방위)으로 '8만 명'이 있었다. #활 잘 쏘는 대(大), 소(小) 한량인 기마병 8천 명(삼의사 장부에 이름을 올려놓고 군대 면제를 받고 있었다.) #(한량의) 개인노비 8천 명 #(한량에게) 보인종자로 지급된 시정방리인 1만 6천 명 #도성 궁가에 남아서 수비대로 남을 4500 + 2500명(서울 아전, 악공 악생, 장애인, 노약자, 병자) (한량에게 면포를 바치는 자들) #서울 도성 각사 노비(서울 도성 관청 노비) 3만 명(결채하는 자들) #도성 인근 고을 8천 명의 시정악동 이중 4, 5번만 빼고 전부 충주로 데려가고 5번은 군량 수송대로 삼았다. 신립은 이 병력의 질을 믿지 않아서 추가로 궁궐호위군 2천(도성무사재관)을 받았는데 이들은 상번하는 군사 2천에게 고용된 대립인들이었다. 신립은 항상 직속철기 500을 데리고 다녔는데 이것은 「고대일록」, 「선조수정실록」에서도 나온다. 결국 신립과 작전의 호흡을 같이 맞출 군사는 500명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계갑일록」을 보면 1, 2, 3, 5번 항목은 니탕개의 난 당시 북방으로 출정한 경력이 있는 병력들이다. 니탕개의 난 당시 서울의 한량인 8천 명은 조방장들이 이끄는 80명 용사들을 따라 북방으로 출정했다. 한량인 8천에게 말, 면포를 조공으로 바치고 출정을 면제 받는 면제보인 8천 명, 함께 뒤따라가는 종군종자보인 8천 + 8천을 서울 시정방리인 중에서 뽑았다. 한량은 당시엔 신라의 화랑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후에 니탕개의 난이 더 위급해지자 율곡 이이는 서울에서 활 잘 쏘는 사람으로 1만 명을 더 뽑았다.(「율곡전서」 행장) 이때 서울 5부 각방의 향도들이 이곳 저곳을 뒤지며 활을 당길 수 있는 사람들을 뽑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병조의 색리들은 한 사람 당 면포 5~6필을 내야만 징병 면제를 해주겠다고 발표했는데 노비든 백성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뽑게 했다. 이때 이이는 병력의 양보단 질을 우선시했다. 그래서 전투 말을 사서 바치는 자는 면제해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순식간에 구름처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전투 말 1만 여 마리가 모였다. 이이는 이때 활을 잘 쏘는 사람 1만 명을 뽑았지만 이중에서 활 잘 쏘는 실력을 상, 중, 하로 나누어서 200명만 장교로 뽑고 그들에게 보인을 주고 나머지는 예비대로 삼았다. 200명 장교들은 먼저 선발대로 북방으로 출정했다. 뒤따라 출정할 부대를 뽑는데 전투 말도, 면포도 바칠 능력이 없는 불쌍한 서울 도성 방리시정 백성들은 활을 못쏨에도 전부 북방의 전쟁터로 끌려가 서울 시내가 쓸쓸하게 텅텅 비었고 결채하는 도성 관청 노비들도 백성들의 탈영을 감시할 보인들로 붙여져 우글우글 끌려갔다. 「고대일록」을 보면 신립의 정예병 500명이 충주 강물에 빠져 익사했다고 나온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신립이 평소 직속 철기 500명을 거느리고 치돌을 즐겨했다고 나온다. 「상촌집」에서는 신립이 탄금대 전투 때 철기 500을 거느리고 단월역 인근 평원 광야에서 치돌하다가 전부 죽었다고 나온다. 어떤 모습의 철기였을까? ===이일의 병력 징집 장면=== 이일이 경상도순변사가 되어 경상도로 가려하는데. 기마장교 40명, 궁수장교 20명을 비변사에서 받았다. 그리고 도성의 금군 300명을 호위병으로 데려가려고 하는데 군적을 보니까 유생, 역관들이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병역 비리의 끔찍한 현장을 본 이일은 한숨을 쉬었고 유생과 역관들은 안 끌려가려고 지랄을 하다가 결국 별장 유옥에게 전부 끌려갔다. 이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던 게 별장 유옥의 장교들이 집들을 일일이 뒤지며 숨은 유생, 역관들을 끌고 가는데 시간이 걸렸다. 유생, 역관들은 하도 기생에게 돈을 탕진해서 말도 못 타고 노비들과 함께 걸어갔다. 