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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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최남단에 자리잡은 베트남 황가들의 역사를 한 번 다뤄보자.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과목에 어거지로 넣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뭐 일단은 한자문화권이니 그러려니 하자.
요약하자면 웬 남방민족이 인도차이나 반도 북부에서 한자물 좀 먹었다고 설치다가 중세까지 짱깨새끼들 육노예로 살다가 독립하고 인도차이나 남부에서 힌두교 경전 외우는 어중이 떠중이들 강간하다 바게트놈들 육노예로 지내고 빨갱이가 되는 역사다.
홍방씨(Họ Hồng Bàng)[편집]
짱깨 신화의 신 신농씨의 3대손 제명에게는 녹속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녹속은 베트남으로 가서 적귀국을 세우고 초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녹속의 아들 낙룡군(락롱꾸언)은 아들 100명[1] 을 낳은 후 마누라랑 반띵해서 50명을 바다로 데리고 간다. 마누라랑 50명의 아이들은 산에 남았는데 이 50명 중 가장 쎈놈이 문랑을 건국해 초대 웅왕(훙 브엉)으로 즉위한다. 여기까지가 벳남 건국신화.
이후 동산문화같은거 만들며 지네끼리 우가우가 거리며 살았다. 사회는 대체로 모계사회였다.
그러다가 낙족들이 타이계 산지인(라오스인들의 조상)들에게 약탈당하기도 했다. 그러면 낙장들이 웅왕에게 SOS를 보냈었다. 이래서 베트남이랑 태국이 사이 안좋은건가?
마지막은 촉가와 외교문제가 생겨 촉가 왕자 촉반(툭판)의 침공으로 좆망했다 카더라.
여담으로 백성들이 문신충이였다.
촉조(Nhà Thục)[편집]
문랑 산간지역 수령의 아들내미인 촉반(툭판)은 문랑(반랑)을 멸망시키고 구족, 낙족과 함께 나라를 건국하여 안양왕(안즈엉브엉)으로 즉위한다.
근데 하필이면 진나라의 진시황이 주도하는 남진정책 때문에 여러 번 줘터지고 패주를 거듭해야 했다. 그래서 도읍을 고평에서 하노이로 옮기고 거기서 고라(코로아)성이라는 소라모양의 성을 건설한다. 베트남과 짱깨새끼들의 기나긴 악연의 서막이 올라가는 셈.
한 편, 남해군 도위 임효는 진나라 좆망시기를 틈타 독립할 계획을 세우다가 병으로 뒈짖한다. 그 뜻을 차기 도위인 용천현 현령 조타(찌에우 다)가 이어받아 독립왕조를 세울 영토를 구하러 군사를 이끌고 안양왕과 맞따이를 깐다.
결국 얀양왕의 딸내미 미주가 지 아들내마 중시한테 빠져 국가기밀을 술술 불어놓아서 어우락왕국은 조타에게 따먹힌다. 물론 안양왕은 자기나라를 작살내는데 일조한 딸년을 미국으로 이민보내줬다. 중시도 뒤를 따랐다.
조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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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베트남이 중뽕을 쳐빨아대던 시기다. 중뽕을 빠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자길 중국이랑 동급으로 여겼다.[2] 수도부터 오늘날의 광저우에 해당하는 번우다.
한고조 유방 시절에는 한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서 한나라의 많은 문물들이 들어왔다. 베트남 문화가 중국식 영향을 많이 받은게 여기서 기인했다. 그러나 유방이 뒤지고 유방 마누라 여후가 한나라의 실권을 잡자 사이가 틀어졌다. 서로 전쟁까지 갔을 정도. 예상을 뒤엎고 조타가 이겼다. 중국 중남지방이랑 복건성 서부까지 따먹었다.
결국 한문제가 다시 육가를 보내서 한나라와의 전쟁은 중단됐다. 그리고 조타가 죽은후 아들 조말(찌에우무오이)이 문제로 즉위하면서 민월족의 반란 등이 일어났고 후대 임금들로 갈수록 나라의 국력이 나날이 쇠퇴하고 설상가상으로 한나라에는 그 무시무시한 한무제가 즉위한다.
제4대 임금 애왕 조흥(찌에우흥)은 한나라 사신 소계와 결탁해서 나라를 몰래 한나라에 팔아넘기려다 승상 여가(라찌아)의 쿠데타로 소계와 함께 죽임을 당했고 한무제는 이를 구실삼아 노박덕과 양복을 지휘관으로 임명한 침공군을 파견한다. 베트남땅은 손쉽게 한나라에 따먹혀 교지(쟈오찌)라는 이름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제1차 북속시기가 도래한다.
여담으로 이걸 베트남사로 볼지 중국사로 볼지 학계에서 논란이 있다고 한다. 이거 홍콩 역사 아닌가?
