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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개정 교육과정 세계사 4단원-1}} 정식 이름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그누스는 위대한(The Great)란 의미로 알렉산더 대왕에게서 따온 별명이다. [[분류:역사 속의 인물들]] == 생애 == 고대 로마의 정치인이자 군인. [[카이사르]], 크라수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에 참여했다가 크라수스 사후 카이사르와 대립하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이룩했던 걸 홀랑 다 까먹고 죽었다. 마리우스와 술라가 한창 대립하던 로마 내전 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여러곳의 마리우스파 세력을 제압하며 그 이름을 떨친다. 히스파니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한 후 로마로 돌아오던 도중 마침 노예반란을 일으켰다 크라수스에게 진압되어 도망치던 스파르타쿠스의 잔당과 마주치고 그들을 추격해 6~7천명을 전사시켰다. 이걸로 자신이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했다고 뻥튀기를 시전해 원로원에서 인정받고 개선식을 치뤘다. 그런데 문제는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은 크라수스가 다 했던 것이고(처음에는 평범한 산적떼 소탕으로 보고 소규모 병력을 보냈으나 다 털리자, 빡쳐서 집정관 2명에게 2개 군단을 주어 보냈으나 이것도 격파당하자 그 아래의 수석 법무관 자격이었던 크라수스가 나섰다. 원로원에서 받은 돈에 자기 사비를 들여 총 8개 군단을 편성해 반란을 진압했다), 폼페이우스는 그냥 숟가락만 얹은 꼴이라 전공을 가로챈 셈이 되어 크라수스와 관계가 악화된다. 더군다나 술라가 이른바 '명예로운 경력'을 밟기 위한 각종 요건과 자격을 강화시킨 상태였으나 폼페이우스는 이걸 전부 무시한 상태에서 군을 지휘했기에 명예로운 경력을 제대로 밟고 있던 크라수스 입장에선 더 열받는 상황. 이후 크라수스와 함께 29살의 나이로 집정관에 선출된다. 집정관에 선출되자 지중해 일대에서 해적소탕 작전을 벌여 3년임기로 주어진 일을 3개월만에 일을 다 끝내는 위엄을 보이고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까지 제압한다. 근데 이 폰투스 제압도 전임자였던 루쿨루스(식탁의 사치로 유명하다. 집에 있을 때 손님이 없어 하인이 간단한 요리를 내왔더니, '오늘은 루쿨루스가 루쿨루스의 집에서 만찬을 하는 거다.'고 호통쳤다는 일화가 있다)가 폰투스와 그 동맹국인 아르메니아의 군대와 자산을 다 소모시켰기에 어찌보면 이것도 숟가락 얹은 꼴. 물론, 폼페이우스의 능력이 없었다면 폰투스를 제압하는 건 힘들었을 것이다. 폰투스를 안정화시킨 후 내친 김에 시리아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던 셀레우코스 왕조와 팔레스타인의 하스몬 왕조까지 합병해버리면서 동방 지역을 완전히 로마의 영토로 만든다. 이렇게 눈부신 성과를 거뒀음에도, 폼페이우스는 정치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타입이어서 자신의 퇴역병들에게 토지를 지급해주기도 전에 알아서 군대를 해산하는 짓을 했고 원로원은 군대가 없어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폼페이우스의 말을 3년간이나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집정관 당선을 위해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정치적으로 민중파에 속했고, 따라서 집정관 당선을 위해서는 폼페이우스의 지원이 필요했다. 여기에 동방의 세금징수권 문제로 크라수스도 끼여들면서 제1차 삼두정치가 성립된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의 몰표를 받고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바로 이들에게 토지를 지급하기 위한 법안을 상정해 통과시킨다. 소 카토는 원로원 회장에서 이걸 반대하는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카이사르의 지시를 받은 릭토르들에게 끌려나가는 소동이 있었고, 카이사르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비불루스는 문제가 있으면 토론해 보자는 카이사르의 의견을 씹고 법안 통과를 방해하다가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에게 몰매를 받고 쫓겨났다. 이후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의 문제였던 동방 징세권 문제를 해결한 후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한다. 카이사르가 로마를 비운 사이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는다. 