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위키
조무위키
둘러보기
대문
최근 바뀜
임의의 문서로
미디어위키 도움말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행위
문서
토론
편집
역사 보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편집하기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이집트사}} {| class="wikitable" ! colspan="5" style="text-align:center;background-color:#BDB76B; color:#A0522D" | '''{{크기|4|[[이집트|{{색|#A0522D|이집트}}]]의 역사}}''' |- | style="text-align:center;background-color:white; color:black"| [[아르게아스 왕조]] | style="text-align:center;background-color:white; color:black"| → | style="text-align:center;background-color:#4682B4; color:white"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style="text-align:center;background-color:white; color:black"| → | style="text-align:center;background-color:white; color:black"| [[로마 공화국]]<br>([[아이깁투스]]) |} {{고대 이집트}} == 개요 == [[기원전 305년]] ~ [[기원전 30년]] [[알렉산드로스 3세]] 사망 이후 건국된 [[디아도코이]](후계자) 왕조 중 하나. 고대 [[이집트 문명]]에 세워진 왕조로, '''이집트 문명 최후의 왕조이다.''' == 역사 == 건국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구원자'(소테르). 이 사람의 시조 이름을 따서 라고스 왕조라고도 하며 고대 이집트 32 왕조라고도 한다. 이집트를 지배하는 군주가 [[파라오]]라는 명칭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왕조로 이후의 지배자들은 파라오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부하들 사이에서는 제국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각자의 왕국를 세워 분리할 것인가를 두고 한바탕 전쟁이 벌어졌다. 여기서 제국분리파가 승리를 거둔 끝에 제국은 분리되는데 마케도니아 본국의 안티고노스 왕조, 아시아 영역을 차지한 셀레우코스 왕조, 그리고 이집트를 기반으로 삼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끝까지 남아 3왕국이 성립된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에 기반을 잡은 후에는 디아도코이들 사이에서 절대 강자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술수를 부렸다. 그 결과 이집트를 넘어 소아시아 일부와 키프로스 섬, 코엘레-시리아(현재의 다마스쿠스 부근)까지 영역으로 삼고 동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셀레우코스 왕조와 대결을 벌여 프톨레마이오스 3세 때는 바빌론까지 셀레우코스를 밀어내는 위업을 세웠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4세 때부터 나라에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 당시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주 '대왕' 안티오코스 3세의 뻘짓(당시 이집트 섭정이었던 소시비우스의 거짓 항복에 낚임+라피아 전투 때의 삽질)로 인해 한숨 돌렸지만 끝끝내 해외영토를 전부 상실했으며 소수의 지배계층인 그리스-마케도니아 인들과 토착 이집트인들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해 20년 넘게 내부에서 반란이 벌어졌다. 군사력을 한정된 그리스-마케도니아 인들로 유지하고 있었고, 그나마 있던 군사력도 셀레우코스 왕조와 시도 때도 없는 전쟁을 벌인 결과 전부 소모되어 일반 민중과 유리되어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급속히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지배층 사이의 암투와 내분, 곳곳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착취로 인해 마지막 군주인 [[클레오파트라]]가 태어나기 수십년 전부터 왕조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왕조가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생명연장의 꿈을 이뤄주진 못했다. 결국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이집트가 황제령으로 통합되면서 사라졌다. == 정치/사회 == 고대 [[이집트]]는 매우 오랜 역사(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건국되기 전에도 이미 수천년의 긴 역사를 자랑했다)에 폐쇄적인 환경으로 전통 문화가 오랫동안 남아있는 곳이었다. 여기에 페르시아 제국의 관용정책 덕분에 전통적인 지배계층인 사제 계급은 그대로 남아 막강한 권력과 권위를 누렸다. 따라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지배를 수월히 하기 위해 이들 사제 계급과 손을 잡았다. 전통 이집트 종교의 신전들을 건축하고, 그 신들에게 경배를 올렸으며 대중앞에 나설 때는 항상 고대 파라오의 복식을 갖추었다. 여기에 더해 고대 이집트의 풍습을 따라 모든 왕들은 친누이와 결혼하는 근친혼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마케도니아 인이라는 자부심과 정체성, 바르바로이와 그 문화에 대한 경멸은 버리지 못했다. 역대 군주들 중에서 토착 이집트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사람이 [[클레오파트라 7세]]뿐이라는 게 그런 단면을 말해준다.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동부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어 학술과 예술, 헬레니즘 문화가 번성하는 메카이기도 했다. 소수인 그리스-마케도니아 인들은 토착 이집트인들과 혼인하여 혼혈 집단을 만들기도 하고 헬레니즘 식으로 교육받은 이집트 인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열쇠였던 [[로제타 석]]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 때 만들어진 유물로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사제들에게 베푼 은혜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이 비석에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 상형문자를 간략화시켜 일반 민중이 생활에 사용한 민중문자, 그리고 고대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어서 상형문자 해독에 큰 역할을 했다. == 역대 파라오 목록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파라오}} == 둘러보기 == {{기원전 4세기}} {{기원전 3세기}} {{기원전 2세기}} {{기원전 1세기}} {{2015 개정 교육과정 세계사 4단원-1}} [[분류:세계사]]
요약:
조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CC BY-SA 4.0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무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2015 개정 교육과정 세계사 4단원-1
(
편집
)
틀:고대 이집트
(
편집
)
틀:기원전 1세기
(
편집
)
틀:기원전 2세기
(
편집
)
틀:기원전 3세기
(
편집
)
틀:기원전 4세기
(
편집
)
틀:색
(
편집
)
틀:알림 상자
(
편집
)
틀:이집트사
(
편집
)
틀:크기
(
편집
)
틀: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파라오
(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