제1차 북속시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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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첫 식민시대. 한무제는 베트남땅을 일개 나와바리로 전락시킨 후 7개 군을 설치하고 각 군 아래 현을 뒀다. 현에서 낙장들의 지배체제는 그대로 뒀지만 그 위의 군에는 태수가 떡 하니 있었다.
금, 은, 상아, 코끼리, 루비, 진주, 동, 생강, 계피, 대나무, 열대 과일 등의 온갖 특산물들이 착취당해 한나라로 빠져나갔고 한나라 지배층의 잦은 부녀자 겁탈, 가혹한 중세와 노역이 판을 치는데다 부임한 태수들은 석광과 임연을 빼면 죄다 조선총독 같은 개씨발새끼들이었다. 업무의 대부분을 글겅이질로 보내고 배가 부르면 근무지를 이탈했다. 왕망의 반란 시기에는 한나라가 잠깐 종범한 관계로 태수들과 중원 간의 알력 다툼 때문에 중국의 행정력이 베트남에 미치지 못하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마지막 태수 소정이 지방토호였던 락짱의 딸내미 결혼식을 초토화시켜서 기의의 불씨가 일게 되는데........
징여왕(Trưng Nữ Vương)[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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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락짱 가문의 평화로운 결혼식, 소정 개 씨발년 새끼는 반동 세력의 규합이라는 이유로 나는 이 결혼식 반대를 외치며 군사를 보내 결혼식을 초토화시킨다. 신랑 시색(티 삭)과 많은 하객들이 참형에 처해지고 신부 징측은 한나라군에게 윤간을 당한다.
원한에 사무친 징측(쯩짝)은 동생 징이(쯩니)와 함께 병력을 모집해서 한나라와의 항전을 개시한다. 비록 열악한 병력이었지만 항전의지 하나로 교지(쟈오찌), 구진(끄우 쩐), 합포(헤푸), 일남(녓남) 4개 군에서 대규모의 병력들이 이 기의에 가담했고, 징측과 징이 자매의 기의는 마침내 교지군의 중심지를 함락시키고 소정을 몰아냄으로서 한나라의 첫 식민지배를 종식시킨다. 그리고 징측은 징왕으로 즉위하고 베트남만의 독립왕국을 선포하니 이 왕국이 바로 영남이다.
영남은 베트남땅 고유의 문화를 회복하는데 노력했지만....... 문제는 당시 한나라의 황제가 광무제였다.
광무제는 남방의 독립을 좌시하지 않았다. 곧장 복파장군 마원과 3만의 대군을 보내서 영남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고라성에서 패한 후 낭박으로 후퇴했지만 새로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영남을 쳐서 영남군을 격파하고 징측과 징이 자매를 포함한 수천의 영남군을 생포해서 참형에 처한다.
제2차 북속시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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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서 두 번째 식민시대가 시작됐다. 마원은 다시 식민지가 된 베트남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베트남 자체의 지명은 일남(日南)이 되었다. 기존의 낙장과 낙후직을 폐지한 후 대부분의 관리들을 한나라 사람으로 임명했다. 물론 징측과 징이 자매가 죽은 뒤에고 베트남 각지에서 여걸들의 기의가 일어났지만 모두 진압당했다.
하지만 한나라가 내부 분열 크리를 맞이한 관계로 한 조정의 권위가 떨어지고 베트남의 행정이 다시 부패한다. 이 틈을 타서 베트남 각지에 온갖 민란들이 다시 창궐하며 베트남은 개판이 됐다. 심지어 베트남으로 이주한 한나라 사람들도 민란에 동조했다. 여기서 일남군 상림현의 스리 마라가 임읍국의 초대 국왕을 칭하면서 베트남 왕조들의 오랜 숙적 참파가 역사의 무대에 첫 등장을 한다.
오랜 민란들로 씹창난 베트남은 사섭과 그의 일가들이 태수로 부임한 후 점차 회복하여 전보다 성장하는 듯 했으나[3], 한나라가 완전히 종범하고 오태조 손권이 사섭 일가들을 숙청하면서 다시 수렁으로 빠져든다. 이에 조국달과 조씨정 남매가 기의를 일으켜 손권에게 저항했지만 6개월 뒤 진압당한다. 손권이 뒤진 뒤 중국 왕조들이 물갈이되던 와중에도 베트남은 중국의 식민지였지만 내부로는 화교새끼들끼리 자사자리 해먹겠다고 내란을 일으켰다.[4] 입읍은 이 틈을 타서 베트남을 침략했다.
수백년 후 이비를 중심으로 한 화교 + 조숙을 중심으로 한 토착 베트남인 세력의 대규모 난으로 제2차 북속시기는 종결된다.
한나라는 이 일남을 유배지로 사용했는데 낙양에서 13,400리나 이격되어 있어서 엄청 가혹한 유배지였다.