부유한 동방의 지배권을 놓고 두 사람은 바로 싸우기 시작했는데, 이를 눈치챈 카이사르가 전격적으로 로마를 방문하고 루카 회담을 열어 정국의 주도권을 다시 삼두정에게로 돌린다. 하지만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이라는 희대의 뻘짓을 저지르면서 죽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간의 완충지대가 없어짐에서 따라 삼두는 붕괴, 사실상 로마 내전의 막이 오르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집정관 선거를 위해서는 군대를 해산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로마에 입성해야 한다는 법안을 상정한다. 당시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가 끝나는 시점과 집정관 선거까지는 한 달 정도의 기간이 있었는데, 원래대로라면 융통성을 발휘해 줬겠지만 눈엣가시같은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위한 원로원의 작품이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실례를 보았듯이, 무력이 없으면 어떻게 될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한 뻔했기에 카이사르는 자신의 호민관들을 이용해 이 법안에 계속 거부권을 행사했다. 지루한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던 도중에, 카이사르는 한 발 양보하기로 하고 자신의 군대를 해산하는 대신 폼페이우스의 군대도 해산한다면 이에 동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원로원에서도 이를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옵티마테스 쪽 인물들(특히 폼페이우스와 소 카토)이 펄펄 뛰어서 무산된다. 아예 폼페이우스는 장인 스키피오를 통해 원로원에게 결심을 독촉했고 결국 원로원은 최종병기인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시킨다. 이에 따라 호민관들의 거부권과 신변불가침 권리가 무력화되어 카이사르파 호민관들은 전부 로마를 떠나 카이사르에게로 합류한다. 마침내 카이사르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주사위는 던져졌다가 이떄 나왔다. 패기 넘칠 것 같은 느낌과 달리 카이사르 자신의 감정은 씁 어쩔 수 없지에 가까웠다고 한다.) 군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넘으로서 카이사르의 내전이 시작된다. 폼페이우스는 처음에는 이탈리아 내에서 결전을 치르려고 했고, 카푸아에 2개 군단을 배치한 후 로마 인근에서 징집을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로마는 라틴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동맹시들과 동맹시 전쟁을 치른 지 50년 밖에 되지 않아 그 여파가 남아있었고, 계속해서 차별받았던 이탈리아 주민들은 민중파인 카이사르 쪽에 붙고 싶어했다. 이 때문에 폼페이우스가 모은 병력은 가면 갈수록 탈영이나 항복으로 그 숫자가 줄어들어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공중분해된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파의 생각보다 동맹시들의 이탈이 훨씬 더 빨랐던 것이다. 이에 따라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를 버리고 그리스로 향한다. 폼페이우스의 강점은 우월한 해군력과 그를 통해 얻은 풍부한 보급선이었다. 그런데 원로원 의원들의 대부분이 폼페이우스를 따라 그리스로 건너갔고, 이들이 이러쿵 저러쿵 간섭을 했기 때문에 지휘계통에 있어선 문제가 되었다. 원로원 의원들 한 명 한 명이 군사복무를 했던 장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있음으로서 정통성은 확보되었지만 군대 지휘 측면에선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폼페이우스도 일단 귀족이었고 아버지가 전직 집정관이었으니 완전 뉴비는 아니었지만,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시간이 다른 이들에 비하면 짧았다) 한편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지역의 폼페이우스 세력을 일소하여 후방을 확보한 후 그리스로 건너오고(신임하던 호민관 쿠리오에게 2개 군단을 주어 시칠리아와 아프리카를 공략하게 해서 시칠리아는 확보했으나, 아프리카 전쟁은 초전에 승리했으나 그 다음에 계략에 걸려서 파견된 2개 군단이 전멸했다.) 속전속결을 목표로 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디라키움 공방전이라는 수를 던지지만 적은 병력으로 더 많은 병력을 포위하려고 한 끝에 실패한다. 