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오사카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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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로 천하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행한 뒷정리. 흔히 겨울의 진과 여름의 진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를 열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일본의 3분의 2는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심을 가진 도요토미 가신 출신 다이묘들의 손아귀에 있었고 도쿠가와 세력이 장악한 건 겨우 3분의 1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도요토미 가문이 오사카 65만석의 다이묘로 전락했다고는 하나, 그 위광은 여전히 이에야스를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조정의 쿠게들과 다른 다이묘들도 새해를 맞아 오사카 성에 문안인사를 올리러 갈 정도였으니. 또한 이에야스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73살의 고령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23살의 창창한 나이였다.

이에야스는 능구렁이 너구리답게 화전양면전술을 사용한다. 아들 히데타다의 딸인 센히메를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내 화평무드를 조성해놓는가하면, 히데요시의 정실인 코다이인을 통해 신하의 예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히데요리 측은 거절했고 양측은 신경전을 벌였다.

1611년 이에야스는 교토로 상경하여 히데요리와의 회견을 요구했고,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회견은 이루어졌다. (이 때 역할을 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상썩은 이유로 사망한다)한편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주변 다이묘들을 압박하여 오사카를 포위하는 형세를 짜기 시작했으며 공성전을 위해 대포를 사들였다.

그리고 천하보청이라는 명목으로 도요토미 측에 각종 절과 신사의 개축을 요구했다. 이는 도요토미 가문의 부를 줄이기 위한 수작이었는데 이 때 문제가 터진다. 1614년, 교토의 호코지 대불전이 완공되고 범종도 완성되었다. 근데 이 범종에 새겨져 있던 문구인 국가안강 군신풍락(國家安康 君臣豊樂, 국가는 편안하고 임금과 신하는 풍요롭고 즐겁다)을 이리저리 꼬아서 이에야스를 저주하고 도요토미의 부흥을 꾀한다는 속이 뻔이 보이는 개드립을 쳐서 전쟁 명분을 만든다. 도요토미 측에서는 이에 전쟁 준비를 하게 되고, 회의를 요청하나 다음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조건만 듣고 왔다.

1. 히데요리가 직접 에도로 와서 이에야스를 알현할 것. (한마디로 무릎 꾾으라는 소리)
2. 인질로 요도도노를 보낼 것
3. 이에야스의 지시에 따라 다른 곳으로 이봉할 것

이 중 하나를 고르라는 거였는데, 들어주는 놈이 미친놈 소리를 듣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여담으로, 호코지의 저 종명은 흰칠만 된채 오늘날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즉 애시당초 종명따위는 그냥 떡밥에 불과했다는 소리.


겨울의 진[편집]

전쟁 분위기가 되자 이에야스는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명해 20만의 대군을 끌어모은 반면, 도요토미측은 아무 지원도 얻지 못했다. 그나마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오사카 성에 있던 자기 소유의 군량 8만석을 가져다가 쓰는 걸 묵인한 정도에 불과했고 그것으로도 이에야스에게 찍혀서 오사카의 진 이후로 개역당한다.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히데요리의 사자에게 '니네 대장이 요도도노잖아.'라고 말하고는 지원을 거부했다. 이에 도요토미 측은 돈을 풀어 10만의 낭인들을 끌어모았다. 이들은 대다수가 세키가하라 전투 때 서군 측에 섰다가 몰락한 이들로, 이에야스에 대한 불만이 굉장히 커서 적극적으로 참전했다. 여름의 진때도 거의 다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이들 중 오사카의 진으로 이름을 남겼던 5인의 낭인들을 오사카 5인중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다.

- 사나다 유키무라 : 본명 노부시게. 군략으로 유명힌 사나다 마사유키의 둘째 아들. 겨울의 진 때 사나다마루로, 여름의 진 때 본진 돌격으로 이에야스에게 빅엿을 두번 먹였다.
- 모리 카츠나가 : 유키무라와 함께 여름의 진 때 이에야스의 본진을 향한 매서운 돌격으로 유명하다.
- 아카시 테루즈미 :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 히데이에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몰락하여 하치죠시마로 유배된 후 낭인으로 살다가 모집에 응해 오사카로 입성했다. 크리스천이었다. 인명에 잘 안쓰는 한자를 이름으로 써서 읽는 법이 매체마다 다르다.
- 고토 마타베에 : 구로다 가문 소속 인물. 구로다 칸베에 아래에서는 인정받고 좋은 대우를 받았으나, 그의 아들인 구로다 나가마사와는 심한 충돌로 인해 출분하여 낭인이 되었다.
- 쵸소카베 모리치카 :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차남. 세키가하라 전투의 결과 개역당해 낭인이 되었고 이름을 타이간 유우무로 바꾸고 서당의 훈장 노릇을 했다. 5인중 중 유일한 다이묘 출신.

이들 낭인들은 전투에는 이골이 난 이들이었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오사카 수뇌부들이었다. 특히 히데요리 엄마인 요도도노와, 그녀의 젖형제인 오노 하루나가가 실권을 잡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들이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병진들이었다는 것. 낭인들의 계책은 올리기만 하면 씹히기 일쑤였고, 특히 유키무라가 강력하게 주장했던 히데요리의 친정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건 요도도노가 눈에 불을 켜고 반대했다) 결론은 선제공격도 아닌 농성전이었다.