전이조와 조월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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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나라가 베트남을 지배하던 시절, 이비(리 본)는 조숙(찌에우 툭)과 손을 잡고 징측과 징이 자매 이후로 가장 큰 기의를 일으켜 부패한 자사 소자를 쫓아내 전이가를 건국하여 용연을 수도로 정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천득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 그리고 천덕통보를 발행하고 관등제를 모방한 문무백관들을 조직하여 조숙을 태부의 자리에 앉혔다. 전이가는 베트남인과 화교의 결합으로 세워진 첫 왕조라는 점, 이비의 시호 남제가 후대 베트남 황제들이 자신을 칭하는데 쓰였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전이가의 창건 소식을 접한 양무제 소연은 진패선을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전이가를 침공케 한다. 이비는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주연에서 양나라 군대를 공격했지만 패하고 소력강으로 퇴각한다. 이비는 진패선에게 연달아 패하며 가녕에서 굴로로 퇴각하여 거기서 애뢰족(베트남에 거주하던 라오족)과 손을 잡고 전열을 가다듬어 전철호에서 진패선의 양나라 군대와 대치한다. 그런데 갑자기 전철호에서 폭우가 쏟아져 물이 불어나고 이 틈을 타서 진패선은 이비의 함대들을 격침시킨다. 이비는 다시 애뢰족의 지역으로 패주하다 애뢰족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고 수급이 양군으로 보내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비가 죽은 후 머리를 잃은 전이가는 이비의 형 이천보(리찌엔바오)의 지도 아래 전열을 다시 가다듬고 양나라에 반격을 가했지만 진패선에게 역관광 당해 이천보마저 산악지대로 후퇴한다. 이천보가 떠난 전이가 군대의 병권은 조숙의 아들 조광복(찌에우 비엣 브엉)이 이어받았다. 조광복은 진패선과의 오랜 교전을 전개하면서 베트남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 마침 진패선이 본국의 내란을 진압하러 필치 못하게 귀국하자 남아있던 양나라군들은 조광복에게 궤멸당한다.
이후 조광복은 조월왕으로 등극했지만 동시에 산간지대로 망명해있던 이천보가 독자적인 왕국을 건국하여 조월왕과 정통성 문제를 구실삼아 대립한다. 조월왕은 이천보와 그의 사후 차기 국왕으로 즉위한 이불자(리펏뜨)와 홍강 델타 지방에서 접전을 벌여 연달아 승리했지만 이비와의 정을 고려하여 이불자에게 홍강 델타 지방 서쪽의 지배권을 양보했다. 그리고 이불자의 아들을 자신의 사위로 맞아들여 화친을 꾀했으나 훗날 이불자와의 재전쟁에서 대패하고 홍강 어귀에서 투신자살한다.
제3차 북속시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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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월왕을 눌러버린 이불자도 수나라의 명장 유방의 맹공에 투항한다. 이불자에 이어 지네끼리 잘살던 입읍도 유방의 공격을 받고 수많은 금은보화를 약탈당한다. 이 시기 로마나 아랍인 같은 서쪽 나라 사람들이 베트남으로 무역을 많이 왔는데, 수나라인들은 현지에서 글겅이질한 특산물로 교류를 하면서 각종 이득을 독차지했다. 물론 베트남인들에게 몫은 없었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자 태수들은 당나라 조정으로 들어갔다. 베트남을 공짜로 얻은 당나라는 안남도호부를 설치하고 선대 왕조들이 시행했던 착취 및 동화정책을 이어나간다. 식민지배 치고는 베트남인의 사회가 문화가 제일 발달했던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베트남인의 저항은 완강해져만 갔고 매숙란(마이툭로안), 풍흥(풍훙)[5] 등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안남보호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 설상가상으로 도서부 동남아에서 자와인들의 침공을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안남도호부는 베트남의 봉기들을 진압했고 고병 같은 유능한 도독들이 부임하며 당나라가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전국 각지에 절도사들이 활개치면서 베트남은 자주 시기를 되찾아간다.
자주시기[편집]
절도사들이 당나라를 들쑤시고 다닐 무렵, 베트남도 안남도호부에서 청해진도호부로 바뀌고 절도사들이 베트남을 지배했다. 초기에 부임했던 절도사들은 툭하면 현지인들한테 살해나 당하는 실권없는 허수아비들 밖에 없었지만, 곡승유(쿡뜨어주)를 시작으로 곡씨 가문이 절도사직을 해먹으면서 도호부의 권위가 똑바로 서게 된다.
물론 당나라가 망하고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되자 남한의 침공으로 곡씨 가문 또한 좆망한다.
그리고 남한 또한 전설적인 명군 오권(응오꾸엔)에게 참교육을 받고 베트남에서 쫓겨난다.
오조(Nhà Ng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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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독립 왕조.
