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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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여기서 쪽숭이들이나 일뽕먹은 친일파새끼들에게 고문받아서 돌아가신분들한정
노잼일 수 밖에 없다. 독립 운동가 분들이 고통을 받았던 곳이니까.
형무소의 배경[편집]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에 지어져 1987년까지 운영된 감옥을 일컫는다.
일제의 조선 진입 이후, 조선에는 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애국 운동을 행하였는데, 그 애국 운동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개인적으로 하는 의열활동이다. 이것에서 의사와 열사가 나뉘는데, 의사는 폭력을 행사하였던 애국지사, 열사는 비폭력으로 일관한 애국지사를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강우규, 이재명, 안중근 등은 의사라고 불리우며, 유관순은 열사라고 불린다.
두 번째, 단체로 하는 의병활동이 존재한다. 의병활동은 근대의 조선에 셀 수 없이 많이 일어나는데, 이 중 가장 큰 세 의병활동에서 서대문형무소의 건립이 이루어진다.
1895년 을미사변을 기점으로 일어난 을미의병, 1905년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일어난 을사의병, 그리고 1907년 정미칠조약을 기점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에서 피체할 인원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근대식 감옥을 설립하고, 그 이름을 경성감옥이라고 붙인다.
경성감옥은 본디 1600 미터 제곱 정도의 크기였으나, 1912년에 서대문감옥으로 명칭이 바뀌고, 또 1923년에 서대문형무소로 바뀌는 등 명칭과 함께 넓이도 50000 미터 제곱에 달하는 거대한 감옥이 되었다.
여담으로, 서대문형무소의 원주소는 현저동 101번지이다. 이는 조선 초기에 명당자리로 거론되던 곳이었는데, 일제는 이곳에 형무소를 설치함으로 모멸감과 민족말살을 야기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서대문형무소는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1987년, 서울구치소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게 된다. 서대문형무소 옥사, 보안과 청사 등의 건물은 전시관으로 개관하게 된다.
보안과 청사[편집]
서대문형무소의 보안과 청사 건물은 원래 간수들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그 지하실은 고문실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1, 2층 모두 전시관으로 사용되었고, 지하실 또한 고문을 설명하는 전시관이 되었다.
1층에는 서대문형무소의 배경과 을사늑약문, 기유각서, 죄수 명패 등의 유물이 자리잡아 있으며, 2층은 항일운동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전시해놓았다.
항일운동으로는 강우규, 이재명, 송학선,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을 비롯한 의사 활동과, 의열단, 27결사대 등을 비롯한 조직 활동이 있으며.
여러 중요한 사건이 전시되어 있다. 예컨대 간도공산당 사건, 원산 총파업, 6월 20일 만세 운동, 경성 트로이카, 단파방송 청취 사건,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등이 있다.
2층 전시관에는 메모리얼 홀이 있는데, 이곳엔 몇 천 개가 넘는 수형기록표가 벽마다 붙어져있어, 독립을 위한 애국지사들을 기리고 있다.
2층 전시관까지 다 관람이 끝났다면, 보안과 청사 지하실로 가게 된다.
보안과 청사 지하실[편집]
이곳은 과거 일제가 고문을 할 때 사용한 곳으로, 이곳의 전시 또한 거의 대부분이 고문이다.
이 당시의 고문은 서슴없이 저질러졌는데, 애국지사들의 기세를 꺾으려는 의도와, 조선인은 미개해서 일본인과 대화로 풀어나갈 수 없다는 일제의 사상 하에 이루어졌다. 실히 고문들의 내용은 잔인하고 극악무도했는데, 몇 가지 고문을 서술하려 한다.
1) 물고문
형무소에 전시되어 있는 물고문은, 웃통을 벗은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서 간수가 쏟는 물에 고통 받는 모습이다. 실제로는 나체로 행해졌으며, 물은 뜨거운 물에다 더욱 고통을 주기 위해 고춧가루를 섞은 물이었다. 이는 호흡곤란을 야기하여 엄청난 고통을 안겼으며, 심한 경우 흉막염에 걸리기도 하였다.
2) 손톱 찌르기 고문
말 그대로 손톱 밑의 살에 송곳과 가시를 푹푹 찔러대는 고문이었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손톱이 부서진다면 렌치 등의 공구로 손마디를 꺾어버리기도 했다.
3) 성기에 행하는 고문
이는 고문실에 이병희 여사가 증언하는 동영상에 나온다. 독립운동가들의 자손을 멸하기 위해서 성기에 고문을 가했는데, 여성의 경우 자궁 속에 뜨거운 인두를 휘저었으며, 남성의 경우 성기에 심을 박아 그 위에 불을 질렀다. 성기에 행했다고 결코 웃지 말자.
4) 상자고문
작은 상자, 큰 상자등에 칼과 가시, 창을 박아놓고, 그 속에 운동가들을 넣는다. 그리곤 상자를 흔드는데, 이 경우 죽는 확률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5) 벽관고문
아주 좁은 벽에 사람을 가둬놓는 고문이다. 이런 게 무슨 고문이냐는 말이 존재하는데, 결코 쉽게 보아선 안 되는 고문이다. 어둠 속에서 아무도 없고, 폐쇄된 공간에서의 두려움은 만만하게 볼 수 없으며, 잠을 못 자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가서 직접 해봤는데 존나 좁아서 열중쉬어 자세조차도 불가능했다. 씨발 역갤러 개새끼들이 이런걸 봐야 내가 좆같은 생각을 가졌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교화할텐데 집에서 컴퓨터 붙들어매고 앉아있는 것 빼고 할 줄 아는 것 없는 병신새끼들이 이런 곳에 갈 일이 있겠는지?
