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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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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나 확실하게 하고 가겠는데. 강태공이 쓴 책은 육도(六韜)도 삼략(三略)도 아니다. 게다가 지금 있는 것 마저도 위서이고 삼략은 장량이 받은 책의 저자가 강태공이라는 데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삼략은 일단 100% 아니고 육도도 후술하겠지만 전해져 내려오던 얘기를 누군가 책으로 정리한 정도일 듯. 애초에 이 할배, 기원전 12세기. 그러니까 갑골문 쓰던 시대 사람이다.

최고의 낚시꾼이다.

강태공은 어떤 사람인가?[편집]

주의! 이 글이 다루는 대상은 존나 미스터리합니다.
씨ㅡ발 뭐가 뭔지 몰?루겟소요. 무섭습니다. ㅠㅠ

성은 강(姜)이고 이름은 상(尙)이다. 남간에도 강상이라고 써있다. 그런데 사실은 여(呂)상이라고 불러야 맞다. 그의 조상이 우(禹)임금을 도와 치수 사업을 성공시킨 공로로 여(呂)땅에 봉해졌으므로 여씨가 되었다. 즉 아빠도 여~고 할배도 여~인데 여상만 강상이라고 불러야 하나?

암튼. 그의 자는 자아(子牙)이고 문왕이 상부(尙父)라고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또한 문왕의 아버지 태공(太公)이 오래도록 기다린 사람이라고 해서 태공망, 강태공이라고도 불린다. 그 밖에도 여망(呂望)이나 여아(呂牙)라고도 불린다.

팩트만 따지자면 강상이나 여상이라고 써야 맞지만, 강태공 쪽이 훨씬 유명하기도 하고 강태공 문서가 이미 있어서 그냥 내 맘대로 두 번이나 갈아엎었다. 강태공 문서 처음 만든 갤럼에겐 미안하다.

그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행히도 사망 기록은 있지만 고본죽서기년(古本竹書紀年)에 주나라 강왕(姜王) 6년(기원전 1073년)에 "태공망이 죽었다."라고 아주 간략하게 써있다.

또 울료자(尉繚子) 무의(武議)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강태공은 나이 70살에 은나라의 수도인 조가(朝家)에서 소잡는 백정짓을, 맹진(孟津)에서는 밥을 팔고 있었다. 나이 70이 다 되도록 그의 재능을 인정해 주는 군주가 없어서 나라를 위해 뭔가 의견을 내면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미친 틀딱꼰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왕을 만난 후, 전군을 이끌고 목야(牧野)에서 은나라에게 죽창의 맛을 보여주고 천하를 평정했다.

그리고 맹자(孟子) 이루(離婁)에는 대강

강태공이 은나라 주왕의 폭정을 피해서 동해에 살다가 문왕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천하의 존경을 받는 원로로 귀의했다.

정도의 내용이 실려있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아마 기원전 1140년에 70대 초반의 나이로 문왕을 만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것으로 그가 기원전1212년 정도에 태어났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말도 안되는게. 이게 진짜라면 이 할배가 139살까지 살았단 소리?

인공지능이 인간을 바둑으로 이기는 시대인 2016년의 의학수준으로도 인간 최고령은 117세인데? 아니 애초에 기원전 10세기에 인간이 70살을 산다는 소리도 충분히 허무맹랑한데? 믿지는 말자. 어디까지나 3000년도 더 전 얘기다.

문왕을 만나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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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알고 있는 "세월을 낚는 낚시를 하는데 왕이 갑골문 점 쳐보고 만나러 가서 스카우트 했다" 는 소리는 사실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그렇게 적혀있다.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 태공에게서 '성인이 주나라로 올 것이다. 주나라는 그의 덕택으로 일어나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대야말로 그 사람이다. 나의 아버지 태공이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 되었다.

사기(史期) 제태부세가(齊太夫世家)

주나라의 문왕이 사냥을 나가려 하였다. 그러자 사관 편(編)이라는 인물이 거북점을 쳐보고 말했다.