전오왕 오권은 백등강에서 남한군을 박살내고 오가의 초대 오왕의 자리에 오른다. 수도도 기존의 짱깨들의 식민통치 수도였던 대라성에서 과거 구락왕국(어우락)의 수도였던 고라성으로 옮겼다. 하지만 제도는 중국의 제도를 많이 베꼈다.
전오왕이 병사한 후 권신 양삼가(즈엉땀카)가 잠시동안 왕위를 찬탈하다가 오권의 친아들 오창급(응오쓰엉응업)과 오창문(응오쓰엉반) 형제에게 진압당한다. 이후 두 형제가 공동으로 베트남의 왕이 되어 나라를 통치하다가 둘의 병림픽으로 나라가 쇠약해지고 12사군의 난으로 오가는 멸망한다.
정조(Nhà Đinh)[편집]
베트남 최초의 통일왕조.
위의 12사군의 난을 종식시키고 정가의 초대 황제 자리에 즉위한 정선황 정부령(딘보린)은 국호를 대구월(다이꼬비엣)로 삼고 수도를 화려(호아르)로 정했다. 그리고 태평(타이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채택한다.
정선황은 엄중한 법치제도를 마련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았다. 범죄인들은 호랑이의 먹이가 되거나 궁궐 뜰의 가마솥 안에서 삶아졌다. 국교로는 불교와 도교가 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선황은 권력에 눈이멀은 폐륜아 장남 정련(딘리엔)의 사주를받은 환관인 두석(도틴)에게 암살당한다. 하지만 정련 역시 반대파의 사주로 똑같은 환관인 두석에게 암살당하게된다. 정선황의 차남 정선(딘또안)이 차기 황제로 즉위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대장군 여환(레호안)이 대신 섭정을 지냈다.[6] 이후 각 지방의 내란과 송나라의 침입으로 제국이 존망의 위기해 쳐하자 여환은 아예 정선을 제위에서 끌어내리고 지가 직접 황제 자리를 찬탈한다.
여담으로 진정한 독립 왕조를 오가가 아닌 정가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전여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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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베트남이 갓 독립한 좆소 군주국에서 똥나마의 군사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시기다. 근데 역대 베트남 왕조들 중 가장 독재적인 통치를 펼치기도 했다.
여환은 대행으로 즉위한 후 치열한 전투 끝에 백등강에서 송나라 군대의 침공을 저지하고 송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오만한 송나라 사신이 조약을 맺으러 올때마다 대행은 매번 참교육을 시켜줬다. 송나라와의 전쟁이 끝난 뒤에는 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월인과 점성인과의 대립이 벌어졌다. 대행이 화친을 맺으러 사신을 보내자 점성은 그 사신을 가뒀는데, 이를 빌미로 대행은 베트남 왕조 역사상 최초로 점성을 침략해서 수도인 인드라푸라까지 점령했다. 수많은 점성 백성들이 전여가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됐다. 전쟁에서 패한 점성은 전여가에 굽신거리고 조공을 바쳤다.
국외의 전쟁들을 끝마친 대행은 각지방 토호들의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반란 주모자들을 참형 및 화형에 처했다. 토호들의 모가지가 날아간 영토는 각각 황자들에게 나눠줘서 중앙집권적 지배를 공고히 했다. 그리고 앞으로 반란군 놈의 새끼들이 제국을 들쑤시지 못하도록 정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전체주의적인 법치제도를 마련했다. 작은 실수에도 100대에서 200대까지의 태형을 내렸다.
대행은 장남 여용유가 단명하자 태자를 정하지 못하고 요단강을 건넜다. 때문에 황자들 간에 제위쟁탈전이 벌어졌고 대행이 태자로 정할 예정이었던 여용월이 중종으로 잠깐이나마 즉위하다 여용정에게 암살됐다.
여용정은 와조로 즉위하여 폭정을 펼쳤다. 죄인들을 호랑이나 악어 먹이로 던지거나 화형에 처하고 강물에 빠트려 죽이는 등 온갖 살육을 저지르고 주지육림에 찌들었다. 불교도 정통 인도식 불교를 억압하고 지멋대로 송나라식 불교를 찬양했다. 광악 등의 승려들이 와조에 저항했지만 칼로 이마를 베이는 고문을 받았다. 정사도 대부분 침대에 누워서 봤다. 오죽하면 시호가 와조일까. 와조는 그렇게 평생을 침대에서 드러누워 살다 치질로 요절한다.
와조의 죽음으로 제국의 머가리가 종범하자 당시 명망있던 좌친위전전지휘사 이공온이 새 황제로 추대되어 전여가는 멸망한다.
이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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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역사상 최장기집권 왕조. 그야말로 북베트남 민족의 국가, 문화, 정체성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큰 뿌리이며 북베트남을 인도차이나 패권국의 대열로 올려놨던 왕조이다.
