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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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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陽德郡

평안남도 동부에 위치한 군. 동쪽으로 함경남도 영흥군, 고원군, 서쪽은 성천군, 남쪽은 황해도 곡산군, 북쪽은 맹산군과 접한다. 면적은 1,345.6㎢였지만 북괴 군면리 대폐합때문에 신양군이 분리됨에 따라 870㎢로 쪼그라들었다.

낭림산맥의 남단부인데다 성천, 곡산과의 경계지역에 언진산맥이 지나고 있기 때문에 낭림산맥지역의 백산(白山, 1,452m), 북대봉(北大峰, 1,327m), 거차령(巨次嶺, 557m), 소북대봉(小北大峰, 1,274m)이, 언진산맥의 자하산(紫霞山, 1,216m), 하람산(霞嵐山, 1,486m), 박죽산(朴竹山, 949m)등이 솟아있다. 이외에 북쪽지방에는 고성산(姑城山, 1,017m)이 있고 영봉(靈峰, 1,135m)에서 서남으로 뻗는 구릉지대가 전개된다. 암튼 이런배경때문에 군 대부분이 산악지대에 해당한다.

북대봉 산줄기에서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과 남강이 합해진다. 이 두강은 흐르면서 유역에 기암과 절벽의 승지를 이뤄놓았기 때문에 평지가 거의없다.

건치연혁[편집]

원산지역에 살던 동예와 이웃한 심산 유곡지대라 알려진건 없지만 고인돌이 발견되긴 했다. 거기에서 끝난게 문제지.

낙랑군 누방현(鏤方縣)에 속했다가 미천왕대 고구려땅이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 좆망하고 같이 좆망.

고려평양을 수복한 뒤 북진정책을 실시하면서 938년 동양면에 양암성(陽巖城), 983년에 양덕읍에 수덕성(樹德城)을 쌓아 군사요새로 성장시켰다. 여요전쟁이후 이군근처에 북계관성이 새로이 축성되었다.

요나라 말 여진족과 막고라를 평치게 되면서 본군에 둔이 설치되었고 토성진(兎城鎭, 現 오강면)에 별장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거유(車踰, 現 쌍룡면)에 소모별장(召募別將)일 주둔하게 되었다. 이후 토성진은 첨사가 주둔하게 되었다.

1396년 양암성 + 수덕진 = 양덕현이 되었고 감무가 파견되었다. 이때는 양암성에 치소가 설치되었지만 1635년부터 1638년까지 인좆에 의해 양덕읍으로 옮겨졌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21년 군청이 동양면에서 양덕면(당시 구룡면)으로 옮겨졌고 1941년 양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 후반 ~ 소련군정 ~ 북괴수립초기까지 평원선이 만들어짐에 따라 관서와 관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때문에 6.25 전쟁당시 중요한 군사요충지가 되었지만 서부전선의 군머는 청천강 전투때 멘탈이 쿠크다스가 되서 지킬수 있는 꿀땅도 못지키고 빤쓰런하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중공군이 별탈없이 수복했다. 그리고 중공군은 이지역을 기반으로 평원선 중간에 있는 고원군 수동읍을 쳐먹고 원산을 점령했다.

북괴가 재수복한 뒤,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쌍룡면, 오강면, 화촌면이 성천군 대구면과 함께 신양군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북괴치하에서 양덕군내에 노동교화소가 신설되었다.

2006년 양덕, 신양전체가 대홍수로 큰 인명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읍면[편집]

現 북괴령 양덕군[편집]

양덕읍[편집]

陽德邑

면적 322.2㎢. 읍소재지는 용계리.

용계(龍溪), 봉계(鳳溪), 용흥(龍興), 태평(太平), 수덕(樹德), 지수(智水), 인평(仁平), 청송(淸松), 세동(細洞), 풍전(豐田), 운니(雲泥), 창(倉)의 12개리를 관할했다.

본래 수덕진(樹德鎭)이 있었고 조선시대 구룡면(九龍面)이 되었다. 하지만 1929년 군청이 본면으로 옮겨짐에 따라 낙천면(洛川面)의 5개리를 편입, 양덕면으로 개칭되었고 1941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41년부터 한동안 신읍(新邑)으로 불렸다고 한다.

읍내 소북대봉, 백산, 남대봉(南大峰, 960m), 유파령(柳把嶺, 852m)이 함남과 경계를 이루고 남서부는 언진산맥이 뻗어 박죽산, 자하산등으로 잇대어 황해도 곡산, 평안남도 성천과의 경계를 이룬다. 옥계천과 낙천이 합류하여 비류강으로 유입되며 하천연변에 분지가 형성되있다.

양덕종(陽德種)으로 불리는 을 비롯해 조, 팥, 옥수수, 메밀, 감자등을 재배해서 먹었고 이중 메밀을 특히 많이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초(西草)라고 불리는 잎담배가 재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면의 80%를 차지하는 임야에서 소를 키우거나 목재, 약초, 산채, 송이버섯등을 채집했다고 한다.