이에 카이사르는 전략을 바꾸어 폼페이우스의 보급선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워낙 장기간에 걸쳐 구축된 보급선이라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폼페이우스 휘하에 있던 원로원 의원들이 어서 전쟁을 끝내라고 하루가 멀다하고 폼페이우스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고 보급이 후달리던 카이사르 입장에선 추수철이 다가오면서 카이사르에게 상황이 유리해진다. 결국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두 명장군이 한바탕 회전을 벌이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고전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을 활용해 중앙의 보병부대가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7천 기병으로 측면을 친다는 고전적이고 정석적인 전략을 들고 나왔으나 결과는 좆망이었다. 파르살루스 전투 때 카이사르 군은 보병 2만 2천명, 기병 1천명을 동원했고, 폼페이우스 측은 보병 4만 5천명에 기병 7천명을 동원했다. 병사의 수는 폼페이우스 측이 우세했지만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은 근래에 모집된 병력들이었기에 경험이 매우 부족했는데 심지어 그들을 이끌 장교들도 라비에누스를 빼면 대규모 회전을 치른 경험이 전혀 없었다. 훈련시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냉병기의 특성에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던 카이사르 군에 비하면 폼페이우스 군은 그 질이 매우 떨어졌다. 폼페이우스 본인도 야전 지휘에서는 그다지 썩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대표적인 그의 업적인 히스파니아 반란 진압과 동방 정벌을 봐도 히스파니아 반란 때는 군단을 이끌고 세르토리우스와 벌인 회전에서 완패를 당했었고 동방 정벌도 역시 전임자인 루쿨루스가 판을 다 깔아줬고 폼페이우스는 숟가락만 얹었다는 비판이 당대에 돌 정도였다. 카이사르는 기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젊은 병사 1천명을 선발해 기병의 뒷자리에 타고 싸우는 훈련을 시켰고, 전장에서 병사들을 배치할 때 강을 좌측에 두고 포진해 폼페이우스의 기병들이 우익을 노리도록 유도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기병에 올라탄 병사들이 폼페이우스 측 기병들에게 돌을 던지는 식으로 도발을 걸었고, 도발에 낚인 기병들이 다가오자 미리 차출해 둔 카이사르 측 별동대가 기병들 앞에 뛰어들어 둘격을 저지하고 필룸으로 찌르고 고함을 치기 시작하자 그 기세에 폼페이우스 기병들은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재집결하려는 움직임 하나 없이 전부 차례로 전장에서 이탈했다. 적 기병을 와해시킨 카이사르 측의 별동대는 쉬지 않고 즉시 폼페이우스 군 보병 부대의 측면을 공격한다. 중앙의 보병간 힘싸움은 전투력 차이가 확연했음에도 폼페이우스 측 보병들이 한동안 공격을 버티고 있었으나 가장 경험이 풍부한 병사들로 구성된 카이사르 군 3열이 1, 2열을 교체해 들어오자, 전투력 차이를 극복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1만 2천명(또는 6천명)이 전사하고 2만 4천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였다. 폼페이우스는 패색이 짙어지자 총사령관의 표창을 거두고 소수의 호위 기병들과 전장을 이탈하여 라리사를 향해 도망치다가 지나가는 곡물 수송선을 타고 주요 요인들과 함께 그리스를 벗어났다. 처음에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가려고 있으나, 안티오키아 측에서 망명을 거부하여 이집트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간에 내전을 벌이고 있다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이 승리를 거두어 클레오파트라를 추방한 상태였다. 폼페이우스는 과거 동방에 있던 시절에 이들의 아버지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파라오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부하 장군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를 파견했고, 가비니우스는 2천 명의 군단병과 5백 명의 보조병을 남겨 도움을 주었기에 망명 의사를 이집트에 전달했다. 이 당시에 파병되었던 폼페이우스 휘하 군인들은 이집트에 남아 군인으로서의 커리어를 계속하기로 결정했고 시간이 흘러 이집트 문화에 동화되어 가비니아니라는 이름으로 파라오의 정예병으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문제는 이 때 폼페이우스 측 사절들이 폼페이우스 휘하에 있었던 병사들을 찾아가 옛 상관의 밑으로 돌아오라는 쓸데없는 짓을 한 것. 