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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명장}}{{문무겸비}}{{대한민국육군그자체}} {| class="wikitable" border="1" rules="none" |- |align="middle" style="background:#004600;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 colspan=2|<big>'''임부택(林富澤)''' |- |align="middle" style="background:#004600;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출생''' | 1919년 9월 24일 [[전라남도]] [[나주]]<ref>6사단 사단장이던 김종오(1921년생)보다 2살 더 많았다.</ref> |- |align="middle" style="background:#004600;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사망''' | 2001년 11월 13일 [[서울]](향년 82세) |- |align="middle" style="background:#004600;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국적''' | [[일본제국]] → [[대한민국]] |- |align="middle" style="background:#004600;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학력''' |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1946), 육군보병학교 1기(1949)<br>육군기갑학교 1기(1951),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1956) |- |align="middle" style="background:#004600; color:#FFFFFF; font-weight:bold; text-align:center"|'''경력''' | [[좆본군]] 사병(최종계급 조장)(~1945), 1연대 1대대 A중대 선임하사관([[중사]])<br>[[6사단]] 7연대 연대장(소위), [[11사단]] 사단장, 제2군 관구사령부 사령관<br>제3군 관구사령부 사령관, 제1군단 군단장, 제6군단 군단장([[중장]]) |} == 개요 == [[대한민국]]의 군인. 1938년 [[일본 제국|좆본]]이 국가 총동원령이 떨어졌을 당시 지원입대하면서 군인생활을 시작했다. 자원입대를 했지만 [[훈련소]] 조교만 하다와서 사실상 좆본군 사병출신으로 취급받는다. [[8.15 광복]]이후 백수로 지내다가 1946년 1월 15일, [[국군]]의 모태인 조선경찰예비대가 창설되자, 최초의 사병계급인 110001번의 군번을 수여받고 [[중사|이등상사]]가 되었으며, 제1연대 제1대대 A중대의 선임하사관이 되었다. 1946년 5월 1일, [[미군정]]이 조선경찰예비대 훈련소(=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를 설립하자 그곳에 1기생으로 입교해 약 한달 간 훈련을 마치고 1946년 9월 [[소위|참위]]로 임관되었다. 이후 1948년 [[제주도]]로 파견되었다. 근데 [[4.3 사건|시기를 보면]].... 말을 말자. == [[6.25 전쟁]] == 1949년 5월 3일, [[6사단]] 7연대의 연대장으로 보직을 임명받게 되면서 ㅎㄷㄷ한 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7연대는 지휘소는 춘천에 두고 양통리, 주목리에 진지를 두고 있었다. 1949년 8월 6일, 1개대대의 [[북괴군]]의 슴만튀를 막아내었다. 이후 7연대장으로서 연대의 전투력을 대대전투훈련으로 증강시키고, 1년동안 춘천의 지형들을 숙지했으며 연대를 군, 행정관서, 주민간의 커넥션을 만들어 어느연대보다 주민과 군, 행정관서의 연계가 튼튼한 연대로 바꿨다. 이러한 임부택의 노력은 [[춘천전투]]에서 빛을 발했고 북괴군의 남침을 최대한 지연시키는데 엄청나게 공헌하게 된다.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충북]] [[음성군|음성]]으로 철수했을 때도 [[김종오|상관]], [[김홍일|1군단장]]과 함게 [[무극리 전투]]에서 북괴군을 또 털어버렸다. 상관이자 2살 어린 동생이었던 [[김종오]]성님과 함께 전투를 지휘하면서 [[초산 전투]]까지 6사단이 북괴군을 상대로 빛나는 연전연승을 이루는데 큰 공헌을 했다. 초산에서 북괴군을 점령한 뒤 [[압록강]]물을 떠다 싱먼리에게 바쳤는데, 춘천때보 못받은 훈장을 이렇게 받을 수는 없다며 압록강물을 떠왔다고 싱먼리가 준 훈장을 깔끔하게 거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초산으로까지 7연대가 들어가도록 냅둔 것은 [[중공군]]의 계략이나 다름없었고, 7연대는 이 계략에 제대로 걸려 복날 개패듯이 쳐맞고 겨우겨우 철수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팽덕회]]가 '씨발 임부택을 죽이든가 7연대를 없애버려라'라는 특별지시를 내린 일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살아 돌아온것도 존나 대단한거다만. [[1.4 후퇴]]이후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의 후장을 뚫고 [[파로호]]까지 쫓아가면서 중공군을 두들겨패서 복수에 성공한다. 1952년 [[준장]]으로 진급, [[11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어 [[금성 전투]]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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