이 밖에도 비행기 고문, 등이 있었고, 태형 고문 같은 경우는 사진으로 전시되었다고 너무 흉하다 하여 없어졌다고도 한다.
옥사[편집]
옥사의 형태는 제러미 밴덤이 고안했던 파놉티콘 형태를 차용했다. 파놉티콘은 간수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옥사가 퍼져있는 것인데, 소수의 간수 인력으로 많은 죄수를 감독하기에 효과적인 형태였다. 실제로 수인들은 몇 천 명이 넘었지만, 간수의 수는 300명 정도였다고 한다.
본디 서대문형무소는 500명 정원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한 감방에 5~6명만이 들어가야 했지만 실제론 지켜지지 않았다. 몇 천 명의 수인들이 들어가있었고, 한 좁은 방에 30~35명 정도가 지내야 했다. 채광이 좋지 아니하며 변소 또한 따로 마련되지 않아 지극히 비위생적이었고, 많은 인원들이 누워 자기 좁아서 매우 불편했다.
식사는 밥틀에 밥을 넣어 주었는데, 이 밥틀이 무엇이냐 하면, 밥통에 일정 크기의 틀을 넣어 밥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었다. 악질 죄수는 큰 틀을 넣어 밥을 적게 주었고, 노역을 많이 하는 죄수는 등급을 조금 높여 많이 주었지만 이 경우도 지켜지지 않아 밥을 적게 주기 일쑤였다. 또한 밥이라는 것도 가관인데, 콩이 5할, 좁쌀이 3할, 현미가 2할인 밥이었다. 그것도 콩은 말이나 소도 먹지 못하는 껍데기만 주었다.
죄수들이 옷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 형을 아직 언도받지 않은 미결수는 청색 수인복을, 두 번째로 형을 언도받은 기결수는 적색 수인복을, 세 번째 병자는 흰색 수인복을 입었다.
12옥사에는 먹방이라는 곳이 있는데, 마치 먹처럼 캄캄하다 해서 먹방이다. 사람이 겨우 누울까 말까한 독방이며, 이곳엔 채광이 일체 없다. 바깥과 완전히 고립되어 있어 똥을 누는 공간이 그곳에 뚫려 있었고, 이 곳에 감금된 죄수는 심리적 장애를 겪었다고 한다.
파놉티콘 형태로 옥사가 지어졌다 보니 감방에서 간수를 육성으로 부르기는 쉽지 않았다. 이를 위해 패통이라는 것이 존재했는데, 패통은 옥방에서 단추를 누르면 나무막대기가 툭하고 떨어져 간수에게 신호를 주는 것이다. 이를 보고 간수는 그 감방에 갔다.
공작사[편집]
공작사는 말 그대로 죄수들에게 일을 시키는 곳이었다. 강제 노역과 착취가 일상이었지만, 죄수들은 이곳에 가길 원했다. 이곳에 가면 아교를 훔쳐 먹거나 쥐를 잡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죄수들은 공작사에서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일제가 공작사에서 일부러 밥을 먹여 일을 할 시간을 일 분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옥사에서 공작사로 가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1. 옷을 벗어 나체로 줄을 선다.
2. 공작사로 향해 뛰어간다.
3. 공작사를 가는 길에 있는 허들을 뛰며 소리를 지르거나 이름을 크게 외친다.
4. 공작사에서 작업복으로 환복하고 일을 한다.
옷을 벗는 이유는, 자신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는 증명이고, 소리를 지르며 허들을 뛰는 행위는 자신의 입이나 겨드랑이, 다리 사이에도 아무 것도 숨기지 않았다는 행위다.
공작사에서 하는 일은 벽돌 굽기, 옷 만들기 등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제작된 벽돌은 경(京)이라고 가운데에 새겨져 있는데, 이는 경성감옥에서 만들어졌다는 의미이다. 이 벽돌은 서대문형무소 건물이나 벽돌길에서 볼 수 있다. 이 벽돌은 노동착취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격이 싼 편이었다. 때문에 이 벽돌은 시가의 3분의 1로 유통되었고, 이 때문에 민간벽돌회사가 항의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사형장과 시구문[편집]
옥사에서 나와 길을 걷다보면, 한 길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누군가와 면회를 하고, 오른쪽으로, 즉 사형장으로 꺾으면 사형이라는 소리였다. 사형장에 들어가기 전에 큰 미루나무가 하나 있는데, 죄수들이 사형받기 전에 이 나무를 붙잡고 통곡을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 안에 들어가면 미루나무가 하나 더 있는데, 이 미루나무는 통한의 미루나무라고 불리우며, 통곡의 미루나무보다 무슨 이유에선지 잘 자라지 않는다.
사형장은 교수형을 취하고 있으며, 형이 집행되고 난 후 지하실에서 시체를 끌어간다.
사형장을 나와보면 시구문이 있는데, 이 시구문은 다음과 같은 시체를 운송할 때 쓰인다.
1. 이곳에서 죽이면 안 되는 죄수를 죽였을 때
2. 시체의 훼손이 너무나 심해서 공개하면 사회적 물의가 빚어질 때
대표적으로 유관순이 시체 훼손이 너무 심하여 공개를 거부했고, 이화학당 측에서 시체를 확인하고 화장하겠다는 조건으로 시체를 내주었다고 한다.
이 시구문은 광복 이전 일제가 무너뜨리고 갔는데, 다시 복원하여 40m까지 뚫었다고 한다.
격벽장[편집]
하루 삼십 분씩 죄수들은 운동을 할 수 있었는데, 운동을 하는 곳은 이 격벽장이다. 격벽장 또한 옥사와 마찬가지로 파놉티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실제로 단상 위에 올라가면 모든 것이 다 보인다.
이곳에서도 철저하게 죄수와의 소통을 단절시켜, 벽을 세워서 죄수들끼리 대화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