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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력== {{거짓}} [[파일:251DBD4D589DDDD60B.png]] 고려 중기 까지는 꽤나 강군이었다. [[여요전쟁]] 당시 요나라 군대를 털어먹은걸로 봐서도 알수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무과는 없었는데 쉽게 말하면 전통적인 군인 집안이 있었고 그게 세습이 되었다는 말이다. 광군사로서 '''30만''' 병력을 운용하기도 했으며, 윤관의 여진정벌때는 '''17'''만명에 달하는 별무반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무과가 생긴 [[조선]]이 고려보다 군사력이 발전했다고 착각했지만 실제로 나오는 군사력은 그 반대였던 것이 특이하다 애초에 역사적으로 시험 따위로 뽑는 인간들보다 태생부터가 다른 인간들을 뽑는 게 일반적으로 더 우월했다. 중국부터가 시험으로 뽑으니 훨씬 개판되고 천민주의 프랑스도 귀족주의가 더 강한 영국, 독일한테 처맞고 다녔다. 참고로 고려는 6차, 30년에 걸친 몽골의 침략 과정에서도 조선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강화도에 조정이 짱박힌 상황에서도 지방 방어요충지에 정 6품에 해당하는 임시직 방어사령관을 파견하고 전투에 공이 있으면 때로 신분을 초월해 포상하기도 했다. 또한 전투에서 승리한 행정구역을 1~2단계씩 상급행정구역으로 높여주기도 했는데 처인부곡->처인현, 충주목->국원경으로 높여준게 그 예.... {{진실}} {{원흉}} ㄴ대한민국의 군인 푸대접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관하다. 라고 누가 지랄을 해놨는데 시발 왕이랑 무신집정이란 새끼들은 강화도에서 백성들이 죽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고 이 시기 대부분 몽골 침략은 백성들이 다 막았다. 전쟁이 고려의 강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상당한 인명손실과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덕분에 현재 몽고침입 이전의 목조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임진왜란 시기에 백성들의 고초도 상당했지만, 그건 고작 7년이었고 명나라의 지원도 있었던 데다 조선 정부는 왜군을 몰아내는 것에 분명한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몽고와의 전쟁 당시엔 무려 28년간 전투를 포기하고 저항 의지도 버린 고려 정부가 방관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재앙이었다. 3차 침입 이후에는 고려 전역이 쑥대밭이 되는 통에 침략군인 몽골군조차 현지징발이 매우 힘들어지는 사태까지 놓이는 일이 흔하게 벌어졌을 정도. 백성들이 정부의 수탈과 몽골의 칩입으로 죽어갈 때 강화도에서는 최씨 정권들이 미녀들과 금은보화로 사치와 호사를 누렸다. 한국의 그 어떤 역대 왕조도 몽골 침략기의 고려처럼 나라를 방치하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비교해도 최소한 조선 조정은 왜군을 몰아낸다는 분명한 목적을 끊임없이 밀어붙였지 고려 조정처럼 아몰랑 하지는 않았다. 사실 고려말 왜구 침입 때도 귀족 군대는 백성들이 썰리든 말든 존나 구경만 했다. 홍건적처럼 나라가 진짜 망할 것 같을 때나 가끔 참전함. 무신정권(이 새끼들은 최고 권력자도 꼴랑 병력 100명 가짐.)이 결국 나라를 못먹은 이유가 귀족들(병력이 최소 백 단위~천 단위) 때문인데 귀족 군대는 막판에 참여해서 무신들을 썰어버리긴 했지만 백성들 절반이 몽골군한테 뒤지는 동안 병력 아깝다고 안 싸웠다. 사실 고려사의 세가 등을 보면 귀족들조차 귀족들이 노답이라며 양반의 나라로 바꾼 이유가 있다. 사실 대몽항쟁이라 부르는것부터 역사왜곡이다. 거의 항쟁도 안하고 아몰랑했는데 뭐가 항쟁? 게다가 40년 항쟁이라며 무슨 남송이나 이슬람에 가해진 것과 같은 가열찬 공격을 40년간 디펜스 한 것처럼 말하는데, 실제로는 금이나 송을 공격할때마다 곁다리로 2-3만의 별동대를 보낸것이 진실이며 그조차도 아몰랑 한게 고려조정이었다. 동시기 헝가리는 왕이 직접 군대끌고 나가 싸웠고, 졌어도 망명까지 해가며 끈덕지게 대들어서 끝내 독립을 지켰고(누구처럼 총관부 설치되지도 않았고 소녀들을 조공으로 바치지도 않는 진짜 독립) 이집트 역시 아인잘루트에서 몽골군의 진군을 막았으며 베트남도 쩐흥다오라는 게릴라 명장의 지휘로 독립을 지켰다. 그 밖에 카프카스 일대의 소국들도 험난한 지형을 무기삼아 끝내 몽골이 굴복시키지 못했다. 이런 나라들이 진짜 항쟁답게 항쟁한 나라들이다. 막말로 몽골 대칸들이 직접 정예병력으로 원정을 했는데도 40여년간 저항하고 황족들과 신하들이 애산 전투에서 몰살당하면서까지 40여년간 저항한 남송에 비하면 이 당시 백성들을 버리고 자기들만 사치를 부린 고려의 행태는 그냥 추악할 뿐이다. 우리가 세계사 공부하면서 남송 문약하다고 비웃는데 30여년간 강화도에서 호의호식하다가 비굴하게 항복한 고려의 신하들은 남송 최후의 충신 문천상의 정기가를 듣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땅에 처박아야 할 것이다. 