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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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구에서 왕건이 혼자서 개고생하면서 도망가게 만들고 경주에선 경애왕을 경순왕으로 갈아치울정도의 역대급 리즈시절을 누리던 견훤은 930년 7월, 직접 무장한 병사 5천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공격하고 성주 홍술(弘述)을 죽였다. 5개월뒤, 교통의 요지였던 고창군을 점령하기위해 북진했고 살아돌아와서 재정비를 마친 왕건은 고창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견훤이 문경에 꽂은 지 애널써커 한명이 사벌주 일대의 호족들에게 온갖 깽판이란 깽판을 다부렸던 것으로 인해 견훤에 진절머리가 났던 고창 호족들은 왕건이 등판하자 주민들을 이끌고 왕건에게 귀부했다. 이들의 열성적인 지원을 받은 왕건은 후백제의 보급로를 끊고 고창군의 병산으로 가 3 ~ 4일간 후백제군과 접전을 벌여 후백제군 8천을 죽이는 대성과를 냈다.
고려는 이 전투로 인해 후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후백제는 여기서 고려한테 개쳐발린 뒤로는 전쟁에서 주도권은 개뿔 공들였던 상주는 통째로 왕건에게 넘어가고 진주의 왕봉규는 고려군에게 복날개패듯이 쳐맞고 나주는 또 따이고 그나마 이길뻔한 예성강 전투는 유금필때문에 좆망하는, 한마디로 샌드백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한편 후백제의 영향력이 사라진 신라는 서라벌과 그 인근의 동쪽 바다까지만 통치하는 초라한 국가가 되고 말았고, 결국 일리천 전투 직전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