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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군대}} '''積城郡''' [[부군면 통폐합]]시기 [[연천군]]에 통폐합된 조선시대의 행정구역. 처음 등장했던 [[백제]], [[고구려]]부터 삼국통일전쟁시기와 [[한국전쟁]]이후 경기도 북부의 중요한 군사 요충지다. 조선시대 기준<ref>대동지지(大東地志)기준</ref>으로 현내면<ref>現 적성면 가월리, 구읍리, 설마리, 수곡리, 주월리, 장파리와 파평면 장파리</ref>, 동면<ref>現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장현리, 어유지리, 율포리, 적암리, [[연천군]] 전곡읍 늘목리, 양원리</ref>, 서면<ref>現 적성면 답곡리, 마지리, 무건리, 식현리, 자장리.</ref>, 남면<ref>現 [[양주시]] 남면 두곡리, 구암리, 상수리, 신산리, 신암리, 입암리, 한산리 ,황방리, 양주시 은현면 운암리.</ref>, 북면<ref>現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구미리, 노곡리, 통구리, 전동리, 통구리, 학곡리</ref>, 적암향을 가지고 있었다. ==폐지이전== [[백제]], [[고구려]]시기엔 짱깨식으로는 칠중현(七重縣), 토종식으로는 난은별(難隱別)이라고 불렸다. [[임진강]]이 7개의 대형 곡류를 형성하면서 흐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백제이전에 이곳에 세운 군사요새로는 現 적성면 주월리에 있는 육계토성이다. 고구려가 먹고 난뒤 지금의 칠중성이 건설되었고, 삼국시대 말기에는 심심하면 고구려군과 [[신라]]군이 심심하면 때거지로 몰려와 개싸움을 벌이는 곳이었다. 결국 638년 신라 알천이 칠중성에서 고구려군을 개작살냈다. 이후 적성군 근처의 [[마전군]]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부흥군은 적성군 근처의 호로하에서 [[당나라]] 장군 [[이근행]]에게 개쳐맞고 망했다. 신라통일이후로는 그냥 깡촌으로 전락. ==폐지이후== 1914년 부군면 통폐합시기, [[연천군]]에 통폐합되었고 남은 면들은 각각 적성면<ref>현내면 + 동면 + 서면 = 적성면</ref>, 남면, 백학면<ref>면 대부분은 [[마전군]]의 지역이었는데, 북면이 백학면을 만드는데 통폐합크리먹음.</ref>으로 분리되었다. 해방이후 연천군이 38선이북 [[북괴]]령으로 넘어가자 구 적성군지역이 전부 [[파주시]]로 넘어갔다. [[한국전쟁]]극초기 적성면 고랑포에서 북괴군에게 국군이 [[양민학살]]을 당한 고랑포 전투가 발생했고 1951년 4월, [[영국군]] 29보병여단이 물량빨로 밀고 들어온 [[중공군]]을 2일간 미친듯이 두들겨팬 적성전투가 일어났다. 이전투로 서울을 다시 쳐묵쳐묵하려던 빨갱이군은 좆망했고 서울북부지역을 수복할 수 있게 된다. 결국엔 국군이 舊적성군지역의 전역을 완전 수복했다. 전후 1957년 적성면 마지리에 영국군 참전기념비가 세워졌고 1960년 남면이 [[양주시]]로 넘어간 것이 지금에 이른다. 여담으로, 빨갱이하고 되놈들 시신 묻어놓은 [[적군묘지]]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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