세계사 제대로 공부한 새끼들이라면 남송을 문약하다고 비웃지 않는다. 디펜스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출중하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수세적인 입장을 벗어난 적은 없다. 당나라와 비교하자면 얘들도 토번한테 발려 공주를 조공으로 바친적도 있으나 반대로 잘나갈때는 몽골고원 제패하고 유목민들에게 '칸'이라 인정받은 적도 있고, 한나라도 고조가 흉노한테 발려서 조공 바치고 빌빌 긴적이 있으나 무제때는 바이칼호까지 관광 보낸다. 송나라는 그런거 없고 그나마 공세로 나섰던 것도 어디까지나 읽어버린 국토탈환 정도지 한이나 당처럼유목민의 근거지를 어떻게 해보는건 꿈도 못꿨다. 하다못해 방어전만 하더라도 요나라와 맞짱 뜰 때 30만, 20만 8천을 굴렸던 나라였고 원정군으로 17만 대군을 편성해서, 이제 막 금나라로 통합하기 직전의 포텐을 터뜨리려는 여진족과 대대적으로 싸워 밀어낸 사실만 봐도 10만 방어군 굴리기도 버거웠던 조선보단 훨씬 강했다. 조선도 임진왜란 때 선조 ㅌㅌ했어도 의병빼고 정규군 20만 넘게 굴렸음 ㅇㅇ 근데 원래 고대에는 미화와 뻥튀기가 기본이었는데, 유교탈레반 조선은 춘추필법을 매우 열심히 지키겠다고 유교 후빨하며 사실적으로 쓰려고 노력을 좀 했다. 조선이 고려보다 땅덩이가 더 컸다고 해도 현실에 맞지 않는 행정 체계와 사회 구조 때문에 제 역량을 깎아먹고 있었기에 이런 결과가 일어난 것이다. 근데 몽골 제국한테 뒤지게 맞으면서 당 태종 어쩌고 딸딸이나 치다가 카다안의 침입 때도 좆털려서 X발, 니들 약체임? 소리 들음 그렇다고 군바리들 대우를 잘해준 것도 아니고 무신들이 진급할 수 있는 계급의 최종 상한선이 상장군이었는데 현재 헬조선으로 대입하면 대략 국장 - 차장 정도이다. 그리고 암만 공적을 높게 쌓은 장수라 할지라도 이 이상으로 진급을 못하게 법으로 막았다. 물론 이건 [[조선]]도 다르지 않아서 무관들의 진급 한계선을 만들어놓긴 했으나 [[갓순신]]처럼 존나게 유능한 장수라면 문신 계급을 줘서라도 진급을 시켰다. [[신라]]도 군인을 이따위로 취급하진 않았다. 하지만 고려는 그런 거 없다. [[송나라]]도 고려와 다르지 않았지만 여긴 군인들에게 '''돈을 빵빵에게 줘서''' 별 불만이 없었다. 송나라의 그 많은 굴욕은 단순히 유목민족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다. 근데 고려는 [[무신정변]]이라는 폭탄이 터지기 직전까지 이 문제점을 그대로 방치하기만 했었다. 결국 [[무신정변]]이라는 폭탄이 터지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무신들의 진급 상한선에 대한 울분도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이것도 [[무신정권]] 성립 전까지의 얘기지 무신정권이 지속되면서 특히 최씨 무신정권대에 이르러선 고려 정규군의 힘은 완전히 약체가 되었다. 최씨 무신 집정자들은 싸움 잘한다는 병사와 유능하다는 장교들은 전부 자신의 사병에 귀속시켜 [[삼별초]]라는 친위대를 만들었다. 이들에게 빵빵한 보너스와 새삥 장비를 몰빵해주는 바람에 고려 군인들이 전부 삼별초로 몰려들었고 덕분에 고려 정규군은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되어버려 퇴물들이나 자리 지키는 집단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원나라 간섭기에 이르자 아예 군대 자체를 양성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어 사실상 고려군이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후기의 고려군은 각 지방의 유력 가문들이 보유한 사병들을 묶어서 고려군이라고 칭하는 것에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한치라고 삐끗 했다간 그대로 후삼국시대처럼 또다시 나라가 쪼개질 수도 있었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이를 염려하여 공이 있는 장수들에게 이런 저런 벼슬과 상금을 내린 고려정부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인해 그렇게 되진 않았다 특이하게도 고려군에 대한 유물은 지금까지 한점도 출토된 적이 없었다. 당대와 후대의 잦은 전란 때문으로 추정된다. 덕분에 고려군이 어떤 무기를 썼는지, 갑옷은 뭘 입었는지는 어디까지나 추측으로 예상되어질 뿐이다. 불행 중 다행히도 고려 말 왜구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정지라는 장군의 갑옷이 출토되었는데 덕분에 최소한 고려 말에는 고려군이 경번갑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고로 고려말을 배경으로 사극에서 고려군이 경번갑이 아닌 다른 갑옷을 입은 장면이 나온다면 그건 고증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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