이가 초대 황제 태조 이공온은 제위에 오른 후 수도를 화려에서 고라성으로 천도한다. 태조가 고라성으로 천도하러 하롱베이를 건너던 도중 거기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전설 이후 태조는 고라성의 이름을 승룡으로 바꿨다고 한다.
태조는 와조의 폭정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각 계층들의 통합을 실시했고 여기서 생겨난 전통문화는 현대 베트남에까지 고스란히 이어진다. 태조가 디진 후에도 태종과 성종, 인종이 성치시기를 펼치며 제국의 위엄을 떨치고 위아래옆으로 깝쭉대는 송나라와 애뢰, 점성을 참교육 시킨다. 특히 성종조부터 베트남 역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호 대월이 나왔고 인종조에 베트남 최초의 과거시험이 실시됐으며 최초로 중국땅을 침략하는 패기를 시전한다.
인종이 죽은 뒤로 이가는 조정의 부패, 각종 자연재해, 소수민족 및 토호들의 반란, 크메르 제국과 점성의 침략 등으로 점차 국력이 소모된다. 고종조에 이르러 백성들의 불만은 폭발하고 예안 관리 범유의 난으로 조정이 전복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당시 해상 세력으로 자리잡던 진씨일가가 범유의 난을 진정한 덕분에 제국은 다시 안정되고 진씨일가는 외척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후대 황제들로 갈수록 진씨일가는 조정을 점점 장악해나갔고 진씨일가에서 며느리로 있었던 황녀 이천형이 마지막 여제 소황으로 즉위하자 이가 황족들 대부분은 진씨일가들에게 싸그리 숙청당한다.
결국 소황도 남편 진경에게 제위를 물려줬다. 이로서 이가가 망하고 진가가 시작된다.
진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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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 진수도와 그의 조카 태종 진경에 의해 창건된 진가는 이가 말기에 벌어진 폐단들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제국은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아갔다.
얘네는 특이하게 근친혼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다. 그때문에 제국의 주요 관직들 대부분을 황족들이 독점하는 족벌정치가 이뤄졌다. 또 전임 황제가 후임 황제 뒤에서 태상황으로 군림하며 실권을 휘두르는 베트남사 최초의 태상황 제도가 생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기나긴 몽월전쟁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순식간에 수도 승룡이 몽골군에게 점령되는 등 패배를 거듭했지만 진흥도 장군의 청야전술 및 유격전을 병행한 전술, 오랜 숙적인 애뢰와 점성의 협력으로 3차례의 몽월전쟁은 백등강에서 몽골군의 완패로 끝난다.
몽월전쟁에서 승리한 진가는 동맹이었던 점성과의 대립으로 월점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황폐화된다. 처음에는 점성에 여러번 승리하여 사실상 점성을 자신의 속국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포 비나수오르가 점성의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역으로 진가가 점성에게 털리게 된다. 승룡은 점성에게 넘어가고 황제 예종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군대를 이끌고 점성으로 쳐들어갔다 전사했다.
이렇게 진가를 탈탈 털어대며 강력한 위세를 떨치던 점성왕국의 전성기는 여계리 장군이 황강 전투에서 비나수오르 왕을 사살함으로서 막을 내린다. 제국을 구원한 여계리는 황실의 외척으로 급부상했고 실권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계리는 자신의 이름을 본명인 호계리로 바꾼다.
결국 진가도 이가와 같은 방식으로 황족들이 호계리의 호씨일가들에게 숙청당하며 멸망한다.
호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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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위를 찬탈한 호계리는 곧바로 아들인 호한창에게 양위 후 막후에서 태상황으로 군림했다.
후대에 와서 대차게 고인드립을 당하는 호계리이긴 하지만 그는 태상황으로 있으면서 도탄에 빠진 제국을 부흥하기 위해 관리들에 대한 구조조정, 국방력 강화, 토지제도 개혁,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지폐 통보회초 발행, 남자(쯔놈) 장려 등 다양한 개혁 정책들을 시도했다.
그러나 호계리의 제위 찬탈 소식이 명나라의 귀에 들어갔다. 당시 명의 황제 영락제는 베트남땅을 명나라로 복속시키려고 진가의 재건을 핑계로 진가 황족 진첨평을 안남국왕에 봉하고 호가를 정벌케 했다. 진첨평이 호가와의 전쟁 도중 잡혀 죽자 영락제는 호계리와 호한창 부자에게 20여가지의 죄를 물어 장보를 총지휘관으로 삼고 군사를 다시 보내 호가를 멸망시켰다.
호계리와 호한창 부자는 명나라군의 침공을 피해 남쪽으로 튀다가 하정에서 잡혀 남경으로 압송되어 참형에 처해진다.