이 사실이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섭정들에게 들어가자 이집트 조정 대신들은 폼페이우스의 목적이 단순한 망명이 아닌 이집트를 자기 손에 넣고 내전을 계속하려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게 되고 그를 암살할 음모를 꾸몄다. 폼페이우스가 살아있는 이상 어디로 가든 내전이 계속될 거라는 건 분명했고, 자기 세력권으로 남은 아프리카를 내버려두고 망명지로 굳이 이집트를 골랐다는 건 이집트를 자기 손에 넣고 내전을 계속하겠다는 의도로 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내부 권력 다툼과 군사력의 지속적인 하락으로 인해 오늘 내일 할 정도로 상태가 좆망이었지만 엄연히 수백년간 이어진 왕조였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집트라는 하나의 국가가 몰락한 개인인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의리관계인 클리엔테스-파트리아 관계에 메일리도 없었기 때문에 명백한 오판이었다. 폼페이우스가 이집트 땅에 도착하자, 아킬라스와 옛 부하이자 가비니아니 대장인 루키우스 셉티미우스가 그를 맞았고 그들에게 살해당하는 최후를 맞았다. == 평가 == 군사적인 업적에선 로마사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정치적인 능력 부족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인물. 정치적인 면에서 보면 그닥 뛰어나지 못했다. 폼페이우스는 동방 원정을 마친 후 원로원에게서 어떠한 확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군단을 스스로 해산시켰는데, 자신이 유일하게 의견을 관철시킬 수 있는 수단인 군대를 스스로 해산시켜 자승자박의 꼴이 됐고 원로원은 동방 속주 재편성, 고참병들의 퇴직금 문제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이에 로마 시민들은 불만이 많았는데 이들을 포섭해서 민회를 장악해여 원로원과 대결을 벌이는 수완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동방 원정이 끝나고 3년이 지난 뒤에야 같은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이건 폼페이우스가 아닌 삼두정의 카이사르 작품이었다. 그리고 삼두정치의 우두머리 역할은 로마에 머무르고 있던 폼페이우스가 아닌, 갈리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던 카이사르였다. 폼페이우스는 주도권을 원로원이 가져가도록 내려버두었고 동료 집정관인 크라수스와 사이가 매우 나빠 원로원이 약간 손을 쓰자 순식간에 서로 물어뜯고 싸우기 시작했다. 여기에 호민관이 되기 위해 귀족의 신분을 버리고 평민의 양자로 들어간 클로디우스는 정치세력을 규합해 민회를 장악했는데 폼페이우스의 지시는 전혀 따르지 않았고 카이사르의 말만 들었다. 이에 원로원이 밀수를 매수하여 로마 시내에 한바탕 혼란이 벌어졌고 클로디우스가 피살되었는데도 폼페이우스는 혼란을 잠재우지 못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전격적으로 귀환하여 루카 회담을 열고 삼두간의 균열을 봉합(크라수스에게 시리아 총독의 직위를 주고 폼페이우스에겐 히스파니아 총독 임명)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다시 되찾는다. 이 과정에서 폼페이우스는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지만 이렇게까지 카이사르에게 끌려다닐만한 입지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설적인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막 벌어질 때도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는데 기원전 49년 당시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직위는 그 해 3월 1일자로 종료되는데 아직 싸울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카이사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시켰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에서 1개 군단과 대기하고 있고 사실상 사형이나 마찬가지인 원로원 최종 권고가 떨어지면 그가 전쟁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할 가능성은 충분했는데 이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군대 해산 문제를 두고 일부 원로원 의원들이 '일단 군단병을 모집하여 방비를 한 후 최종권고의 발동 시기에 대해서 논의합시다.'고 했으나 이는 무시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최종권고를 선포한 후에 군자금과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상식적으로 전쟁을 생각했다면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게 이치에 맞는 것인데 앞뒤가 안 맞는 이 행동으로 인해(여기에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의 예상과 달리 이탈리아 도시들의 이탈이 굉장히 빨랐다. 