그때 이일은 먼저 기마장교, 궁수장교 60명과 함께 도성을 출발해 경기 감영을 지나며 금군 300명을 호위할 조례(서울아전) 4천 명을 호위병으로 징집했다. 이때 호위병들의 짐을 싣고 같이 가줄 보인들도 하나씩 뽑았다. 그렇게 해서 병력이 8천 300명 이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렇게 상주로 내려갔는데 문경을 지나면서 곡식 창고를 다 털었다. 그리고 상주에 도착했는데 이일은 함께 온 귀족 종사관 2명과 함께 상주 읍성 북쪽 시냇가 북천으로 상주의 민병 800명과 상주에 모인 경상도 장사 2천 명을 데려와서 자기가 데려온 조례병 4000명, 보인종자 4000명, 장교 60명, 금군 300명과 합체시켜 전투병 6000명 이상, 보인종자 6000명이 된다. 4월 25일 충청도 조령을 방어하는 방어사 겸 조방장 변기와 종사관 1명이 충청도군현병 8천 명을 이끌고 이일을 후원하러 상주로 와서 이일과 합류했는데 이들 중에서 민병 800명만 북천 시냇가에서 진법 훈련을 시키는 척하며 왜군의 밥으로 내어준 후 나머지 군사는 전부 뒤편 숲 속을 통해서 변기의 도움 하에 무사히 퇴각한다. 같은 날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때 상주에서 이일 변기의 연합군 병력 2만 명을 만났는데. 이 2만 중 1천 명만 격파하고 나머지는 놓친다. 이일이 떨어뜨리고 간 역관 1명이 고니시 유키나가를 만나서 조선 조정이 4월 28일 충주에서 항복하기로 했으니까 어서 오라고 유인한다. 이일과 변기는 함께 총병력 2만 명을 이끌고 조령을 지나 단월역 근방으로 오던 중에 급히 오는 신립 김여물과 만나서 급히 '조령작전회의'를 연다. 웃기는 건 이일이 신립에게 왜군에 대한 보고를 했다는 내용이다. 이일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졸장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인용문|왜군은 무조건 신병(神兵)입니다. 그냥 '''무조건 졸라 짱 셉니다.'''}} 이런 멍청한 발언을 보고라고 한 것이다. 참 영양가가 없어도 너무 없다. 일단 명장이기는 하다. ㄴ 맹장으론 칠 수 있어도 명장은 무리는 아닌가 싶다. 하지만 기병 하나만 다룰 줄 알지 다른 건 그냥 평타 수준. 그러나 평화 속에서 병신이 되어있던 당시의 헬조선에서 기병이나마 명장급으로 다뤄줬던 신립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큰 유산이었다. [[이일]]이나 [[원균]] 같은 새끼를 봐라. ㄴ 김시민, 이순신 전부 백의종군 경험이 달린 걸 보면 그냥 그 새끼들이 병신인 거다. 극소수의 기병대로 5배 이상 되는 니탕개의 난을 기병으로 진압했을 때는 선조가 직접 신립에게 곤룡포를 입혀줄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받기까지 했다. 자기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존나 강해서 [[류성룡]]이 대조총전술에 대한 연구를 하라고 신립에게 숙제를 내줬으나 신립은 류성룡을 비웃었다. 물론 이해가 가기는 한다. 지금으로 비유하면 꼴에 공부라고 한 건 [[행정고시]] 합격이 전부인 책상 공무원 새끼가 [[육군사관학교]]에서 4년간 모질게 구른 뒤, 초군반 고군반 다 거치고 육군대학 등을 다 거친 육군참모총장한테 전술에 대해 야부리 터는 꼴이니까. 그리고 당시 조총은 위력 자체는 강했다. 그러나 쿨타임 역시 무지하게 길다. 화약 가루 넣기 → 쇠구슬 넣기 → 심지 박기 → 부싯돌 긁기 → 조준하기 순으로 쏘는 조총이 활에 비해 쏘는 시간이 말도 안 되게 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군은 3단 철포사격법을 개발해서 이 미친 쿨타임을 극복하는 것에 성공했는데 신립은 그걸 몰랐던 것이다. 역시 [[장거한]]으로는 [[백팔식 어둠쫓기]]를 상대하기 힘든 것이다. 닥돌왕 신립에게 이런 걸 극복하길 바라지 말자. 무릇 인재는 그 용도에 맞게 써야 하는 법이다. 아무튼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선두타자 이일이 좆본군한테 털리자 그다음 타자로 파견되었다. 