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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쿠레키리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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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카쿠레키리스탄(隠れキリシタン)이란, 에도 시대 말기 금교령이 선포된 이후의 일본인 기독교 신자를 의미한다. 쉽게 말하자면 말 그대로 숨음(隠れ,かくれ)+크리스천(キリシタン、christian)의 합성어로 '숨은 크리스천'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들에 대한 분류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 1. 기독교를 믿지 않는 것처럼 위장한 기독교 신자인 '잠복 키리시탄(潜伏キリシタン)'
  • 2. 금교령 해제 이후에도 카톨릭으로 복귀되는 것을 거부한 채 독자적으로 믿음과 교리를 이어가고 있는 '카쿠레키리시탄(カクレキリシタン)'[1]

이 둘을 합쳐 카쿠레키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이라 한다.[2]

이전부터 일본 내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 정책이 있어왔으나,[3]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오카모토다이하치 사건(岡本大八事件、おかもとだいはちじけん)'을 계기로 막부는 기독교에 대한 금교령을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기독교를 믿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에서 가짜로 포기하고 믿음을 계속 이어갔다. 그렇게 비밀리에 믿어가다 1865년 3월 17일 베르나르 타데 프티장(Bernard-Thadée Petitjean)이란 프랑스 출신의 카톨릭 선교사와 접촉하여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에도 각지에서 기독교 신자들을 발견하게 되었으나, 메이지 정부는 계속해서 이들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열강의 외압을 많이 받게된 메이지 정부는 1873년 '크리스천 금교령(キリシタン禁教令)'을 그만두었고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외국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을 통해 대다수의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카톨릭으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카쿠레키리시탄(潜伏キリシタン)'들 중에서도 카톨릭으로 복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계속 믿음을 이어온 자들도 있는데, 이들이 현재까지 일본에 존재하는 '카쿠레키리시탄(カクレキリシタン)'이다.[4]

이해를 위한 간략한 일본 기독교의 역사[편집]

카쿠레키리시탄의 역사는 곧 일본 기독교의 역사를 의미하며, 금교령의 역사와도 겹친다. 따라서 먼저 일본의 기독교 역사를 대강 알고있다면 카쿠레키리시탄의 역사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쉬워지므로 이 문서에서는 먼저 간략하게 일본의 기독교 역사, 그 중에서도 금교령을 중점으로 설명한 뒤, 카쿠레키리시탄의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먼저 일본에서 기독교가 언제 전파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de Xavier 또는 Francisco de Jasso y Azpilicueta) 일행이 규슈에서 서일본, 긴키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을 당시 일본에서는 '바테렌(伴天連、バテレン)'이라 불렀는데, 오다 노부나가 등 다이묘들은 이들에 대해 우호적이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초기엔 기독교에 대해 박해를 하지 않았다.[5] 따라서 에도 시대에 들어서더라도 초기에는 기독교에 대해 탄압이나 박해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1587년, '바테렌 추방령(バテレン追放令)'을 계기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제제하기 시작했다.[6] 하지만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기독교를 믿는 것은 허용되며, 300정, 2000관 이상의 다이묘가 기독교를 믿으려 할 때엔 조정과 막부에 보고하여 허락받는 식으로 자기의 의지대로 신자가 되는 것은 가능했다. 또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제한적이지만 계속해서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바테렌 추방령에 불구하고 기독교 신자의 수는 나날이 늘어만 갔다.

그러던 중 1596년 10월, 산 펠리페 호 사건(サン=フェリペ号の事件、San Felipe)이 발생한다.[7] 그 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2월 8일에 다시금 금교령을 공포했으며,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에서 카톨릭 신자 26명이 십자가형(磔)[8]을 받게 되는 일본 26 위 성인(日本二十六聖人)이 일어났다. 이는 기독교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인 신자와 서양 선교사들을 최초로 국가에서 처형했다는 점에서 기독교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기독교는 금지되었으나 교토의 프란치스코회만 탄압하였지 다른 프란치스코회에 대해 탄압하지 않았으며, 일반 신자들이 믿는 것에 대해서는 강제적으로 개종시키지 않고 개인의 의지라 하며 별다른 박해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본격적으로 박해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609년

피곤해서 나중에 씀.

카쿠레키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의 역사[편집]

작성을 위한 자료 수집 및 확인 중.

각주

  1. 2번에 해당하는 용어는 가나 표기가 원칙이다.
  2. 편의상 1번에 해당하는 카쿠레키리시탄은 潜伏キリシタン로 표기하며, 2번에 해당하는 카쿠레키리시탄은 カクレキリシタン로 표기함.
  3. 1587년 바테렌 추방령(バテレン追放令)이나 1596년 금교령 같은 사건들이 같은.
  4. 일본국 헌법 제3장 20조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에 이들을 '카쿠레키리시탄(カクレキリシタン)'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편의상 '카쿠레키리시탄(カクレキリシタン)'이라고 부르고 있다.
  5.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는데, 먼저 모든 다이묘들이 선교사들과 선교 활동에 대해 우호적이였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스오국(周防国)의 다이묘였던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와 衆道(若衆道)라고 불리는 활동에 대해 논쟁을 벌인 일화도 있다는 설도 있으며, 남만인과의 교류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고 했던 계산적인 의도도 없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많은 다이묘들이 남만인들을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금교령 이전까지 선교 활동이 활발했던 점을 미루어보아, 이들에 대한 대다수의 다이묘들은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고 사료된다.
  6.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러한 탄압을 하게 된 이유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 1. 기독교의 확장이 '잇코 잇키(一向一揆)'와 같이 종교적인 반란이 발생할 것에 대한 우려
    • 2. 규슈 등에서 나타나는 기독교 다이묘에 의한 불교와 신도 신자들을 박해
    • 3. 당시 남만인(포르투칼)들이 일본인을 노예로 파는 것을 막기 위해
    • 4. 국가 통제를 위하여 남만과의 외교권, 무역권을 집중하기 위해
    등 여러 설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든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바테렌 추방령을 계기로 기독교에 대한 제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7. 산 펠리페 호 사건이란, 스페인의 갤리온인 '산 펠리페 호'에서 이름을 땄는데, 스페인의 무역선이 폭풍으로 일본에 표류하였고, 이 과정에서 산 펠리페 호의 승무원들은 선원들은 화물을 압수당하고 구금을 당하게 되었고,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포르투칼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 "스페인 사람들은 해적들이며,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여 식민지를 만든 것처럼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측량작업을 하러 온 것이다."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듣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스페인 총독에게 조난자를 구출하겠다는 말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자 화가 난 항해장인 데 오란디아(デ・オランディア, 스페인어는 못찾음)가 지도를 보여주며, 스페인은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며, 일본이 작은 나라라는 것을 말했다. 또한 문답에서 스페인의 국왕은 선교사를 세계에 파견하여 포교와 동시에 정복을 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라는 발언을 하였고,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금교령을 다시 발령하여 선교사들의 활동과 기독교 신자를 탄압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 기독교사에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이며, 일본이 서양 사람들을 그저 남만에서 온 사람들이란 뜻인 '남만인'이란 생각에서 벗어나 스페인과 포르투칼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다른 서양의 세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 그 외에도 기독교 교단이 다양하다는 점을 의식하게 되었고, 이는 쇄국정책을 펼칠 때에도 중요하게 작용되었다.
  8. 로마 제국에서 시행한 사형방식과 유사하나, 보통 창으로 찔러 죽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와는 관련이 없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