당시 오사카 성의 방어력은 최고 수준이었다. 장기간의 농성전을 대비해 식량도 시세보다 높은 값을 주고 전부 사들였고, 오사카 성의 바탕이었던 이시야마혼간지부터가 노부나가를 상대로 10년이나 버틴 질긴 성이었다. 서쪽은 바다고 동쪽은 강으로 둘러쌓여 있고 성 외각은 폭 30m, 깊이 11m의 해자가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성의 남동쪽은 계곡을 이용한 방어라 취약했는데, 유키무라가 이걸 보완하기 위해 외성인 사나다마루를 만든다. 적이 남쪽에서 공격해 올 경우, 사나다마루에서 협공할 의도였는데 이에야스 군은 이 사나다마루에게 제대로 빅엿을 먹는다.

12월 4일, 도쿠가와 측의 마에다 토시츠네와 마츠다이라 타다나오가 선봉으로 오사카 성 남부로 진격해왔다. 유키무라는 평원으로 나아가 이들을 도발한 후, 사나다마루로 유인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단 하루만에 도쿠가와 군은 1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고 도요토미 측은 5천의 병력으로 전설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성벽의 외측은 해자로 인해 접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에야스 군의 공격은 남쪽에 있는 사나다마루에 집중되었다. 여러 번 공격을 받았지만 사나다마루는 끝까지 버텼다. 그러다가 사나다마루 뒤에서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가 터졌는데, 이걸 첩자의 신호로 잘못 안 이에야스 측에 총공격을 했지만 유키무라는 이것도 버텨냈다. 사나다마루 외각의 빈 해자는 시체로 메워질 정도로 격렬했고 양측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나왔다. 도쿠가와 측은 계속 공격을 했지만 함락은 실패했고 지루한 소모전으로 이어졌다. 이에야스 측은 공성전이 이렇게 길어질거라곤 생각도 못했는지 식량과 땔감이 없어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야 했다.

계속 공성전이 늘어지니 이에야스 측은 대포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도요토미 측에도 대포는 있었지만 포신이 나무로 된 장작포라 몇 번 쏘면 포가 박살나는 물건이라 하등 도움이 안 됐다. 계속 떨어지는 대포알에 요도도노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눈 먼 포탄 하나가 천수각에 명중해서 요도도노의 시녀들 중 몇 명이 죽는다. 기록에 의하면 요도도노의 이마빡이 이 때 깨졌다고도 한다.

이렇게 심리전에 걸린 요도도노는 자신이 인질이 되어 전쟁을 멈출려고 까지 하는 희대의 트롤링 마녀가 되고, 화의가 성립된다.

여름의 진[편집]

문제는 화의 내용이었다. 오사카 성 외측의 해자를 메우고,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의 성벽을 허물기로 하는데 오사카 성 수뇌부는 천천히 시간을 끌것을 예상했겠지만 너구리 이에야스는 7만 병력을 투입해 한 달만에 해자를 전부 메우고 성벽을 철거한다. 도요토미 측이 해자를 다시 파자 이를 구실삼아 전쟁이 제기되니 이게 여름의 진이다.

여름의 진은 겨울의 진과는 달리 도요토미 측에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난공불락에 가까웠던 오사카 성은 외측 해자와 사나다마루, 외벽을 잃었기 때문에 벌거벗은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많은 백성들과 로닌들이 오사카 성에서 철수했고 로닌들 중 남은 자들은 5만 5천명이었다.

이에 오인중은 히데요리의 친정을 주문했으나(군주가 직접 나와 싸운다면 사기도 올릴 수 있고 다른 다이묘들의 이반을 유도할 수도 있다. 거기에 히데요리 측에 병력이 집중되는 틈을 노려 본진 털기도 가능하다) 역시나 씹혔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사카의 외성이었던 후시미 성을 기습공격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이것도 씹혔다. (....)

유키무라는 별 수 없이 겨울의 진 때 이에야스가 본진으로 썼던 차우스산(茶臼山)의 요새를 재활용해 제2의 사나다마루를 만들었다. 모리 카츠나가, 고토 마타베에와 함꼐 사나다마루에 이에야사의 주력 병력을 묶어두는 동안 본진을 기습공격하는 작전이었는데 고토 마타베에가 오던 도중 이에야스의 병력과 마주쳐 먼저 교전하게 되고 전사하면서 틀어진다. 유키무라는 별 수 없이 차우스산에서 나오는데 기마철포부대를 이끌고 있던 다테 마사무네와 싸우게 된다. 이 때 유키무라는 총에 맞기 않도록 병사들을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가 적이 접근하면 창으로 찌르는 야리부스마(槍衾)작전으로 기마철포대를 격퇴한다.

한편 나머지 오인중인 쵸소카베 모리치카와 키무라 시게나리는 유키무라를 지원하기 위해 오던 중 야오, 와카에 인근에서 도도 다카토라, 이이 나오타카의 부대와 싸움을 벌이게 된다.(야오-와카에 전투) 이 때 모리치카와 시게나리는 도도 군을 거의 전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지만 이이 나오타카의 부대가 원군으로 도착하는 바람에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여 모리치카는 패주하고 시게나리는 전사했다.

유키무라와 모리 카츠나가는 이에야스를 죽여서 한 방 역전을 노리기로 하고 이에야스의 본진을 급습한다. 카츠나가 측이 적 병력을 상대하는 동안 유키무라의 병력이 본진을 3번 급습했는데 이에야스의 흑역사였던 미타카가하라 전투 이후 이에야스이 최대 위기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매서운 돌격이었지만 병력 수가 딸려 결국은 실패한다. 유키무라는 부상자 치료와 휴식을 위해 병력을 텐노지 인근으로 물렸는데, 그 때 기습을 받아 전사한다.

마침내 오사카 성의 성문이 뚫렸고 치열한 시가전 끝에 오사카 성은 함락되고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자결했다. (모리 카츠나가는 이 때 가이샤쿠를 한 후 자결) 이렇게 오사카의 진은 이에야스 측의 승리로 종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