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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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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드립}} {{고인}} {{다시살아나야하는분}} {{심플/금수저}} {{심플/불쌍}} {{심플/영웅}} ==생애== 1944년 전북 [[남원]]의 지역 유지였던 김재계와 [[함양]] 출신<ref>고향 덕분에 함양댁이라고 자주 불렸다.</ref>의 권찬주 사이에서 난 아이였다. 당시 금값보다 비쌌던 카메라와 전축이 있었을 정도로 금수저였다고 한다. ㄴ 어렸을 때 한정이다. 마산상고에 가려고 했던 이유도 집안 사정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그런 거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남원시 금지면에 소재한 학교에서 나왔다.(금지동초, 금지중) ==꽃다운 소년의 안타까운 죽음== 당시 수재였던 그는 마산상고에 입학했지만 원래 진주고등학교에 진학하려고 했다. 거리가 멀다는 아빠의 반대로 남원농업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적성 때문에 자퇴했고 가세<ref>아버지가 중병에 걸림.</ref>가 조금씩 기울 듯하자 당시 등록금이 혜자였던 철도고, 서울고에 입학하려고 재수했다. 근데 얼마 안 되어서 동네 형의 조언으로 마산상고에 다시 들어가려고 재수해서 거기에 합격했다. 그래서 합격 여부를 확인하려고 3월 14일에 형과 함께 마산으로 출발했다. 학교의 합격 발표는 3월 16일에 있었지만 당시 남원에서 마산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기 때문에 그날 마산으로 그냥 출발했다. 1960년, 당시 명문고였던 마산상고는 3월 15일 [[부통령]]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를 벌였는데 이때 김주열은 민주당 후빨러였던 지인의 영향 덕분에 가족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려고 했지만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약 한 달 동안 권찬주 여사는 마산 시내를 울고불고 뛰어다니면서 아들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포기하고 남원행 버스를 타고 돌아갔는데 아들을 마침내 찾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시체가 둥둥 떠올랐다. 시체에 돌을 묶은 채로 바다에 던졌기 때문에 죽어도 물 위로 시신이 떠오르지 않았던 게 우연히 밧줄이 풀리면서 시체가 떠오른 것이다.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4.19 혁명]]의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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