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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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1868년 9월 23일 ~ 1909년 9월 20일 (40세)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생애[편집]
1868년 경기도 여주목에서 출생한 양반가의 자제로 1896년 초반 을미의병전쟁에 의병으로 참전했다. 자신의 논밭을 전부 팔아서 무기를 구입했고 덕분에 자신은 가난해졌지만 독립운동을 하기에는 충분한 무기들을 얻었다.
1907년 8월 의병장 이은찬이 정미의병전쟁 참전을 권유하고 9월 2일에 의거했다.
얼마 뒤 관동 지방으로 이주해 13도 창의군의 전신인 관동창의군을 창군했다. 그리고 한성 진격을 위한 군사력 보강 끝에 10월에 13도 창의대장 직에 올랐다.
그리고 삼산 전투, 마전 전투 등에서 싸우며 서울로 진공하려는 작전을 펼쳤지만 의병들의 의견차가 심해 명령 체계가 부족해졌고 병력마저 부족해진 데다 이인영의 부친상까지 일어나 허위에게 대장 직을 물려주고 3년상을 치르기 위해 귀향했다.
1909년 6월 체포되었으며 안중근 의사와 비슷하게 다 나 혼자 한 일이니 나를 죽여라! 라는 간지나는 유언을 남겼고 교수형을 언도받아 9월 20일에 순국했다.
기타[편집]
1895년부터 1907년까지 의병전쟁에 몸담아 거의 인생의 30%를 의병전쟁에 썼으며 자기 재산까지 팔아 독립에 힘쓴 사람이지만 우리 교과서에서는 말년에 부친상을 위해 떠난 것만 강조되어서 나라를 배신한 역적처럼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매국이라 까는건 문제지만 효를 너무 중시해서 부친상을 3년상을 풀세트로 치른게 문제다. 의병의 한계 자체가 성리학에 사로잡혔다는 점이 크다는 점이 욕먹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