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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하의 종기를 빨다 == 오기는 장군이라 해서 병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병사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따로 침대를 쓰거나 하지 않았으며 병사들이 입는 옷을 입었다. 행군 중에는 말을 타지 않고 걸었고 자신도 병사들처럼 군장을 메고 걸었다. 게다가 부하들을 끔찍이 아끼기도 했다. 언제나 병사들이 먼저 먹기 시작한 후에 밥을 먹었고 잘 때도 병사들이 자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병이 난 병사가 있으면 직접 군의관을 불러주기도 했다. 전투가 끝난 후엔 부상병들을 직접 치료해 주었고 전사자가 생기면 항상 본가로 부하를 보내 조의를 표했다. 이에 병사들은 오기를 엄청나게 따르고 그를 위해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와 관련된 일화도 있다. 한 병사가 종기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오기가 자기 입으로 고름을 빨아서 병사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친구 병사가 휴가를 가서 그의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어머니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셨다. 어리둥절한 병사가 이유를 물었다. "장군이 직접 병사의 종기를 빨아 주셨으면 감사할 일이죠. 왜 그러시나요?" 그 애의 어머니가 흐느끼며 대답했다. "그 애의 아버지도 장군님의 수하에 있었는데 등창이 났을 때, 그때도 장군님이 직접 고름을 빨아 주셨단다. 그래서 장군님을 위해 열심히 싸우다 죽었는데 그 아들놈도 그랬다니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느냐?" 이 무렵 진나라는 혜공(惠公)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결국 태자인 출자(出子)를 죽이고 헌공(獻公)을 옹립했지만 혼란은 수습되지 않았다. 오기는 이 때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기는 날랜 정예병<ref>오기가 양성한 이 정예병들은 무졸(武卒)이라고 불렸는데, 군장메고 산악구보, 돌던지기, 활 멀리쏘기 등등으로 가려뽑아서 양성하였으며, 전역하면 연금까지 줬다고 한다.</ref>들로 편성된 3개의 부대를 이끌고 은밀하게 강을 건넜다. 그 지점에 1개의 부대를 숨긴 다음 나머지 부대를 데리고 강변에 있는 소량성(少梁城)을 지나 두 번째 번성(繁城)아래에 도착했다. 그곳에 다시 1개의 부대를 남긴 후에 남은 하나의 부대를 데리고 세 번째 방성(龐城)에 도착했다. 내지에 있는 성이라 그런지 방어가 허술했다. 오기는 먼저 날랜 병사 몇 명을 보내 보초를 제거하고 성문을 열게 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자 오기의 부대는 재빠르게 성 안으로 들어가 공격지점을 정한 다음 봉화를 피웠다. 잠을 자던 진나라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 봉화를 신호로 번성과 소량성에서도 공격을 시작해서 날이 밝을 무렵엔 진나라의 세 성에는 위나라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오기의 작전으로 3개의 성이 동시에 함락된 것이다. 오기는 기세를 몰아 낙음(洛陰)과 합양(郃陽)의 두 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이 소식에 진나라 정부는 발칵 뒤집혔는데 위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해서 성을 뺏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계속 탈환을 위해 노력했지만 오기가 있는 동안은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기원전 389년에는 진나라가 10배 되는 병력으로 하서에 몰빵 어택땅을 했는데, 오기는 그것도 박살을 내버리니 이것이 후세에 음진 전투라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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