"위수(渭陽)에서 사냥하시면 큰 수확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용이나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나 곰도 아닙니다. 점괘에 나온 조짐은 바로 공작이나 후작이 될 만한 큰 인물입니다. 하늘은 주군께 스승을 보내 주셔서 큰 사업을 이루도록 돕게 하고, 3대 뒤에까지 이어 보필하게 할 것입니다."

문왕이 물었다.

"점괘가 참으로 그러한가?"

사관 편이 대답했다.

"저의 선조인 사관 주가 우임금을 위하여 점을 쳐서 명재상인 고요(皐繇)를 얻었을 때의 점괘와 비슷합니다."

문왕은 사흘 동안 목욕 재계한 다음, 수렵용 수레와 말을 타고 위수 북쪽으로 사냥을 나갔다. 그리고 거기서 강태공을 만났다... 후략

육도(六韜) 문도(文韜) 문사(文師)

사마천의 사기 외에도 낚시꾼으로 살다가 국무총리가 된 인생역전 스토리에 대해선 많은 얘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진 모르지만, 확실한건 틀 : 문무겸비가 전혀 아깝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뒷날 중국에서는 강태공을 병학(兵學)의 원조로 받들어 당(唐)나라 때는 문묘(文廟)엔 공자를, 무묘(武廟)엔 강태공을 모시기도 했다. 또 조금 나중으로 가서 그의 봉지였던 제(齊)나라에서 나온 관자(管子)나 사마법(司馬法)등의 법가나 병가 계열 책들에도 그의 영향이 있다고 보고 있다.

육도[편집]

육도는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호도(虎韜), 포도(graps), 견도(犬韜)의 6권 6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목에 붙는 도(韜)는 원래 칼집이나 화살통 등을 뜻하는 말이며 도(弢)와 같은 글자이다. 감추다, 창고 뭐 그런 뜻도 있는데 확대해석이 계속되어 지혜의 보고, 비책 같은 뜻으로 쓰였다. 결국 육도란 천하를 다스리고 군대를 움직이는 여섯 가지 비책이라고 할 수 있다.

육도의 내용은 기원전 12세기에 은(殷)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무찌르고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과 아버지 문(文王)이 강태공에게 정치와 전쟁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술할 위서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삼략[편집]

삼략(三略)은 진시황(秦始皇) 말기에 황석공(黃石公)이 태공망 여상의 병법을 한나라의 장량(張良)에게 전수해 준 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삼략 자체는 전술이나 계책을 의미하고 다른 의미로는 상략, 중략, 하략으로 나뉜 책의 구성을 뜻하기도 한다.

삼략의 저자는 책이 씌인 시대순으로 "수서 경적지,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나 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 등에 황석공 3권, 하비신인(下邳神人)지음"이라고 써있다. 무슨 뜻이냐면 삼략은 황석공이 하비성 흙다리 위에서 장량에게 준 책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때의 이위공문대에서 이정은 "장량이 배운 것은 육도와 삼략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히 근거가 있다. 그 근거는 모두가 아는 사마천의 사기이다.

뒤에 탁월한 전략가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장량은 자가 자방(子房)이며 원래 진시황에게 멸망당한 한(韓)나라 재상의 후손이었다. 그가 아직 젊을 시절의 일이다. 그는 전부터 시황제를 암살하여 부모와 조국의 원한을 풀려고 기회를 엿보며 돈을 탈탈 털어서 어쌔신을 고용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218년 진시황이 동쪽을 순회할 때 박랑사(博浪沙)에서 철퇴로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현상수배가 내려진 장량은 하비성으로 도주하여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한가로이 산책을 하던 장량은 변두리의 흙다리 위에서 허름한 틀딱충을 만났다.

그런데 그 노인은 가스통 꼰대인지 자기가 신고 있던 신발을 다리 밑으로 던지고 줏어오라고 똥개훈련을 시켰다. 장량은 당연히 짜증났겠지만 줏어다 줬다. 그러자 이번엔 신겨달라는 것이었다. 살인사건이 일어날 뻔했지만 노인은 원하는 대로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는 그냥 가버렸다.

