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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 {{인용문|학살에는 귀신, 전투에는 등신|부하와 동기들의 평}}<br> {{인용문|부하에게 가혹하였고 전투에 비겁했던, 전술적 두뇌가 없었고 부하 장병들로부터 원성이 높았다.|미국 군사고문의 보고}} '''한국의 [[기무라 헤이타로]]''' [[신성모]]를 훨씬 능가하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악의 군인이다. 아니 솔까 신성모에 빗대는 것도 신성모에 대한 고인드립이다. 하다못해 신성모와 [[최덕신]]은 독립운동가 출신이기라도 하지 이새끼는 좆본군 출신이다. 좆본군 입대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일본군]]에 '''자원 입대'''하여 좆본육군 하사관으로 들어갔다. 이 새끼는 1940년대 [[필리핀]], [[파푸아뉴기니|뉴기니]]전선에서 군복무를 했다. 이 전선은 [[미군|갓조국 군머]]와 [[호주군]]이 으쌰으쌰해서 피터지게 [[좆본군]]을 탈탈 털어버린 곳으로, 이곳의 좆본군은 [[원숭이]] 고기와 [[인육]]을 먹으면서까지 동원하면서 싸웠다. 근데 이 새끼는 이 전선에서 악마가 되어 살아남았고 뒤질 때까지 인육 먹고 버틴 것을 자랑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해방직후 [[대한민국 국군]]에 들어왔는데 [[만주군]]과 [[친일파]]출신이 드글드글했던 당시 국군에서도 "이건 사람 새끼도 아니다."라는 악평을 듣고 짤렸다가 복직하기를 밥 먹듯이 할 정도로 악행이 자자했다. 이건 [[여순사건]] 때 가담자로 지목된 시민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히 [[일본도]]로 [[참수]]해버리고 힘 빠지면 권총으로 죽여버렸다. 근데 이걸 또 [[미군]]에게 자랑을 했다. 당연히 이 자랑을 들은 미군은 '악마 새끼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충격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미고문관을 두들겨 팬 죄로 군머에 짤려 경찰로 찌그러지게 되었다. 1949년 5월, [[북괴]]의 숨은 남파[[간첩]] [[신성모]]의 추천을 받아 계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6.25 전쟁]] 초창기에는 3사단 23연대 연대장(중령)으로 있었는데 북괴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이 23연대가 동해안으로 배치되면서 이 새끼의 군사적 재능이 얼마나 엠창인지 드러난다. 동해안으로 내려온 북괴군은 [[중공군]] 164사단이 북괴로 위장한 정예 5사단, 그리고 예비사단인 12사단으로 1개연대가 2개 사단을 막는 것 자체가 중과부적인 건 인정한다. 이 새끼는 어떻게든 북괴군의 공격을 몸빵으로 막아내면서 영덕 - 봉화까지 후퇴했고 7월 19일부터 미친 듯한 고지전을 치르게 된다. 근데 7월 25일 [[이준식]] 3사단장(준장)이 봉화 181고지를 탈환하라고 해서 탈환했는데... 문제의 23연대가 181고지를 털렸다는 이유로 소대장과 사병 1명을 즉결처분했던 것. 심지어 이 새끼가 7월 25일 밤에 미군 전초기지에서 총질하고 자기 부하들에게 [[반자이 어택]]을 강요하고 이를 반대, 우회 공격을 제안한 작전장교(중위)를 보고는 ㅂㄷㅂㄷ거리면서 [[헌병]]들한테 "저 새끼 죽여 빼애액!"거렸으며 작전장교가 헌병 앞에서 총을 꺼내들고 총싸움 직전까지 가게 만들었다. 심지어 미군 군사고문이 보는앞에서 부하를 멋대로 죽이고 개머리판으로 부하를 두들겨 팬 적도 있었다. 결국 씨발년아를 외친 미군은 23연대에서 해임하고 계엄사령관으로 때려박는다. [[거창양민학살사건]]과 [[4딸라]] 협상도 이 씨발롬이 계엄사령관으로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이다. [[거창군]]의 주민들을 몽땅 [[빨갱이]]로 낙인 찍어 양민학살을 자행했고 자기 부하를 [[빨치산]]으로 변장, 진상규명을 하려던 거창군 국회의원과 기자들, 국회조사단원들을 공격하여 방해했다. 참고로 전설의 [[4딸라]]도 이 새끼가 계엄군사령관으로서 부산에 있었을 때 생긴 에피소드다. 이 사건으로 1951년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3년을 선고 받았지만 우리 [[저승만]]이 바로 특사로 풀어주고 1956년 부정선거에도 관여하여 11대 내무부 치안국장으로 임명되었다. [[4.19 혁명]] 이후 [[임흥순]], [[이익흥]] 등과 함께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의 가담자로 찍혀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참교육을 받았지만 1961년 12월 [[당뇨병]]으로 골골대다가 1964년 1월 30일에 지옥에 떨어지려 했으나 지옥에서도 쫓겨나버려서 [[마계]]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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