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중국 티베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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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52.35.189 (토론)님의 2017년 5월 9일 (화) 20: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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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짬뽕, 탕수육, 깐풍기, 팔보채, 양장피, 마라탕, 탕후루 존나게 먹고싶다 해!
췐궈 쭈이따더 메이뉘 루오리아오 지에다이쫑씬 썅씨엔라!

개요[편집]

청조의 멸망 이후 중국 군벌과 티베트 군인들은 땅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티베트는 중국 군벌 중 하나를 이기고 쓰촨성 서부지역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였지만 다른 중국 군벌들과의 대결에서는 계속 져서 도로 가지고 있던 땅을 좀 잃었다.

티베트는 무기를 수입하고 영국인 장교를 교관으로 티벳군을 근대적으로 훈련시키고 중일전쟁을 방관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들은 중일전쟁을 개꿀로 여기고 중국과의 어떠한 협조도 거부했다.)

중일전쟁이 최종적으로 중국의 승리로 끝나자 티벳은 난징으로 대일승전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그리고 영토 분쟁도 좀 해결하자고 했다.

장제스는 중일전쟁 때 국경을 열어 달라는 요구를 거절한 티베트에 대해 존나 빡쳐 있었지만 갑자기 쩌둥이가 설쳐서 뭔가를 할 여력도 없이 좆됐다.

중국 공산당은 의외로 한족 새끼들도 살고 있는 지역들을 제외하면 소수 민족들이 독립을 하든 말든 그렇게까지 큰 관심이 없었다. 외몽골 회복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좆제스 밑의 민족주의자들은 죄다 먹어야 한다고 지랄을 했었지만 중국 공산당의 헌법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었다. "중국 정권은 중국 내의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하고 각 약소 민족들이 중국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립된 나라를 세울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몽골족, 회족, 티베트족, 묘족, 광서장족, 고려인 등 중국경내의 모든 소수 민족은 중국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하든지, 벗어나든지, 아니면 자신들만의 자치 구역을 건설하던지는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에 달려 있다." 후에도 중국 공산당 새끼들 노오오오오력 했으면 사실 먹을 수 있는 영토가 조금 더 있었는데, 딱히 노오오력을 하지 않는다.

근데 티벳 성님들 같은 경우엔 영토 문제가 분명했다. 왜냐면 티벳 성님들이 중국 군벌들과 싸우다 먹은 영토엔 한족들과 그리고 혈통 문제가 좀 있기는 하지만 지네 집안 역사나 전통, 문화가 한족에 가까운 편이라 자신들을 중국인으로 생각하는 민족들도 있었다. 당연히 중국 공산당은 영토 교환을 하거나 그 영토를 뱉으라고 지랄했다. 하지만 티벳 민족주의자 성님들은 별로 뱉고 싶지 않았다. 미 국무성은 이 분쟁에 대해 "미국은 티벳에 대한 중국의 적법한 주권을 침해할 의사가 없다"라고 선언했다.


마오쩌둥은 티벳과 전쟁을 하기 전에 티벳 내 그러한 인민들에게 중국을 도우라고 호소했다. 당연히 그놈들은 티벳과 중국의 전쟁이 시작되자 바로 중국의 편에 붙었다.

그리고 티벳에는 봉건제와 농노제가 있었고 심심하면 높으신 분들은 심심하면 존나 쩌는 형벌을 가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티벳의 높으신 중들과 귀족들의 생각과 다르게 농노들은 민족주의에 불타지 않았다.


전쟁[편집]

마오쩌둥은 중국군 내에서 존나 짱인 펑더화이에게 티벳을 조지라고 했다. 근데 펑더화이는 자기 군대를 끌고 가서 티벳을 공격하는 건 무리라고 했다. 그는 중국군의 보급 능력이 후져서 준비를 마치려면 적어도 2년은 걸린다고 했다. 당연히 2년이란 애미뒤진 시간을 기다릴 생각이 없는 쩌둥이는 어쩔 수 없이 덩사오핑과 류보청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병력은 약 3 ~ 4만명에 달했다. 존나 쩔게도 중국엔 아직까지도 기병 부대가 꽤 있어서 말 타고 티베트로 향했다.