잠시 후 그가 돌아와서 장량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가르침을 받을 만 한 놈이네. 닷새 뒤 아침에 여기로 나와라."

닷새 뒤 아침. 장량은 그 다리로 나갔는데 노인은 이미 있었다. 그러고선 넌 날 기다리게 했으니 실격이다 ㅉ 가라. 하고 그냥 갔다. 다시 닷새 뒤에 닭이 울자마자 나갔는데 또 있었다. 아니 노친네가 새벽잠 없는걸 어쩌라고? 어쨌든 장량은 한밤중에 다리로 나가 캠핑을 했고, 그 덕분에 노인보다 일찍 나와 있을 수 있었다.

다가온 노인은 책을 한 권 주면서 말했다. "이 책을 잘 읽으면 너는 제왕의 스승이 될 것이다. 또한 10년 뒤엔 새 왕조가 시작될 것이며 13년 뒤에 제북(濟北)의 곡성산(穀城山) 기슭의 누런 돌을 볼 것이다. 그게 나다." 하고는 그냥 갔다.

날이 밝은 후 책을 펴 보았는데 그것은 태공병법이었다. 장량은 언제나 그 책을 가지고 다니며 공부했다고 한다.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

삼략의 저자도 강태공이 되긴...하지만... 찜찜하기 그지없다. 실제로 삼략을 읽어보면 육도와 문체나 어감이 확실히 다르다. 옛날하고야 다를 수도 있지만, 문답으로 이루어진 육도에 반해 삼략은 군참이 어떻고... 하면서 그걸 해석하는 식이다. 물론 군참이 뭔지는 모른다. 기록이 없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황석공의 주작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생각해 보기도 한다.

육도는 주작이다.[편집]

육도 삼략이 강태공 저서라고 전해져는 왔지만, 그냥 나중에 누가 그의 이름을 빌려서 주작한 것이 틀림없다.

먼저 육도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전국시대의 장자(裝子) 서무귀(徐無句)의 금판육도(金版六弢)이다. 그런데 나중에 사마표(司馬彪)와 최선(崔譔)은 모두 이 책이 주서(周書)중 한 편이라고 써놨다.

그 다음으로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육도가 병가에 속하지 않고 유가에 속해 있고 주사육도육편(周史六弢六篇)이라고 써놨다. 한서에 주석을 단 안사고(ahnsaGo)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육도를 설명하고 있다. 천하를 다스리고 군대를 움직이는 법을 설명한다.


그런데 다른 책인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의하면 병가에 속해 있고 태공육도오권(太公六韜五券)이라고 써있다. 그 구절에 붙어 있는 반고(班固)의 주석에는


양 6권. 주나라 문왕의 스승 강망 지음


이라고 써있다.

이게 뭔...? 한서는 아니라고 하고. 수서는 맞다고 하고. 다른 책 말하는겨 지금?

이에 대해 두 가지 의견이 있다.

1. 한서에 기록된 주사육도는 전국시대에 있었던 다른 책일 것이며 안사고가 게슈탈트 붕괴가 와서 육도랑 같다고 써재꼈다.

2. 한서에선 주사육도를 유가에 넣었고 수서에서 태공육도를 병가에 넣었다는건 분명히 달라도 엄청 다른 책이다.

당연히 안사고가 책을 헷갈릴 정도로 멍청이일 리는 없으니 2번이 더 맞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육도는 수서의 기록대로 강태공이 쓴 책인가? 책을 읽어보면 엄청나게 많은 고증상의 오류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육도가 위서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1. 그 때에 쓰지 않았던 명칭을 쓴다.

용도. 입장 편에서 "정전(正殿)을 피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춘추전국시대 이후에나 쓰는 표현이다.

