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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 발해사는 과거에 항상 한국사의 일부로서 다루어진 것은 아니다. 한국사에서 제외했던 시기가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넣으려고 했던 시기가 있고, 양면적인 인식이 공존하던 시기가 있었다. 신라인들은 발해를 고구려계 국가로 인식하면서 한편으로 말갈계 국가로도 인식하였다. 최치원은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가 되었다.’고 했고, “고구려 잔당들이 모여서 발해를 세웠다.”고 한 반면에, 다른 글에서는 ‘발해는 말갈족이 번성해 세운 나라’라고 하여 발해가 말갈계 국가임을 천명하는 상반된 인식을 보였다. 후삼국 통일을 기반으로 성립된 고려는 기본적으로 신라 계승의식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때로는 같은 고구려 계승국가라는 점에서 발해를 주목하였다. 고려 초기에 발해를 ‘혼인한 나라’ 또는 ‘친척의 나라’라고 하여 동족의식을 나타냈다. 이에 발해 유민들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였으며, 934년에는 발해 세자 대광현을 왕족으로 우대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삼국사기≫에서처럼 발해를 서술 대상에서 제외하는 신라 중심의 역사 인식이 주축을 이루었다. 후기에 들어 발해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면서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서와 같이 발해사가 한국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발해사가 배제되어 주변국의 역사로 전락하였다. 그 후에 점차 인식이 바뀌면서 발해사를 재발견하는 과정을 겪었다. 대체로 이 과정은 세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첫째 단계는 ≪동국통감 東國通鑑≫(1484)의 역사 인식이다. 여기서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신라에 이웃했던 역사로 파악하였다. 고려 태조의 대 거란 정책을, “거란이 발해에 신의를 저버린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발해를 위해 보복을 한다고 하는가”하는 사론을 달아 비판한 것은 이 책의 역사 의식을 잘 반영한다. 둘째 단계는 발해사를 새롭게 다시 발견하는 과정에 해당한다. 이것은 다시 전기와 후기로 다시 나뉜다. 전기에는 고구려 영토를 계승했던 나라로 발해를 인식했으니,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 東國地理誌≫(1615)가 선구를 이루었다. 그는 조선이 왜 약한 나라가 되어 끊임없이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원인을 찾으면서, 그 원인을 고구려 영토의 상실에서 발견했고, 이러한 관심 속에서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계승한 나라임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발해가 신라에 부속된 역사가 아니라 고구려에 부속된 역사로 파악되어 발해사가 처음으로 고구려 역사 뒤에 붙여서 설명되었다. 후기에는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건국자도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인식이 등장하면서 발해사를 아주 적극적으로 한국사의 일부로 다루었다. 이러한 인식에는 신경준(申景濬)의 ≪강계고 疆界考≫(1756)가 선구를 이루었다. 그는 고구려가 망한 지 10년 후에 대씨가 고구려 유민을 불러일으켜 옛 땅을 회복했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를 공격해 고구려 왕의 치욕을 설욕했다고 하였다. 셋째 단계에는 고구려 계승국에 초점을 맞추어 발해사를 인식하던 태도에서 한 걸음 나아가, 발해를 통일신라와 대등했던 독립국으로 다루거나 일부에서는 발해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인식하였다. 이 때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삼국이나 통일신라와 대등하게 세가(世家)·세기(世紀) 등으로 다루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남북국시대를 설정하는 경우이다. 전자는 이종휘(李種徽)의 ≪동사 東史≫(18세기 후반)에서 출발하였다. 여기서 발해의 역사를 세가로 다룸으로써 하나의 독립된 역사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의 발해사 인식은 홍석주(洪奭周)의 ≪동사세가 東史世家≫(1820년대)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났다. 홍석주는 발해사를 신라·고구려·백제의 역사와 함께 세가로 다룸으로써 삼국과 발해를 동등하게 보았다. 한편 유득공의 ≪발해고≫가 선구적인 역할을 한 후자는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흐름은 상호 보완적으로 결합되어야 함에도 19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더 이상의 진전이 없이 중단되어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후기의 발해사 인식은 미완의 형태로 끝나버리고 다음 세기의 과제로 넘겨졌다. 발해사 인식은 19세기 중반 이후로 장기간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개화기의 교과서들은 삼한정통론의 영향을 크게 받아 삼국통일을 강조함으로써 발해사 인식을 크게 축소시켰다. 그러다가 발해사 인식이 다시 크게 고양된 것은 일제시대 때이다. 특히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연계하면서 만주 지역의 북방사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장도빈(張道斌)·권덕규(權悳奎) 등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대종교에서도 남방사보다 북방사를 높이 평가하면서 만주에서 일어난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을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 발해 수도 동경성 부근에 발해농장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으나, 민족 정신을 앙양한다는 목적 의식에 사로잡혀 북방사를 지나치게 과장한 면이 보인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이용범이 연구를 주도했고, 북한에서도 같은 시기부터 박시형, 주영헌이 연구를 주도하였다. 이로부터 이들의 뒤를 잇는 연구자들의 실증적인 연구가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발해사 자체에 대한 다각도의 연구를 통해 남북국시대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작업들이 진행됨으로써, 이제는 발해사가 한국사의 일부인지에 대해서 적어도 남북한 학계에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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