제4차 북속시기[편집]
마지막 북속시기. 중화왕조들이 마지막으로 베트남을 따먹은 시대로 이 시기 이후 짱깨들은 영원히 베트남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영락제는 제1 ~ 3차 북속시기에 시행됐던 중화왕조들의 식민통치제도를 이어나갔다. 행정제도를 대대적으로 갈아치운 후 베트남 고유의 문화를 탄압하고 중국의 문화를 강요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행정력은 예상 외로 졸라 후달렸다. 진가를 재건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명나라에게 베트남인은 빡칠 수 밖에 없었고 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명나라를 몰아내려고 진가 황족들이 다시 기의를 일으키다 명나라에게 진압되기도 했다.
하지만 진가 황족들의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지방 토호 여리와 그의 일가친척 및 측근들이 남산에서 3차례의 기의를 일으켜 명나라 군대와 대항했다. 처음에는 병력의 질적 차이로 항복과 화친을 거듭했지만 남산군대의 총지휘관인 평정왕 여리의 지도력, 그의 측근인 완채의 신묘한 전술, 남산군대의 악착같은 끈기와 명나라 군대의 내부사정으로 졸동과 축동에서 명나라 군대는 완패하고 많은 장성들과 병졸의 목이 떨어져 시체의 산을 이뤘다고 베트남인들이 기록했지만 사실은 명측에서 걍 2군 유망주 하나 보냈는데 발린 거라(당시에도 애송이 보내서 걱정된다고 한 새끼도 있었다.) 그새끼가 삽질해서 뒤지고 난 뒤에 남은 군대는 걍 철군했다.
700만 명군 베트남 침공 썰이 이때 나왔다.
지릉관 전투를 끝으로 명나라는 남산군대와 화약을 맺고 다시는 침공하지 않겠다고 멩세하며 군대를 물린다.
후여조[편집]
초여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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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와 더불어 베트남 역사상 손꼽히는 가장 강력한 왕조 중 하나. 북속시기를 영원히 끝내고 최초로 베트남의 역사를 기록한 대월사기전서가 나온 왕조이다.
태조 여리는 독립전쟁을 마친 후 초여가를 창건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오른팔 완채를 조정의 초대 승상으로 삼고 토지대장과 호적의 재정비 및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균전제를 실시하고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하지만 태조는 명나라와의 오랜 전쟁으로 남은 제국의 갖가지 후유증들을 모두 해결하지 못하고 죽었다.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태종은 아버지가 완수하지 못한 뒷수습을 마무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태종 역시 아버지 못지 않게 훌륭한 명군이었지만 승상직에서 물러나 야인이 된 완채의 거처를 방문하다 의문사한다. 완채와 그의 삼족들은 태종을 암살했다는 모함을 받고 참형에 처해진다.
명군 두명이 연달아 급사한 제국은 태종의 삼남 인종을 제위에 올려놓고 그의 생모 선자태후를 섭정으로 삼아 간신히 안정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그의 이복형 여의민이 일으킨 모반으로 인종은 선자태후와 함께 살해당한다. 대국적이지 못한 여의민도 불과 1년만에 청화 지역 출신 공신들에게 살해당하고 제위계승권에서 거의 꼴찌나 다름없었던 황자가 제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성종이다.
성종은 베트남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수많은 치적들을 남겼다. 먼저 황자 시절 승룡에서 짜져있으면서 갈고 닦았던 유학을 정치에 구현하며 청화 지역 공신들이 자신들의 권세를 믿고 나대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반면 베트남 역사상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한다. 그리고 행정을 개편해서 전국을 13개의 도로 나눠 지방관의 권력을 분산시켰다. 또한 평등하고 자애로운 법률들이 담긴 흥덕률을 반포해서 남녀와 신분의 차별 없이 모두가 공평하고 덜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을 수 있게 했으며 오사련 같은 사가들을 등용해서 대월사기전서를 반포해 베트남 역사를 기록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국외로도 제국을 노리는 점성과 란쌍 왕국 등의 이웃나라들을 침공하고 이 두나라의 수도까지 따먹기도 했다.
그렇게 성종조 시기의 제국은 인도차이나의 강대국으로 번창하다가 성종이 죽으면서 쇠퇴의 길을 걷는다. 후임 황제들이 줄줄이 요절하고 청화 지역의 개국공신 세력과 성종의 비호를 받던 홍하 델타 지역 세력들의 병림픽, 정유산과 완홍유 등의 무신세력 난립, 각 지방의 반란 등으로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은 무천후 막등용에게 모든 병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막등용은 병권을 잡자 권신이 되어 황제들을 멋대로 갈아치우고 허수아비 황제들을 옹립했다. 나중에는 지가 직접 제위를 찬탈해 초여가를 멸망시키고 막가를 창건한다.
남북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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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의 여가는 완홍유의 아들 완감을 중심으로 복려운동이 일어났고 북쪽의 막가는 태조 막등용과 태종 막등영 부자의 선군정치로 지네끼리 잘 살고 있었다.
