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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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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바르샤바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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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나치 친위대,독일 국방군 놈들 이새끼들은 지네 동맹국 시민이 죽어나가는데 구원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ㄴ 당시 소련군은 벨로루시를 쭉 가로질러와서 공세종말점에 도달했고,발터 모델이 방어선을 구축해 놓고 선봉부대를 갈아버려서 더 진격을 못했다는 게 중론이다.

개요[편집]

바르샤바는, 어.. 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나는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근데, 그러니까 국방군이기 때문에 국방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 -아돌프 히틀러-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중부가 붕괴되면서 전선이 순식간에 비스와 강까지 밀렸는데,이때 폴란드 지하국(PPP)는 작전명 '폭풍'의 일환으로, 자력으로 바르샤바를 탈환하기 위해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켰다.

폴란드 지하국과 폴란드 망명정부의 원래 계획은 소련과 연합국을 원조하여 폴란드 영토를 탈환하기 위함이었으나 스탈린의 태도가 점점 불친절하게 바뀌면서 국내 대도시의 무력 봉기로 노선을 바꾼다. 이에 따라 우치,포즈난,크라쿠프,루브프 등 여러 대도시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대부분의 봉기가 실패로 끝났지만 루브프 같은 도시는 독일군으로부터 해방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에 따라 바르샤바도 7월부터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고,폴란드 지하국의 주력군인 폴란드 국내군이 1944년 8월 1일 14시를 기해 봉기를 시작했다.

일단 폴란드 국내군은 공산주의자,민족주의자,유대인 등을 모아 총 6만의 병력을 편성했고,모스크바에서도 바르샤바가 만약 봉기하면 군대를 보내겠다는 호의적 메세지를 계속해서 보냈다.

전개[편집]

8월 1일을 기해 바르샤바에서 봉기가 진행되었고, 독일군은 봉기가 일어날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정도로 격렬하게 일어날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날 바르샤바의 상당 부분이 해방되었고,8월 2일 부터는 봉기군의 신문과 자체 라디오 채널 '섬광'을 통해 상황을 알렸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d/dc/Warszawa_Powstanie_1944-08-04.jpg/800px-Warszawa_Powstanie_19 8월 4일까지 폴란드 봉기군이 점령한 지역

근데 폴란드의 봉기는 생각보다 잘 진행되지 못했다. 일단 독일군은 꽤 많이 충원되어 9만 명의 병력이 바르샤바 외곽에서 버티고 있었고,무기고 점령에도 실패해 무장 상태는 개판이었다. 일단 폴란드군은 소총 1000정,권총 1750정,중기관총 7정,대전차포 30문밖에 없었다. 물론 그 이후 시민들이 자체 제작한 사제 무기 덕분에 무장한 병력의 수는 계속 늘었으나 신뢰도가 똥망이라 잘 쓰이진 않았다. 그리고 연합국의 요청으로 소련이 공중보급해준 무기들은 대부분이 독일군 손에 들어갔다.봉기 도중 폴란드 봉기군은 판터 2대와 반궤도 장갑차 1대를 노획했으나 판터 1대는 고장으로 퍼지고 남은 탄약을 나머지 판터로 옮겨 사용하여 반궤도 장갑차 1대를 파괴했으나,8월 11일에 파괴되었다.

그리고 비스 강변의 대교들이 14일엔 전부 파괴되었고, 진압대장에는 유고의 빨치산 진압으로 경험을 쌓은 SS대장 에리히 폰 뎀 바흐 첼레프스키가 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군은 바르샤바 근교에서의 전투에서 크나큰 손실을 입었고, 안되겠다 싶었는지 바르샤바 시내에 삐라를 뿌리기 시작했는데,그게 봉기군한테 준 거였다. 내용은 무모한 도전을 포기하고 그냥 항복해라.라는 내용이었다. ㅉㅉ 사스가 헬러시아

진압[편집]

일단 독일군은 디를레방어 사단,카민스키 여단,아제르바이잔 대대를 보내 진압시켰는데, 일단 디를레방어 사단은 똑같은 인간백정 무장친위대나 국방군도 기겁할 정도로 잔인했으며,바르샤바 봉기 당시 진격 속도는 약 1.6km였다. 왜냐고?가는길마다 죽이고 강간하니까... 그나마 카민스키 여단은 가혹행위가 덜했는데, 그들의 진격로에 보드카 양조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독일은 칼 자주박격포,슈투카,골리앗 등등의 무기를 가지고 와서 바르샤바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려고 했고, 하인리히 힘러는 이 전투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도 같다고 말했다. 힘러새끼는 민간인이랑 소련군이 똑같게 보였나 보다 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