이때 신립의 절친인 선조가 자신의 직속 호위부대와 자신의 명검인 상방검까지 쥐어주며 신립에게 홈런 치고 와달라고 당부했...지만 신립은 충주에 도착하자 새재가 아닌 탄금대로 내려가서 싸웠다. 그 결과 신립의 조선군은 벌집핏자가 되었다. 내야뜬공 시발아 빼타 아웃. 그 덕분에 근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개병신 쓰레기 공갈 명장 취급이나 받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어느 정도 이해되기는 한다. 일단 가장 잘 다루는 병과가 기병인데다가 기병이 주력인 북방에서 싸웠던 터라 일본군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다. 둘째로 새재에서 싸우려고 하면 왜군이 딴 지방으로 돌아가서 한양을 조지면 그만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신립은 조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끌고 온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자신이 뚫리면 그 뒤는 변변한 방어 병력도 없는 무주공산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로선 어떻게든 여기서 일본군을 격파하거나 최소한 붙들어 놓기라도 해야 했다. ㄴ 그 말대로면 쪽바리들이 굳이 문경을 통과하려고 했겠냐? 지금 기준으로 봐도 새재 외에는 사실상 길이 없다시피 한 곳이다. 셋째로 조총이라는 무기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조총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약점인 장전 시간 동안서 달려가 짓밟아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당시 일본군은 [[전국시대|열도 내에서 집안 싸움]]으로 조총의 운용과 관련 전술로는 거의 만렙을 찍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걸 몰랐다. 먼저 개털려본 이일이 난생 처음 접해본 적의 전술에 대해 얘길 해 줬으면 몰랐겠으나(아마 말해줬어도 걍 씹었겠지만) 이걸 모르고 그냥 기병을 돌진시켰으니... 제일 큰 문제는 당시 신립이 한양 경군까지 다 빼서 동원한 병력이 최대치로 잡아도 8천 명이 안 되는데, 고니시의 본대가 끌고 온 병력은 최소한으로 보아도 이것보다 1.5배 이상의 수치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질적으로도 상대조차 안되는데 양까지 밀렸다는 소리다. ㄴ 문경새재는 행주산성, 진주성과 비교가 안되는 천해의 요새다. 신립의 패배는 마속의 등산이나 비슷한 삽질이다. 그 외로 김여물과는 2대에 걸쳐 친구 지간이었는데 여기서는 신립이 주장, 김여물이 부장이었으나 능양 반정 때는 김류(김여물의 아들)가 주장, 신경진(신립의 아들)이 부장이었다. {{인용문|혹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지극히 성대하니 그 예봉에 직접 맞서기는 어렵다. 조령에 나아가 협곡 안에 군사를 매복하고 적이 골짜기 입구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가 양 쪽 언덕에 의거하여 높은 곳에서 활을 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하였으나, 신립은 말하기를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鐵騎)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 신흠, 상촌집, 제장사난초함패지}} 이것만 봐도 이새끼의 마인드를 알수있다. 그냥 평지에서 기병이란 생각뿐이지 전략이고 뭐고 없다. 탄금대로 간 이유도 뻔하다 그나마 평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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