하지만 티벳은 더 병신이었다. 티벳은 무기를 좀 수입하기는 했지만 어떠한 근대적 전략전술, 훈련도 거의 알지 못했다. 사관학교도 없었고 장교들도 정말로 아는 게 없었다. 참호조차 제대로 팔 줄 몰랐다. 심지어 작전 수립 대신 점을 치고 길일을 선택해 싸웠다. 티베트군은 그 옛날 미개 군대 그 자체였다. 물론 중국군도 모든 장교들이 근대적인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새끼들 전통 병법에는 근대적 군사학과 이론의 원리나 방향이 같은 것들도 있어서 근대 교육을 받지 못하여 존나 무식한 새끼들도 그럭저럭 연계에 성공하고 근대적 군대처럼 싸웠다.


중국군은 5개의 공격로를 통해 삼면에서 포위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첫번째 공격목표는 동쪽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티벳군 사령부가 있는 참도였다. 티벳 역시 지형상 중국군이 공격할 곳이 뻔하니까 병력의 대부분을 참도와 진사강 주변에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들은 중국군의 서진을 막기 위해 산악지대의 입구와 도로에 지뢰를 매설하고 교량을 폭파시켰다. 중국 지휘관들은 보고를 받고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 씨발을 외치며 세부적인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쩌둥이는 솔까 지형상 입막이 좆같으니 내부부터 공략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쩌둥이가 애국페이를 동원하자 티벳 내 중국인들은 존나게 분탕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국군 제18군단 산하 선견대를 움직여 북쪽과 남쪽 두갈래로 참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또한 14군단 125연대와 126연대 역시 윈난성에서 북상을 시작했다. 참도의 티벳군 사령부에는 중국군 선견대가 이미 국경을 돌파하여 이동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티벳 지배 계층들은 주화파와 주전파로 갈라져 논쟁을 벌였다. 주화파는 ㅅㅂ 질 것 같은데 걍 중국에 유리하게 협상 좀하고 티벳 정도나 건지자고 주장했다. 주전파는 티벳인의 용맹성과 티벳 지형빨로 중국군 따위야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일치단결만 한다면 말이다. 문관들은 대부분 주화파였고 군부는 주전파였다. 그리고 주전파가 이겼다. 결정을 내리고 티벳군은 어처구니가 없게도 점을 쳤다. ㅅㅂ ㅋ ㅋ 티벳군은 점을 쳐본 결과 7월 초에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ㅋ ㅋ 중국군은 진격하면서 티벳 입구 근처에서 중국인이여 모두 모두 모여라!를 시전하고 중국측에서 티벳에 대항하게 했다. 작전 계획은 참도를 철저하게 포위섬멸하여 그들이 라쌰로 퇴각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한번의 전투만으로도 승패가 거의 갈리게 될 것이다.


중국군은 진격하며 참도 동북쪽 161km 지점의 교통의 요충지인 뎅코​(Tongkhor, 登柯)를 점령했다. 참도 총독이자 수비 대장인 르하루는 700명의 병력으로 뎅코를 재탈환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중국군을 선제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윗대가리들에 의해 거부되어 수비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티벳 윗대가리들 생각에 의하면 그건 존나 위험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르하루를 임기가 만료되었다는 이유로 면직시키고 고위 귀족인 아페 아왕 직메를 신임 참도 총독에 임명하였다. 그 귀족놈은 참도 외곽의 방어선을 강화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병력을 대폭 늘려 참도에 병력을 모아 1만 7500명까지 모았다. 그는 병력을 분산 배치하고 약 절반인 8천여명을 참도에 배치하였다. 하지만 이 작전도 중국의 포위 작전에 제대로 걸린 건 마찬가지였다. 중국군은 존나게 뛰어서 진사강 서안을 빠르게 점령하고 군용도로를 건설하는 한편, 약 320km에 걸쳐 참도를 삼면에서 포위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었고 티벳군은 이미 좆됐다.