완감은 여녕을 장종으로 즉위시켜 여가를 재건한 후 명나라를 끌어들여 막가를 멸망시키려고 했지만 막등용 본인이 스스로를 결박하고 명나라군 앞에서 자길 죄인이라 칭하며 광서와 맞닿은 5개 동을 할양해서 실패한다.
막등용에게 실망한 민심은 완감으로 돌아가고 완감은 기세를 이어 승룡까지 탈환하는데 성공하지만 막등용의 휘하 장수 양집일의 거짓 투항에 속아 살해당한다. 완감이 쥐고 있던 모든 병권은 사위인 정검이 가져갔다.
그렇게 남쪽에서 정씨일가와 완씨일가의 보좌를 받는 여가와 북쪽을 거점으로 삼는 막가의 여막내전이 지속되다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에 여가가 막가를 멸망시키면서 남북조시대는 끝난다.
정완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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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가를 멸망시킨 정씨일가와 완씨일가는 여가 황족들을 황제로 섬기고 자신들은 각자 땅에서 정주와 완주라는 무신정권을 세우며 제후 노릇을 했다.
그런데 정주에서 정장이 정왕으로 즉위하고 완주에서 완복원이 완왕으로 즉위하자 이번에는 정완분쟁이 일어났다. 정주는 완주를 복속시키러 침공군을 보냈지만 개털렸고 전쟁은 결판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양쪽 정권들의 백성들의 삶은 전쟁을 위해 병역 및 세금의 부담으로 나날이 피폐해져만 갔다. 정주는 계속 군사를 보내서 완주를 침공해 위협을 일삼았고 완주는 정주보다 딸리는 국력을 보충하기 위해 점성과 진랍을 약탈했다. 여기서 완주의 무장 완유경의 남진 정책으로 동내와 가정을 확보하게 되고 오늘날의 베트남땅이 완성된다.
하지만 완주 내부에서 곪아있던 민생문제와 관리들의 부패는 해결되지 못했고 결국 서산 지역의 어느 깡촌에서 완악, 완려, 완혜 삼형제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 3형제는 장복만 등의 간신배에 휘둘리는 완주 조정에 분노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완주 조정을 전복시킨다. 서산삼걸 형제들이 일으킨 서산기의로 장복만은 축출되고 완주 왕족들의 일가친척 대부분은 서산군대에게 사로잡혀 참형에 처해진다.
살아남은 마지막 완왕 완복영은 시암 왕국으로 망명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라마 1세는 2만의 대군을 보내 서산군대를 치게 했지만 완혜의 매복 작전으로 미추강에서 대패한다.
완주를 몰아낸 완혜는 복려멸정의 기치를 내세우고 북진을 거듭해 정주마저 멸망시킨다. 이로서 오랜 정완분쟁은 서산군대에게 종결난다.
여담으로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등 서방 세력이 본격적으로 베트남과 접촉한 시대다. 자국어(쯔꾸옥응으)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서산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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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혜가 복려멸정을 내세워 정주를 조졌다는 소식을 들은 완악은 동생이 여가와 내통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품고 동생을 견제하기 위해 귀인에서 중앙황제를 칭한다. 빡친 완혜는 형을 공격해서 형으로부터 광남의 두 현을 할양받는다.
한편 여가 황제 소통은 완혜를 두려워하여 청나라에 SOS를 보냈다. 건륭제는 이를 빌미로 20만의 원정군을 보냈다. 완혜는 자신을 광중황제로 칭한 후 코끼리 군대를 이끌고 북진을 하여 옥회현과 동다군에서 청나라 군대와 여가 군대를 격파한다. 소통이 청나라로 망명함에 따라 여가도 멸망한다.
이로서 귀인에서는 중앙황제 완악이, 부춘에서는 광중황제 완혜가 황제에 오르면서 서산가는 일국이제 형태로 남게 된다.
하지만 완혜는 옛 남월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청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다 돌연사하고 남쪽에서는 완왕 완복영이 재정비한 군대로 서산가를 다시 침공한다. 완악은 완혜의 아들 완광찬과 내전을 벌이다가 홧병으로 사망하고, 이때문에 약해진 서산군대는 완복영에게 대패하며 결국 서산가는 멸망한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었지만 남자(쯔놈) 장려, 민족 문화 창달 등의 개혁적인 정책을 이뤄낸 짧고 굵게 간 왕조였다.
완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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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마지막 왕조로 베트남 역사상 최대 규모의 영토를 마련한 반면 프랑스 침공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황제로 즉위한 가륭 완복영은 수도를 후에로 삼은 뒤 가정과 승륭을 잇는 도로를 건설하고 황월율례를 반포하는 등 내치를 다지다가 5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 뒤를 이어 가륭의 아들 명명 완복담이 제위에 오른다.