불과 50년 전에 동맹시 전쟁을 치르고 로마 시민권을 얻었으나 여전히 이탈리아 주민들은 차별을 받았는데 민중파의 마지막 거두인 카이사르가 남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순식간에 이탈해버렸다) 제대로 된 싸움 하나 없이 이탈리아 본토는 카이사르에게 넘어간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히스파니아의 세르토리우스 반란 진압, 지중해 일대의 해적 소탕 작전, 동방 원정 등 굵직한 성과를 거두었다. 기본적인 전술을 충실하게 이행하면서 승리를 쌓아 큰 그림을 그려내는 전략가로서의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하지만 폼페이우스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스키피오나 한니발, 라이벌인 카이사르 같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전장의 상황에 대응해 승기를 잡고, 불리한 상황을 뒤집는 전술가로서의 능력은 부족했다. 세르토리우스 반란 때는 양측이 군단을 이끌고 포진해 벌인 회전에서 두 차례나 발렸고 그 중 한 번은 자기 목이 날아갈 뻔 한 적도 있었다.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 지역의 폼페이우스 세력을 일소한 후 그리스로 건너왔을 때 병력 수는 폼페이우스가 더 많았다. 하지만 카이사르 군은 8년 동안의 갈리아 전쟁을 치르며 산전수전 다 겪고 생사의 위기도 여러 번 넘긴 정예 중의 정예병들이었다. 냉병기를 사용하는 당대 전쟁의 특성상 병사를 훈련시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실전 경험의 여부가 전투력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군과 적군의 전투력 차이를 감안하지 않고 회전을 걸었다는 건 총사령관으로서는 실격이다. 파르살루스 전투가 끝난 후 카이사르 군이 양쪽의 사상자를 세어보니 카이사르군은 200명(내지 6천명), 폼페이우스 군은 전사자만 1만 5천명에 포로가 2만 4천명이 나왔으니(내전기의 기록) 병사들의 전투력 차이가 전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알 수 있다. 파르살루스 전투 당일의 지휘도 '과연 그 폼페이우스가 맞나?' 싶을 정도였는데 카이사르군에게 지나치게 단순하고 정석적인 작전을 구사했다. 폼페이우스는 기병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니 측면을 찌르면 적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했던 걸로 보이는데 카이사르군은 8년 동안의 갈리아 전쟁에서 적이 기병으로 측면을 치고 들어오는 상황에 너무나 익숙했고 재빨리 부대를 쪼개 분리기동하며 포위를 벗어나 승리를 거머쥔 경험이 많았다. 기병의 측면돌격은 정석적인 작전이니 그걸 선택한 건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그 다음이 문제다. 폼페이우스의 7천 기병은 한차례 돌격이 무력화되자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력화되었다. 폼페이우스는 무너지는 기병들을 재조직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기병 부대들도 우회기동을 하려는 움직임 하나 없이 후속부대부터 차례대로 전장에서 이탈했다. 카이사르와 달리 폼페이우스는 20년 넘게 지휘를 하지 않았기에 대규모 회전을 치를 역량이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폼페이우스의 최후 역시 그의 부족한 정치력, 특히 인간의 심리를 헤아리고 꿰뚫어보는 능력이 부족한 게 큰 원인이었다. 폼페이우스가 살아있는 이상 어디로 가든 내전이 계속되리라는 건 분명했는데, 자기 세력권으로 남은 아프리카를 내버려두고 망명지로 굳이 이집트를 선택했다는 건 이집트를 자기 손에 넣고 내전을 계속하겠다는 의도로 보기엔 충분했다. (단순히 위치상 가까워서 골랐을수도 있겠지만 그렇기엔 뒤에서 설명할 옛 부하들에게 바람을 넣은 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폼페이우스가 보낸 사절들이 옛 부하들에게 찾아가 예전 상관의 밑으로 돌아오라는 쓸데없는 짓을 했고, 이 사실을 안 조정 대신들은 폼페이우스의 의도를 의심하는 게 타당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오늘내일 할 정도로 상태가 완전 메롱하긴 했지만 엄연히 수백년 간 이어진 왕조였으니 폼페이우스 개인이 마음대로 장악할 수준이 아니었고 몰락한 개인을 상대로 의리관계에 얽매일 이유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판단미스이자 자폭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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