9월 16일 인도에서 주인 중국대사와 티벳 대표단이 만났는데, 중국은 우덜이 존나 쩔게 포위했으니 걍 항복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주장했다. 티벳 대표단은 엿이나 먹으라고 했지만 중국의 요구를 부분 수용할 것을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물론 뻥이었고 시간을 끌기 작전이었다. 중국 첩자의 보고에 의해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마오쩌둥은 걍 공격하라고 했다. 중국의 제52​사단 제60연대가 뎅코를 공격해 재차 점령하였고 중국군이 서쪽에서 공격하리라 예상했던 티벳군은 뜻밖에도 중국군이 참도 북쪽으로 진격해 오자 겁을 먹고 도주해 버렸다. 이 때문에 참도 북쪽은 텅 비게 되었다.


중국군은 참도를 공격하기전 사전 정찰을 실시하여 티벳군의 병력 배치 상황과 전력 실태까지 파악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티벳군은 참도 전면에만 병력을 배치했을 뿐 남쪽은 취약했다. 병력은 중국군이 보기에 별 목적도 없이 광범위한 지역에 분산배치(티벳 사령관은 뭔가 생각이 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망상에 불과했다.)가 되어 있었으며 방어 태세도 형편없었다. 장궈화는 참도를 정면공격하는 한편, 배후로 우회하여 세방향에서 포위섬멸하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중국군의 조직적인 공격을 받자말자 티벳군은 순식간에 무너져 뿔뿔히 흩어졌고 대부분은 항복하였다. 중국군은 생각보다 변변한 지도도 없었고 4천m의 고산지대를 행군하면서 온갖 고난을 겪었다. 그럼에도 티벳군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은 채 일일 진격속도는 무려 40km에 달했다. 싸우기로 한 티벳 지배층들의 생각과 달리 티벳군은 너무나 형편없어서 길막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중국군이 빠르게 포위해 오는데도 참도의 티벳 사령부는 10월 11일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물론 알아봐야 이들은 이런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게 없어서 걍 대책도 없었다. 10월 16일에는 참도 북쪽의 리웨체가 함락되었다. 이런 불길한 상황에서도 티벳 지배층들은 낙관주의와 함께 정신승리나 하며 린카절(林卡節, 봄이 왔다는 것을 즐기는 티벳 전통 명절)이나 즐기고 있었다. 10월 17일, 참도 총독 아페 아왕 직메는 참도를 버리고 후퇴를 결정했다. 그는 중국군에게 전령을 보내어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과 안전한 철수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중국군은 어이를 상실했다. 미친 놈들이 싸우자고 할 때는 언제고 불리한 상황에 저런 요구나 하고 있었으니... 이미 퇴로는 차단되어 있었고 그들은 얼마가지도 못한 채 모조리 포로가 되었다.


참도 외곽을 지키고 있던 제9가뽄도 반란을 일으켜 중국군에게 투항했다. 이들은 형식상으로 제대로 된 티벳 정부의 수립을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봉건제와 농노제를 혁파하겠다고 약속했다. 10월 19일 4시, 참도는 함락되었다. 티벳은 6개 가뽄이 섬멸되었고 3개 가뽄이 큰 손실을 입었고 1개 가뽄이 투항했다. 참도 전투에서 티벳군은 18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6천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중국군의 손실은 고작 114명에 불과했다. 티벳은 사실상 끝장이었다. 이미 작전에서 철저하게 져서 뭘 할 수가 없었다.