용계리에는 전국적으로 윾띵한 대탕지온천과 소탕지온천이 있었다고 한다.

소련군정시기 용계리가 5개리(1,2,3,4,5)리로 분리되었고 북괴수립직후 1949년 용계삼리에서 용계육리, 봉계리에서 사천리(沙川里), 수덕리에서 척이리(尺耳里), 청송리에서 청계리(淸溪里)가 신설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양덕읍(용계삼리 + 용계사리), 용계일리(용계일리 + 용계이리), 용계이리(용계오리 + 용계육리), 태흥리(태평리 + 용흥리), 수덕리(수덕리 + 척이리), 평원리(지수리 + 인평리), 송동리(청송리 + 청계리 + 세동리), 운창리(창리 + 운니리 + 풍전리), 봉계리(봉계리 + 사천리)로 개편되었다.

1954년 용계일리와 용계이리의 일부가 양덕읍으로, 용계이리의 나머지가 온천면에서 신설된 상신리로 편입되었다. 1967년에는 송동리와 평원리가 신양군으로 이관되었고 1991년에는 태흥리, 수덕리의 일부지역이 양덕읍으로 편입되었다.

대륜면[편집]

大倫面

면적 189.3㎢. 면소재지는 사기리.

사기(士基), 수주(水注), 구룡(九龍), 통동(通洞), 인흥(仁興), 공진(孔眞), 괘송(卦松)의 7개리를 관할했다.

면내 두류산(頭流山, 1,324m), 아호비령(阿虎飛嶺)등 태산준령으로 함경남도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에는 무직산(霧織山, 1,206m)이 황해도와 경계를 이룬다. 덕곡산(德谷山, 1,207m)에서 발원하는 물이 무직산에서 발원한 물과 합류해 대동강 지류인 남강을 이룬다.

공진리 괘송리일대는 쌀이 재배되는 분지였고 그외에 조, 콩, 옥수수, 팥, 보리, 메밀등 잡곡과 잎담배, 대마등의 특용작물이 생산되었다. 주물공장이 있어 재래식 솥과 농기구를 생산해 군내 각 면에 공급되었다고 한다.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통동리에서 옥천리(玉川里), 양천리(陽川里)의 2개리로 분리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사기리, 구룡리(수주리 + 구룡리), 통등리(양천리 + 인흥리 + 옥천리), 추마리(공진리 + 괘송리)로 개편되었다.

온천면[편집]

溫泉面

면적 263.5㎢. 면소재지는 온정리.

온정(溫井), 일양(日陽), 창(倉), 진석(眞石), 거차(巨次), 상청(上淸), 하청(下淸), 은우(隱牛), 평암(平巖), 상국(上菊), 하국(下菊), 상신(上信)의 12개리를 관할했다.

71℃의 높은 온도를 자랑하는 돌탕지온천(石湯池溫泉)때문에 온천면이 되었다.

은우리와 함남 고원 산곡면, 운곡면의 삼각경계에는 이성계가 무예를 연마했다는 기린산(麒麟山, 872m)이 있다. 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거차령에서 발원한 물눌기가 하청리에서 합류, 동양면과 황해도 곡산을 관류하면서 남강을 이룬다. 이 강상류에서 관개수로를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원산을 통해 들여온 해초를 통해 한천(寒天)을 대량으로 생산했다고 하나, 북괴치하에서 고난의 행군이 터진 지금은 완전히 좆망한 것으로 보인다.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진석리 일부에서 순우리(順于里)를 신설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온정리(온정리 + 창리 일부), 일암리(일양리 + 평암리 + 동양면 성북리 일부), 은하리(은우리 + 하청리), 거상리(거차리 + 상청리), 상신리, 용암리(상국리 + 하국리), 삼계리(진석리 + 순우리 + 창리 일부)로 개편되었다. 1954년 상신리에 용계이리 일부가 편입되었다.

동양면[편집]

東陽面

면적 114.4㎢. 면소재지는 하석리.

하석(下石), 성북(城北), 상석(上石), 신흥(新興), 수암(水巖), 지경(地境), 용산(龍山), 흘평(屹坪)의 8개리를 관할했다.

본래 양암진(陽巖鎭)이 있었고 조선시대 양덕현의 현청이 있었기에 군내면이 되었다. 하지만 1921년 군청이 양덕읍으로 옮겨지면서 동양면으로 개칭, 좆망했다.

함남 고원군과 경계를 이루는 재령산이 있으며, 그 산의 정상에는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용연(龍淵)이 있었다. 언진산맥의 태산이라고 하는 하람산이 황해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 산에는 치마대(馳馬臺)라는 이성계의 무술연마장이 있었다고 한다.

온천면에서 흐르는 물과 대륜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수암리에서 합류하여 곡산을 거쳐 남강의 상류인 능성강(能成江)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수암, 성북리에는 평야가 전개되었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동양팔경중 하나인 방화정(訪花亭), 유선대, 양덕고성이 있었다.

