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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대전 ===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동맹을 근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사실 일본이 우겨댔는데, 초기에는 영국은 웨이하이와 홍콩을 지키기 위해 일본의 군사력을 필요로 하여 참전을 독려했고, 실제 독일에 선전포고한 8월 4일에 일본에 이러한 사실을 전달했고, 8월 7일에는 일본해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이 이에 준비했다는 듯이 물자, 영국은 일본의 의도를 의심하게 되었고, 일본의 참전을 취소할 것을 요구한다. 중국도 중립을 선언하고, 독일도 자오저우만을 일단 중국에 반환할 것을 밝혔는데, 이렇게 되자 가토 외상은 전쟁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영국에 요청한다. 이에 영국은 전투 지역을 일본의 해상무역 보호에 필요한 지역에 국한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의 참전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제한을 수용할리가 없었다.<ref>-세계외교사, 김용구 지음-</ref> 독일령 칭다오를 점령하고 중국에 21개조를 요구하여 1개조를 제외한 나머지를 관철시켰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제국령 태평양 군도들을 할양받고 적백내전에 그 어떤 국가보다 길고 굵게 개입하였다. 그러나 별 소득없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였고, 칭다오도 곧 반환되었다. 당시 일본은 온건적인 민주주의 정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관계도 일방주의보다는 협력주의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가 일본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민권운동가들의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민권운동은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되어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그 결실을 맺었고 이로 인해 일본도 민주주의 국가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이 들어선 민주주의 내각은 그 권위가 취약하여 꼰대들의 무시를 한몸에 받았고, 결국 시퍼런 관동군 장교들이 본국 의회를 쌩까고 자기네들끼리 중화민국의 만주를 침략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 내각의 사태를 확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명령과 3개 사단의 증원부대 파병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의 정부지시없이 한 행동이 너무 성공적이었다는데 있다. 관동군은 병력규모상으로 만주의 중국군에 비해 열위에 있었지만 중국군을 영혼까지 털어버리고 1년 만에 만주를 장악하였다. 결국 일본 내각은 불가침, 주권존중의 협정을 중국과 맺게된다. 그 이후 장악한 만주에는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었다. 어쨌든 이들이 한 행동이 너무 성공적이라 정부를 무시하고 군이 지멋대로 움직이는, 군의 민관통제가 안되는 것이 일본제국의 전통이 되어버린다. 이렇듯 그 입지가 불안불안하던 민주주의 정부는 결국 [[1936년]] 청년장교들의 대규모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천황의 거부로 실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영향은 군부에 큰 인식변화를 일으켜 일본이 군국주의로 가는데 한몫하게 된다. 의회는 비록 존속되긴 했지만, 사실상 군부정권의 들러리가 되고 만다. 2차세계대전 중에는 중일전쟁을 벌이던 일본은 패망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에게 장제스 루트를 끊을 것을 약속받았고, 마쓰오카-앙리 협정으로 인도차이나에 대한 일본군 통행이 가능했으나, 군부 병신들이 통킹지역의 진주를 단행한다. 그리고 일본 내각은 제국정책요강에서 소련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고, 미국 역시 마찬가지지만, 미국이 참전하는 경우 추축국으로서 행동한다는 것이었고, 인도차이나를 계속 쳐먹는다는 것을 결의했다. 그것이 실행되자, 미국은 미국내 일본자산을 동결하기에 이르렀고, 2차 고노에 내각은 미국과의 전쟁을 회피하고자 친미파인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대장을 미국대사로 임명했으며, 헐 국무장관과 교섭을 시작한다. 그러나 유럽 순방에서 돌아온 마쓰오카 외상은 지랄하고, 수정안을 제출했는데, 그것은 미국과의 협의를 무효화시키고, 소련과 맞짱까자는 나찌적 주장을 했다. 이런 미친놈을 해고하고자 고노에 수상은 총사직하고 3차 고노에 내각을 출범시켰다. 3차 고노에 내각은 도요다 데이지로 해군대장을 외상으로 임명했고, 통제불능한 군부의 남 인도차이나 진주가 결정되자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직접회담을 제의하게 이른다. 한편 히틀러는 일본이 미국과 짝짝꿍하는 것에 항의하였고, 독일이 계속 연합군을 좆바르자 교섭을 중지하였다. 이에 미국은 석유수출 중단과 루즈벨트 직접교섭을 사실상 거부했으며, 이에 일본은 제국국책수행요강을 9월 6일에 발표해 미,영국과의 전쟁준비 및 외교수단으로서 일본의 요구관철에 노력, 그 노력이 무산될 경우 개전을 결정한다는 것을 결의했다. 이에 고노에 내각은 일본정부의 방침을 미 정부에 제시했고, 미국은 헐노트를 전달했다. {{인용문|1.모든 국가의 영토보전 및 주권존중 2.타국의 내정불간섭 3.통상기회균등 4.비평화적 방법에 의한 태평양 지역에서의 현상변경의 반대 그리고 일본군의 중국주둔이 불법적인 것이라고 인정할 것.}} 이 점에 관해 일본 육군은 존나 빡쳤고, 도조 히데키 육상과 고노에 수상, 도요다 데이지로 외상이 설전을 펼치다가 지친 고노에는 사표를 제출했다. 고노에와 도조는 황족을 수상으로 천거했으나 황족내각 형성에 반대로 도조 히데키가 수상이 된다. 이윽고 군부정권은 구체적인 제국국책수행요령을 결정했고, 그 내용은 추축국과의 제휴강화, 인도차이나는 중일문제 해결시 철병, 미국의 인도차이나 진출 저지 및 미국의 일본 석유공급, 중일문제 불가침을 미국에게 요구한다는 상당히 정신병자적 내용을 결의했다. 그걸 받아든 헐 국무장관은 노무라 대사에게 추축국 탈퇴, 인도차이나 철병안하면 뒈진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당연히 도조는 이를 거부하고 진주만을 공격한다. 사실 기습이라고도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1941년 12월 6일 시게노리 외상이 7일 오후 1시를 기하여 진주만 폭격을 미국에 전달하라는 전문을 주미대사관에 발송했는데, 노무라 대사가 그 문서를 받은 것은 미국시간으로 2시 20분이었다. 그래서 진주만이 기습공격이 된 것이다. 하긴 30분 전에 선전포고하는 병신이 어디 있냐? 그리고는 자신들과 비슷한 집단인 독일과 이탈리아와 동맹을 체결하고 아시아-태평양 곳곳을 휘젓다가 결국 대규모 공습과 원폭투하로 인해 항복하고 몰락한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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