사실상 망한 상황에서 티벳 지배층인 중들이 선택한 길은 신탁에 물어보는 것이었다. 신탁은 대답했다. 중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불경을 외워라, 더욱 신앙심을 가지고 기도를 열심히 올려라. 아마 신탁을 내린 땡중놈이 정신이 나갔나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참도를 점령한 중국군은 라쌰를 향해 무자비하게 진군했다. 포로가 된 티벳 병사들에게는 여비를 지급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귀족들 역시 그들의 지위에 맞게 대우하였고 특히 참도 총독 아페 아왕 직메에게 높은 자리를 주겠다는 약속으로 회유하였다. 그는 중국에 투항하라는 서한을 라쌰로 보내고 이제는 철저하게 중국 공산당에 붙었고 덕분에 참도인민해방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될 수 있었다. 사실 많은 수의 티벳 주전파였던 귀족들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권력과 대접이었고 승리한 중국군이 그들이 원한 것을 주자 티벳의 주전파들도 이제는 철저하게 승자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런 면에서 중국 공산당은 상당한 냉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이긴 상황에서 자신들에게 격렬히 저항하고 아주 무례하게 나왔고 다른 민족 소속에다 무능력하기까지 한 패자를 대접하기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승자인 자신들의 공 혹은 같은 민족인 사람들의 자리를 챙겨줘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중국 지도부들은 패배자인 참도총독이자 티벳 동부사령관이었던, 참도 함락 후 민족과 나라를 배반하고 중공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그에게 인민해방군 중장 자리와 1급해방훈장을 수여했다. 또한 시짱자치구 인민위원회 주석, 전인대 민족위원회 주임위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 부주석 등 고위 직책을 주었다. 티벳의 다른 지배층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패배하였으나 오히려 티베트를 넘어 중국 내부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티벳군의 주력이 한방에 섬멸당했지만 티벳 정부는 기도나 하고 있는 주제에 아직까지도 항복을 거부했다. 티벳정부는 유엔에 중국 침략을 제소하고 국제사회의 도움을 호소하였다. 티벳은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엔이 무력으로 개입해 주기를 원했다. 엘살바도르가 의제 상정에 찬성했지만, 미국과 관련이 깊었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국가 중 하나인 영국이 반대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도 티벳은 유엔 회원국이 아닐뿐더러 중국의 영토라는 사실은 세계가 다 아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유엔은 "티벳은 중국의 소관"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섭정 타탁 린포체가 물러나고 티벳 의회는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친정을 결정했지만 티벳 정부는 이미 붕괴되고 있었다. 귀족들은 인도와 네팔로 도주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과의 협상을 진행하되 만약 결렬되었을 때를 대비해 부탄 국경에 있는 작은 마을 드로모로 탈출하기로 하였다. 달라이 라마가 중국군의 포로가 된다면 티벳은 저항을 이끌 정신적 지주를 잃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포탈라 궁전의 지하금고에서 수백만 달러의 금은을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였다. 이 돈은 나중에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탈출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자금으로 활용된다. 12월 16일 달라이 라마가 티벳 국새를 들고 라쌰를 탈출하자 티벳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달라이 라마 다음의 서열 2위인 판첸 라마는 종교적으로 달라이 라마와 맞먹는 위치에 있었지만 중국의 편이었다.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를 찾아서 달라이 라마로 인정하는 것이 역할로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부주석 주더와 티벳 대표단, 판첸 라마 사이에 중국과 티벳의 관계를 규정하는 "17개조 협정"의 조인식이 열렸다. 결과적으로 티벳의 주권은 중국에게 넘어갔다. 티벳군은 해체되었다. 티벳군은 아직 전력이 남아 있었지만 저항할 생각은 없었다. 결국 장궈화의 제18군단 사령부가 라쌰에 들어왔다. 당, 정, 군을 합해 약 2만명에 달했다. 티벳군은 단지 이를 지켜볼 뿐이었다. 중국군은 12월 말까지 더 이상 아무런 유효한 저항을 받지 않고 티벳 전역을 손쉽게 점령하였다. 이로서 라쌰는 중국에 점령되었고 주권국으로서의 티벳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