명명은 진보적인 토지 개혁 정책 및 증기선 등의 적극적인 서구문물 도입으로 국력을 발전시켰다. 외교적으로도 청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히려 건륭제를 직접 디스하며 대남이라는 독자적인 국호를 쓰는 등 자주의식을 드높였던 황제이다. 하지만 외세에 대해서는 상당히 잔인했는데, 유교우월주의에 입각한 베트남식 제국주의로 타 민족들의 문화를 오랑캐 취급하고 탄압했다. 점성을 멸망시키고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영토를 빼앗아 베트남 역사상 최대 규모의 영토를 마련한다. 그리고 가륭이 완왕으로 있을 당시 프랑스와 약속했던 불평등 조약을 다수 지키지 않고 오히려 프랑스에서 포교온 천주교도들을 모조리 잡아 극형에 처해 프랑스 침공의 빌미를 제공했다.
명명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소치와 사덕도 여전히 천주교도들을 학살했고 결국 빡친 프랑스는 원정군을 보내 완가와의 전쟁을 감행한다. 처음에는 가정의 기후와 전염병 및 완지방의 우주방어로 고전을 거듭했지만 점차 무기들의 질적 차이로 완가 군대가 열세를 보이며 프랑스군은 가정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공포의 도가니에 휩싸인 완가 조정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병림픽을 벌인다. 설상가상으로 동경에서 여유봉이 여가를 재건하겠답시고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완가 조정은 여유봉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병부상서 반청간을 보내 임술화약을 맺어 프랑스에게 동부 3성을 할양한다. 분개한 동부 3성의 베트남인들은 어부 완충직을 중심으로 반프랑스 운동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프랑스는 한술 더 떠서 반청간의 관할 아래 있던 서부 3성도 점령했고 반청간은 죄책감으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이로서 남기의 6성이 프랑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프랑스는 기세를 이어서 하내까지 쳐들어갔지만 완지방, 황요 등의 장수들이 목숨까지 저항하면서 항전을 벌인 끝에 프랑스 측에서도 프란시스 가르니에나 앙리 리비에르 등의 장성들이 전사했다. 그러나 완가도 국내에서 흑기군이 깽판을 치고 다니고 조정에서는 완문상, 존실설, 진천성 등이 섭정을 하며 멋대로 전횡을 일삼고 황제들을 갈아치우는 등 명운이 다해가고 있었다. 프랑스는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침공군을 보내 순안 전투에서 완가 군대를 대패시키고 순화 조약을 맺어 베트남을 자기네 식민지로 만들어버린다.
완가의 형님 노릇을 하고 있었던 청나라는 당황하여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 청불전쟁을 개시했지만 패배한다. 이에 당시 완가 황제 함의와 존실설은 궁궐에서 런하고 베트남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조직하고 근왕풍조를 전개하다가 프랑스군에 잡혀 알제리로 유배당한다. 함의를 잡은 후 프랑스는 완가 황제들을 지 손으로 옹립했지만 줄줄히 반프랑스 운동을 지원했는지라 모두 아프리카 같은데로 유배를 보냈다. 이후 옹립한 계정과 보대가 그나마 말을 잘들어서 더 이상 완가는 프랑스에 저항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판보이쩌우에게 욕을 오지게 쳐먹었을까.
암튼 베트남이 프랑스에 복속된 이후로 한자는 폐지되고 라틴 문자로 된 자국어(쯔꾸옥응으)가 도입되는 등 서구 문물들이 지속적으로 도입된다.
- ↑ 이 100명의 아이들의 후손이 중국 남방에서 베트남에 이르는 지역에서 살던 백월족이다.
- ↑ 특히 조타는 나라를 세우고 패기쩔게도 자신을 무제라고 칭제를 하는데, 요결 버르장머리 없다고 여긴 한나라가 사신 육가를 보내서 항의서신을 보낸다. 조타는 육가와의 병림픽 끝에 한나라에서 하사한 남월왕의 작위를 받고 칭제를 거둔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칭제를 했으며 후대의 베트남 임금들은 이런 식의 외왕내제를 유지한다.
- ↑ 요 때가 베트남 불교의 첫 기록이 등장하는 시기다. 당시 사섭의 치세 하에 모자, 강승회, 지양강접 등의 중국계 승려들이 베트남으로 들어와 베트남 불교의 발전에 이바지한다.
- ↑ 송나라에 이르러서는 현지 베트남인인 이장인이 반란으로 자사자리를 꿰차고 관리들이 하나같이 베트남 자사자리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 ↑ 풍흥의 시대에 베트남이 독자적인 한자를 만든 첫 기록이 나온다.
- ↑ 섭정으로 있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서 신하들은 얘한테 개기질 못했다. 심지어 정선황의 아내 양운아(즈엉번응아)와도 불륜 관계를 맺고 자길 부왕이라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