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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암의 명군 라마5세의등장 === [[파일:Young king Chulalongkorn 1872.jpg|300px]] 라마 5세가 친정하기 1년전인 1872년에 찍은사진임 라마4세가 죽고나서 라마5세(이름은 출랄롱꼰)가 꼬맹이때 왕이되는바람에 모후가 섭정중이어서 영토에대한 욕심이있어도 신하들의결정에따라 포기할수밖에없었다. 1873년부터 친정에나선(헬조선의 곶종과 비슷하네?) 라마5세는 쪼그라든 시암의영토를 조금이라도넓혀보기위해 갖가지 개혁을 단행한다. 물론 넓히지못했지만 ㅎㅎㅎ . 일단 헬좆센과는 다르게 제도적으로는 1875년부터 영국,프랑스를 따라하여 추밀원과 내각평의회(의회),재무부를 신설하였고 강했던 귀족들의 권한을 대폭축소하였다. 이후 수구꼴통틀딱귀족들이 강하게 반발하였지만 라마5세가 외국으로 유학보냈던 젊은귀족들이 귀환하자 곧 그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틀딱귀족들의 반발은 수그라들었다. '''라마5세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처럼 태국의 문화에서 정치제도까지 전면적으로 서구식으로 바꾸려고했었다. 즉 짱깨나 헬조센처럼 유교를유지하되 서구무기만 받아들이자가 아닌 모든것을 서구식으로 뜯어고치자고 주장했었던 참(?)정치인이었다.''' 영토를자주뜯어가는 영국과프랑스는 라마5세에게는 분노와복수의 대상이었으나 곧 그들의 힘앞에 무릎을꿇어야했고 어쩔수없이 순응적인태도로 돌아섰던것이다. 이후 젊은귀족층들의 제안에따라 시암중립화론을 내세워 영,프를 왔다갔다하면서 대나무외교를 펼쳤고 이는 성공했다. 당시 영,프는 독일을견제하느라 서로 싸우는것을 원치않아했고 태국을 중립지대삼아 서로 태국의 주권을 인정하는것으로 끝을보았다. 이로써 '''태국은 영토셔틀+ㄱㅆㅆㅅㅌㅊ지리빨로 끝끝내 독립을유지'''할수있었고 동남아유일의 피지배지가 된다. 라마5세는 왕권강화를위해 왕족들을 요직에 앉히고 유럽식 정치제도와 법체계를 정비하여 수꼴귀족들을 찍어눌렀다. 1897년에는 두싯이라는 도시를 서양식도시로 탈바꿈시켜놨으며 1905년에는 조선보단늦지만 노예제를 완전폐지하여 신분평등을 이룩했다. 이후 교통망정비 및 재판소를설치하여 근대식 사법기관이 설립되게된다. 근대식으로 우편제도도 정비하였다. 혀튼 태국인들에겐 세종대왕 그이상급으로 존경받을정도로 ㄱㅆㅆㅅㅌㅊ위인이다. 그를기리기위해 라마5세의 이름을딴 출랄롱꼰대학교도 있다. [[파일:Firstworldwar.jpg]] 신식 태국 군대의 열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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