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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티 낌 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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潘氏金福

프로필[편집]

  • 이름 : 판티 킴푹(Phan Thị Kim Phúc, 한자로는 潘氏金福)
  • 출생 : 1963년 4월 6일 남베트남 서녕성 잔반(盞盤)[1]
  • 국적 : 남베트남(1963 ~ 1975), 베트남(1975 ~ 1997), 캐나다(1997 ~ )
  • 가족 : 혼인해서 2명의 자녀를 두었다.

개요[편집]

남베트남의 평범한 소녀였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2년 6월 8일, 가족들과 함께 집근처 카오다이 사원에서 숨어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현장을 벗어나라'는 병사들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지 몇초만에 미군이 날린 네이팜탄이 마을에 떨어지게 되면서 그녀의 인생은 바뀌고 말았다.

소녀의 절규[편집]

네이팜탄이 떨어지면서 마을전체는 초토화되었는데, 당시 무명옷을 입던 킴푹의 왼쪽팔에 붙었는데, 그녀는 그 순간에 재빨리 입었던 옷을 벗어던지고 울부짖으면서 거리로 뛰쳐나갔다가 의식을 잃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이때 전신 30%에 3도화상을 입어서 13개월동안 수차례의 피부이식수술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이 현장은 AP 통신의 종군기자였던 후잉 콩 우트의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그는 쓰러진 킴푹을 차에 태워 병원으로 보냈다.

이 기자양반은 사진을 인화했으나 나체보도금지라는 회사의 규정때문에 처음 신문에 싣는 것은 실패. 하지만 경험많은 사진편집자의 도움덕에 신문에 실을 수 있게 되었고 이사진의 보도는 실로 엄청났다.

이 사진이 미국포함 전세계에 반전여론을 조성하는데 크나큰 공헌을 했기 때문. 이사진으로 인한 반전여론은 베트남 전쟁을 종결시키는데 한몫을 했고 후잉 콩 우트는 나중에 퓰리처상을 받는다.

사건이후[편집]

퇴원한 뒤 킴푹은 노오력끝에 의대에 들어갔지만 이사진의 존재를 알아챈 빨갱이새끼들때문에 강제 퇴학당하고 고향에 짱박혔다. 에라이 빨갱이새끼들ㅉㅉ

하지만 1982년 외신기자들의 도움으로 독일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얼마 후 그녀의 자초지종에 대해 제대로 알게된 빨갱이들은 자국내는 찔렸는지 쿠바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곳에서 같은 베트남 유학생인 부이 후이 또안을 만났으며, 1992년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가게 되었다. 비행기가 캐나다에서 잠깐 착륙하여 급유를 하는동안 부부는 캐나다에 비호권을 요청했고 이를 허락받았다.

1997년 유네스코로부터 평화문화친선대사로 임명되었으며 1998년 캐나다 시민권을 취득하는데 성공했다.

  1. 남베트남 시닝 성 짱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