우리가 아는 그 장군(將軍)이란 호칭도 춘추시대 말기에 쓰여진 좌전(左傳)에 처음 나오는 표현으로 당연히 700년 전에 있었을 리가 없다.

2. 주나라 초기엔 없었던 전략전술, 무기, 장비가 등장한다.

강태공 시대의 전쟁은 전차전이 주류였고 말에 직접 타서 싸우는 기마전은 전국시대 이후에야 점차 나타나는데도 이 책에선 기마전에 대해서 엄청나게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사무충진이나 오운진 같은 진법도 전국시대 이후에 쓰인 진법이다.

게다가 육도엔 철제 병기도 등장한다. 중국은 기원전 6세기 경에 제철이 시작됐지만 진시황 때까지도 청동기를 썼다. 그런데 기원전 1000년대에 뭐요? 철기?

공성전에 쓰이는 운제나 비루같은 장비들이 나오는데 이는 전국시대 이후에 발명된 무기들이다.

3. 12율관(津官)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토대로 하는 천인감응(天人感應)과 참위(讖緯)가 등장한다.

문과생들은 윤사, 세계사 시간에 배우겠지만 이는 전국시대 이후 음양가가 등장한 이후에 만들어진 사상이다.

결론적으로 육도는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설 시기에 한 이름 없는 전략가가 강태공의 이름을 빌려서 구전되어 오던 일부 설화와 주나라 초기부터 전국시대 말까지의 병법들을 바탕으로 만든 병서로 볼 수 있다.

다른 의견[편집]

진한교체기가 아니라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인 한위(漢魏)이후 진송(晉宋)때의 주작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1972년 산동성 임기(臨沂)에서 출도된 은작산(銀雀山) 한묘(漢廟) 죽간(竹簡)가운데 육도의 댓조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한나라 초기에 은작산 한묘의 관뚜껑에 리벳접합 하기 전에 육도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늦게 잡아도 한나라 초기엔 육도가 있어야 한다.

삼략도 주작이다.[편집]

삼략의 지은이와 저술 연대를 알기 위해서 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다른 기록들과 비교해 보면, 수서 경적지보다 앞에 나온 한서 예문지엔 황제부터 한신까지 53명에 이르는 싸움신들의 이름이 써있다. 그리고 그들이 쓴 병서도 800편 가까이 된다. 그런데 거기엔 황석공이나 육도, 삼략이란 책 이름도 안 나온다. 애초에 사기도 자료부족으로 많은 부분이 신화스럽긴 하지만 장량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황석공이나 강태공의 저서가 나오지 않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렇게 앞의 의혹 다 빼면 "장량이 강태공의 병서를 공부했다."정도만이 팩트로 남게 된다.

물론 이건 진짜일 것이다. 한서 예문지 도가(道家)편에 강태공 여상의 저서로 모(謀)81편, 언(言)71편, 병(兵)85편이라는 237편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글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장량이 이중 병만 배웠다고 해도 85편. 반토막 내도 40편이 넘는 꽤 많은 양을 공부한 셈이 된다.

그렇다고 육도나 삼략을 공부했단 소리는 아니다. 사기엔 장량이 받은 책이 태공병법이지 삼략이라고는 안 써놨다. 이건 뭐 엿먹으란건가.

다른 의견[편집]

송나라의 장상영은 황석공의 소서(素書)에 주석을 달면서 "이 책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도굴꾼들이 장량의 무덤을 파내서 꺼낸 책인데. 이게 바로 장량이 황석공한테 배운 병서야!"라고 써놨다.

이건 지금 그 주작이 판친 역사왜곡의 한 축을 담당하는 소서가 팩트라는 전제 하에 주석을 달아둔 것인데. 소서 이전에 황석공이 실존인물인지 어쩐지도 모르니 소서는 주작이고 장상영의 주장도 헛소리다.


결론[편집]

강태공이란 인물이 실존했고 그가 쓴 병서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육도와 삼략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며 나중에 누군가 정리해 둔 주작도서에 불과하다. 재미는 있으니 시간되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