북괴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상성리(상석리 + 성북리 일부), 동양리(하석리 + 신흥리 + 수암리), 용평리(지경리 + 용산리 + 흘평리)로 개편되었다.

現 북괴령 신양군[편집]

쌍룡면[편집]

雙龍面

면적 172㎢. 면소재지는 평창리.

초창기 북괴 신양군이 있었지만 신설된지 1년만에 대구면으로

평창(平倉), 관봉(冠峰), 반성(盤城), 화락(化樂), 용반(龍盤), 용전(龍田), 정옥(丁玉), 용봉(龍峰), 북창(北倉), 중(仲)의 10개리를 관할했다.

1929년 상룡면, 하룡면을 스까해 쌍룡면이 되었다. 정옥리와 성천군계에 회암산(檜巖山, 799m)이 있고 오강면, 양덕읍, 쌍룡면과의 삼각경계에는 소북대봉이 있다. 화촌면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소북대봉에서 발원한 물이 용봉리에서 합류, 성천 비류강으로 흘러들어가 대동강상류인 서강이 된다.

산간지대라 잡곡만 생산되고 뽕, 초지, 담배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용반리, 평창리에는 금광, 은광이 있고 중리에는 중석광이 있었다고 한다.

회암산에는 축조연대를 알 수 없는 회암산성이 있는데 내부면적이 5,000여평이 되고 계단식 출입구가 하나였다는 기괴한 구조였다고 한다.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용전리에서 송전리(松田里)가 신설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신양읍(용전리 + 송전리 + 정옥리 + 용반리), 쌍룡리(죽리 + 북창리), 관성리(관봉리 + 반성리), 광흥리(평창리 + 용봉리), 용화리 일부(쌍룡리)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1953년 신양읍은 송전리로 강등되었고 대구면에서 신설된 창평리, 화천리에서 신양읍이 옮겨졌다.

그리고 관성리가 화촌면에서 신설된 용화리 일부를 편입했지만 일부가 광흥리로 편입되었다.

화촌면[편집]

化村面

면적 93.94㎢. 면소재지는 백석리.

백석(白石), 문흥(文興), 평곡(平谷), 장성(長星), 화암(花巖), 풍계(楓溪), 문암(文巖), 용흥(龍興), 여의(如意), 쌍평(雙坪), 창개(昌介)의 11개리를 관할했다.

면내에 고성산, 사악산(四嶽山, 872m), 와룡산이 있다. 오강과 맹산에서 흐르는 물이 백석리에서 합류,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으로 들어간다. 이 물줄기를 이용해 본면의 특산물인 원목을 평양으로 수출했다고 한다.

산동네라 잡곡, 담배, 대마, 뽕을 재배하고 삼베, 명주를 생산했다고 한다.

용흥리에 용천폭포가 있는데 높이 70여m의 기암괴석으로 윾띵했다고 하며 여의리에 있는 피난지인 무난동에는 용이 승천했다는 용소와 현감 김종겸이 쓴 유산비가 있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사개리(풍계리 + 여의리 + 문암리 + 화암리), 문명리(문흥리 + 오강면 월명리), 창계리(쌍평리 + 창개리), 백석리(평곡리 + 백석리 + 장성리), 용화리(용흥리 + 쌍룡면 화락리)로 개편되었다.

1953년 용화리를 관성리, 백석리에 반토막내서 편입했는데, 백석리는 땅의 일부를 관성리로 떼줬다.

오강면[편집]

吳江面

면적 226.8㎢. 면소재지는 창리.

창(倉), 월명(月明), 봉암(鳳巖), 신봉(新峰), 신흥(新興), 용담(龍潭), 등암(鄧巖), 연봉(蓮峰), 쌍룡(雙龍)의 9개리를 관할했다.

숙종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토성을 추조했고 토성진으로 삼았다. 여기에 별장을 뒀다가 6년뒤 첨사로 승격, 병마첨절제사를 두었다고 한다.

면내에는 영봉(靈峰, 1,136m), 와룡산(臥龍山, 1,024m), 백산, 백두산(白頭山, 1,370m)등 태산준령이 병풍을 치듯 면내에 자연방벽을 이루고 있다. 영봉에서 발원하는 여러 샛강의 물이 합류하여 성천으로 들어가 비류강이 된다.

자동차가 통할 수 있는 도로는 좆도 없고 우마차가 겨우 통할 길만 있어 오지로 통했다고 한다.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쌍룡리에서 용포리(龍布里), 용반리(龍半里), 신봉리에서 신풍리(新豊里), 창리에서 장원리(長院里)가 신설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용운리(등암리 + 신흥리 + 용담리), 용련리(용포리 + 연봉리 + 용반리), 장성리(장원리 + 창리), 운봉리(신봉리 + 봉암리 + 신풍리)로 개편되었다.


아웃풋[편집]

  • 우대규 : 한일약품의 창립자로 한국 1세대 제약산업 거물중 한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